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44화
사실 이런 경우엔 같은 마차를 탈 사람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다.
보통은 동성끼리 타지만 이런 경우에선 신분으로 나뉜다.
보다 작위가 높은 에스테스 공작 남매가 한 마차에 오르고, 로제타가 긱스와 함께 타는 것이다.
그 예법을 모르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클라리사는 고집을 부렸다.
그녀의 이 차가운 태도는 엊그제부터 시작되었다.
테런이 클라리사와 긱스에게 로제타와 약혼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린 날이었다.
「정확한 이야기는 수도에 가서 마무리 짓겠지만, 일단 네게 먼저 알려야 할 것 같아서.」
테런은 클라리사에게 말을 전할 때 계약이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은 쏙 뺐다.
아무리 또래보다 영특한 아이라고 한들, 기저에 얽힌 어른들의 상황과 이해관계까지 다 수긍하기는 무리라는 판단에서였다.
혹시라도 로제타가 중간에서 곤란해 질 상황까지 고려하여, 아주 단순하게 ‘약혼한다’는 사실만을 전했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바쁘시잖아요.」
「영애를 외롭게 만들지 않으마.」
클라리사는 입술만 꾹 말아 문 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제 오라비를 맹렬하게 노려볼 뿐이었다.
「로제타 언니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된다면, 결코 오라버니를 용서치 않겠어요.」
그때 테런은 노력하겠다고 대답하면서도 마음이 좀 미묘했다.
왜 클라리사가 로제타의 동생 같지.
분명 제 동생인데 마치 꼭 처제 같은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클라리사는 아직 마음이 다 안 풀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로제타의 손을 더욱 꽉 잡으며 말했다.
“저는 로제타 언니랑 토토랑 이렇게 셋이서 마차를 탈 거예요.”
이번 상경에는 토토도 함께였다.
다시 정을 떼기 어려웠던 클라리사가 고집을 부려, 토토를 함께 데리고 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오라버니는 긱스 경과 함께 가세요.”
“그럼 이 오라비는 마차에서도 일하느라 멀미가 날 텐데.”
“그러시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클라리사는 단호했다.
테런의 옆에 서 있던 긱스가 고소하다는 듯 웃음을 참으며 넌지시 말했다.
“각하, 아무래도 미운털이 단단히 박히신 것 같습니다.”
“이보게, 긱스. 윌셔스에서 나 나름 일등 신랑감 아니었나? 클라리사가 왜 이렇게 날 미워하지?”
긱스가 미간을 엄청나게 좁히며 제 상관을 바라보았다.
“각하, 보통 그런 말은 스스로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아니, 내 생각은 좀 다르네. 요즘은 자기 홍보의 시대야. 잘난 걸 여기저기 알리며 소문을 내야, 사람들도 아 저 사람이 그만큼 잘났구나 하고 인정해 주는 법이거든.”
“겸손하십시오.”
“걱정하지 말게. 자네 앞에서만 이러니.”
로제타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싱그러운 그 웃음에 두 남자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아 콕, 박혔다.
“아, 이런. 실례했어요.”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테런이었다.
“뭐, 어차피 할머님과 가는 것도 아니니 문제는 없겠지.”
산뜻하게 마차를 나누어 타는데 동의한 테런은 이내 자신의 양쪽 무릎을 짚으며 클라리사의 키에 맞춰 몸을 낮추었다.
“대신 하나만 약속해 주겠니, 클라리사?”
“무엇인가요?”
“수도로 올라가기 전까진 클리프 영애와 함께 타도 된단다. 하지만 수도에 도착해서는 성문 앞에서 마차를 갈아타는 게 좋겠다.”
“싫어요!”
클라리사가 토라진 목소리를 높였다.
떼를 쓸 것을 예상했다는 듯 테런이 차분하게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클라리사. 영애는 이번에 처음으로 할머님을 만나게 될 거란다. 예법을 중시하는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니? 영애의 첫인상을 우리가 최대한 좋게 만들어 주는 편이 좋다고 이 오라비는 생각하는데.”
그러자 신기하게도 클라리사의 고집이 한풀 꺾였다.
클라리사는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을 쭉 뺐다.
“……그렇게 할게요.”
“착하다.”
테런이 클라리사의 정수리에 손을 얹어 쓰다듬어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큰 마차를 이용하십시오.”
그가 마차 문을 연 뒤 클라리사를 먼저 번쩍 안아 올려 태웠다.
그다음 로제타를 다시 바라보며 에스코트하겠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왜 하필 그때, 구름에 가리었던 해가 모습을 드러내고, 테런의 위로 쏟아지는 것인지.
그의 얼굴에 역광이 드리우고, 이목구비가 순간 어두워졌다.
