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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43화 (43/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43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입술을 벙긋거리던 로제타가 이내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맴돌았다.

그러다 잠시 후 머릿속에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그녀가 테런에게 가볍게 물었다.

“혹시 오늘의 이 제안에 대해서, 클라리사에게 먼저 언질을 주셨나요?”

테런은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저녁나절 긱스와 이야기를 나눈 뒤, 정리되는 대로 로제타를 부른 것이었다.

식당에서 나간 이후론 클라리사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기에 로제타의 질문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그러십니까?”

“아까 약을 먹이고 재울 때 엄청 심각한 표정으로 제 연애와 결혼에 대해서 훈수를 두더라고요. 꽤 새겨들을 만한 이야기들이었답니다.”

“클라리사가 저보다 낫군요. 그래, 그 아이가 대체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테런의 질문에 로제타가 웃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아마 공작님은 이제부터 클라리사를 설득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셔야 할지도 몰라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그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

“그 아이가 제게 그랬거든요. 절대 자신의 오라버니 같은 남자는 만나지 말라고.”

“……예?”

테런의 얼굴에 놀람이 번졌다.

그 모습에 로제타는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느라 애썼다.

테런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사랑하는 동생이 저에 대해서 그렇게 박한 평가를 한 것일까?

자신이 클라리사에게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걸까?

딱히 짚이는 게 없었다.

퍽 심각해진 표정을 보던 로제타는 더 재지 않고 대답을 들려주었다.

“공작님이 평소에도 너무 바쁘셔서 외로웠대요. 그래서 바쁜 남자를 만나면 저도 자기처럼 외로워질 것 같아 그런 말을 한 듯싶어요.”

테런이 민망함에 주먹 쥔 손을 앞으로 가져와 짧게 헛기침하고는 다시 팔짱을 꼈다.

“제가 내걸었던 두 번째 조건은, 그런 남매분들을 위한 시간이기도 하니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결국, 영애께서 저희를 배려해 주시는 것과 다름이 없군요.”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다는 말과 함께 로제타가 웃었다.

“그나저나 클라리사의 말을 새겨들으셨으면 전 오늘 거절을 당했겠군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머. 전 언제나 그 아이의 말을 새겨듣는답니다. 그래서 공작님께도 약속드릴 수 있어요.”

웃음기를 매단 부드러운 음성이었으나, 곧은 심지가 엿보이는 말투였다.

“저도 상처받을 일 없게, 절대 공작님을 사랑하지 않겠다고요.”

그 순간 팔짱을 끼고 있던 테런의 팔에 힘이 실렸다.

셔츠가 팽팽해질 정도로 근육이 불거진 상태였다.

그는 마치 후두부를 얻어맞은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분명 자신이 원하는 게 맞을진대, 로제타가 이렇게까지 확언을 하니 이상하게도 입맛이 썼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가라앉은 기분이 목소리에 그대로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기색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로제타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상하네요. 따로 언질을 준 것이 아닌데, 클라리사가 이 일을 어떻게 알고 미리 말한 것일까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음’ 소리를 내며 생각에 잠겼다.

* * *

에스테스 영지 내, 중앙 광장에 위치한 선술집.

가게의 크기는 작았으나 손님은 무척이나 많았다.

저마다 자신의 일행들과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뒤섞여 주점은 제법 시끄러웠다.

그 가운데서 한스는 혼자 구석진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움츠리고 있다가 출입문에 달아 놓은 종소리가 들릴 때마다 자라처럼 길게 목을 빼 들고 그쪽을 쳐다 보았다.

“그, 그냥 돌아갈까…….”

테런과 클라리사, 그리고 에스테스 파크의 사람들이 제게 얼마나 잘해 주었던가.

그런 이들을 팔아먹는 게 너무나도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말과 달리 그의 엉덩이는 마치 밀랍을 녹여 의자에 붙여 두기라도 한 것처럼 도통 일어서질 못했다.

“하아. 그냥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번이 마지막이고 더는 안 하면 돼. 솔직히 지금까지 뭐 대단한 정보를 팔아넘긴 것도 아니니까…….”

한스는 불편한 제 마음을 달래려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말을 중얼거렸다.

내내 그렇게 똥이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던 한스의 위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드리웠다.

“여긴 참 따분한데 시끄러워. 그렇지, 한스?”

한스의 몸이 떨리며 천천히 고개가 위로 들렸다.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 한 명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긴장 풀어. 그렇게 계속 흠칫거리면 날 좀 보소, 하고 광고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말이야.”

그가 비아냥대듯 말하며 한스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남자의 목소리는 한스보다 어렸으나, 자연스럽게 하대하고 있었다.

“드, 들어오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당황한 한스의 말에 얼굴을 감춘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는 따로 대답하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특별한 일은?”

한스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열어 개미가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다른 건 없습니다. 공녀님의 건강 상태는 매우 좋으시고, 공작님 역시 쉬러 오셨을 뿐이니까요.”

“흠. 정말이지 재미없는 일상을 사는군. 수도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영지로 내려갔다길래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더니.”

로브를 쓴 남자가 재미없다는 듯 혀를 차며 중얼거리자, 한스는 그게 꼭 저한테 뭐라고 하는 것 같아 고개를 조아렸다.

로브를 쓴 남자가 손을 주머니에 푹 찔러 넣었다.

“콘웰에 무슨 일이라도 터진 건가 했더니, 계속 여기에만 머무르는 것을 보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인지? 빌어먹을. 모처럼 건수 좀 잡나 했더니.”

그러자 뒤이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돈을 만지작대고 있는 듯했다.

그 소리에 한스는 더욱 입 안이 마르며 초조해졌다.

에스테스 공작 남매를 염탐하고, 그들의 동향을 팔아넘기는 제 행동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은 이미 깡그리 사라지고 없었다.

뭔가 전할 말이 필요한데.

‘뭘, 뭘 전해야 좋지?’

오늘까진 돈을 마련해야 사채업자들에게 이자를 낼 수 있었다.

한스는 필사적으로 남자의 구미를 자극할 만한 이야기를 생각해 내려 애를 썼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무엇인가가 퍼뜩 떠올랐다.

“아 참. 있습니다, 새로운 일!”

“오. 뭐 다른 게 있나?”

로브를 쓴 남자가 다시 흥미가 돋는다는 듯 손안에서 돈을 굴리는 행동을 멈추었다.

그는 상체를 앞으로 바싹 당기고 테이블에 양팔을 걸쳤다.

“수도에서 긱스 경이 내려왔습니다.”

“긱스가 누구지? 아! 에스테스 공작의 그 시건방진 보좌관 말인가?”

“예, 예. 그렇습니다. 모시러 왔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는데, 아마도 조만간 다시 수도로 올라가실 것 같습니다.”

“흠, 그래?”

남자가 손톱 끝으로 타닥타닥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그런 그의 움직임이 계속될수록 한스는 가슴을 졸였다.

“곧 수도로 올라간다고 했지?”

한스가 두 손을 꽉 쥔 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절박함과 비슷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정확한 날짜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조만간 그럴 것 같습니다.”

“물론 에스테스 남매가 타는 마차는 자네가 몰 테고?”

“공녀님을 수도에서부터 함께 모시고 내려왔으니까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흠, 그래. 좋아.”

남자가 기껍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런 뒤 품속을 뒤져 묵직한 주머니를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챙겨서 받아 두게. 정보가 제법 유용했어.”

“감사합니다!”

한스는 테이블 위에 이마를 박을 기세로 거칠게 고개를 숙인 뒤 돈주머니로 팔을 뻗었다.

그의 손이 비정상적으로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런 한스의 행동을 잠시 보던 로브를 입은 남자가 혀를 차며 훈수를 뒀다.

“거, 웬만하면 노름은 좀 끊게. 늘그막에 겨우 하나 얻은 아들이 도박으로 인생 말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자네 홀아버지가 얼마나 가슴을 치겠나?”

한스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돈을 세어 보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로브를 쓴 남자는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뒤, 올 적과 마찬가지로 소리 소문도 없이 주점을 빠져나갔다.

* * *

수도로 떠날 준비는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었다.

에스테스 파크에 있는 것이 수도의 저택에 없을 리 없기에 딱히 챙겨야 할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제법 가벼운 차림으로, 로제타와 클라리사는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았다.

집사와 하녀장, 그리고 시종 모두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수도에 올라가셔도 약 잘 챙겨 드시고 건강히 지내십시오, 공녀님.”

“이렇게 가시면 언제 다시 뵐지 모르겠어요. 공녀님이 에스테스 파크에 계시는 동안 저흰 모두 행복했답니다.”

“집사……. 줄리아. 그리고 모두 정말 고마웠어.”

작별 인사에 찡해진 모양인지, 클라리사는 오빠인 테런이 선물한 테디 베어를 옆구리에 껴안은 채 코를 훌쩍거렸다.

하녀장 줄리아가 로제타를 바라보며 말했다.

“공녀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클리프 영애.”

“줄리아만큼 잘 해내진 못하겠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으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차분한 로제타의 대답에 줄리아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괜찮다면 한번 안아 봐도 될까요?”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로제타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순간, 줄리아가 조심스럽게 로제타의 어깨를 잡고 제 품에 끌어안았다.

“영애도 무척이나 그리울 거예요. 우리 에스테스 파크의 식구들 모두 다.”

줄리아는 언제나 엄격하게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초반에는 그녀의 눈치를 많이 봤었다.

하지만 같이 살며, 그녀가 단순히 표현하는 방법에 서툴 뿐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따듯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애의 따뜻한 마음과 유쾌함이 좋았답니다. 낯선 생활이지만, 수도에서도 잘 적응하길 바라요. 건강하고요.”

“고맙습니다, 줄리아.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요.”

로제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이 몇 개월간 머물렀던 ‘집’을 천천히 둘러 보며 눈에 담았다.

‘안녕, 에스테스 파크.’

로제타는 이곳이 평생 그리워질 것만 같았다.

미련을 접어 두고,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준비된 마차 앞으로 다가 갔다.

마차는 총 두 대였다.

로제타를 잡고 있던 클라리사의 손에 힘이 실렸다.

“왜 그러니 클라리사?”

“오라버니와 같은 마차를 타고 싶지 않아요.”

“뭐?”

폭탄 같은 그 선언에 테런과 긱스, 그리고 로제타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클라리사에게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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