그 순간 로제타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그의 모습에 누군가가 겹치듯 떠올랐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호숫가에 그네를 만들어 걸었던 날 그랬듯 이번에도 그랬다.
지금의 테런보단 조금 더 키가 작은 소년이 제게 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겹쳐 보이었다.
로제타는 그 아이가 누구인가 싶어 미간을 좁히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마치 누군가 검은 물감을 칠해 놓기라도 한 것처럼 이목구비가 선명히 떠오르지 않았다.
‘대체 누구지?’
자신이 그렇게 어린 소년을 알던가.
혹시 이시크를 떠올린 것인가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능적으로 이시크는 확실히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뭔갈 더 떠올려 보려 해도 머리가 지끈 아파져 생각을 이어 나가는 일이 불가능했다.
“……윽.”
로제타가 고개를 떨구고 질끈 두 눈을 감은 채, 빈손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그러자 테런과 클라리사의 놀란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언니! 왜 그러세요?”
“영애? 괜찮습니까?”
“아, 네. 괜찮아요. 잠시 어지러워서요.”
“많이 불편하신 거면 출발을 조금 미루도록 하죠.”
“아뇨. 그 정도는 아니구요. 지금은 괜찮아요.”
로제타는 여전히 제게 내민 테런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자신의 손끝을 살짝 올렸다.
그러자 단단한 손이 그녀를 꽉 잡았다.
“그럼 오르시죠.”
로제타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자리에 앉고 문이 닫히기 무섭게 마차는 구르기 시작했다.
로제타는 창문에 달린 커튼을 걷고는 조금씩 멀어지는 에스테스 파크의 모습을 새기듯 눈에 담았다.
이곳에서의 다정한 나날들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 * *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
어디선가 멀리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길게 들려오며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대저택의 두꺼운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로브를 둘러쓴 남자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사용인들도 모두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인지라 그의 출입을 눈치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남자는 저택의 구조에 익숙한 듯 곧장 계단이 있는 쪽으로 향하며 2 층으로 올라갔다.
목적지는 동쪽의 서재였다.
그가 불이 꺼진 복도에 발을 디딤과 동시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벽에 걸어 놓은 촛대에서 화르르 불이 타올랐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복도가 밝아진 것은 아주 잠시였다.
바람 한 점 불지 않건만, 불꽃은 위태롭게 일렁이다가 빠르게 사그라졌고, 복도는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제 목에 걸려 있는 펜던트를 바라보았다.
그런 뒤 다시 손가락을 맞부딪쳐 보았지만, 부싯돌을 두드리는 것처럼 작은 스파크만 일어날 뿐 다시 불이 켜지는 일은 없었다.
“젠장. 언제쯤 익숙하게 다룰 수 있을는지.”
그렇게 제게 드리워진 기나긴 어둠을 그림자 삼아 걷던 남자의 걸음이 멈췄다.
남자는 서재 앞에서 매고 있던 펜던트를 벗었다.
그런 뒤에야 작게 노크를 하고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접니다, 아버지.”
안이나 밖이나 어두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다만 이상한 점은 복도에서와는 달리 서재 안에는 촛대가 있어도 불이 켜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패트릭.”
“지금 에스테스에서 돌아왔습니다.”
“고생이었겠구나.”
남자가 로브를 벗자 그 안에서 더티 블론드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떨어졌다.
패트릭이라 불린 그는 벽난로 앞의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한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의자에는 패트릭과 같은 머리카락 색을 가졌으나, 나이 탓에 조금 더 희끗희끗해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있었다.
패트릭은 그에게 서재 문밖에서 벗었던 펜던트를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넸다.
“에스테스 공작이 갑자기 영지에 내려간 이유는 뭐더냐.”
중년 남성은 손을 뻗어 펜던트를 집어 가며 느릿하게 물었다.
“특별히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휴가 겸, 영지에서 요양 중인 여동생을 만나러 간 것 같았습니다.”
“그 능구렁이 같은 놈이 정말 아무런 꼼수도 없이 그저 휴가를 즐기러 간 것이라고?”
“여동생에겐 무척이나 무른 성격이니까요.”
“네가 정보를 산 자가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없느냐?”
“없습니다.”
패트릭의 대답에도 중년 남자는 손에 깍지를 낀 채, 오른쪽 검지로 손등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패트릭은 보고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테런이 조만간 다시 수도로 올라온다고 하더군요. 에스테스 대부인께서 호출했다고 합니다.”
“그 할망구의 생각이야 뻔하지. 드디어 제 손자인 에스테스 공작을 결혼시킬 셈인 거야. 어쨌거나 대는 이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흥, 그 할망구 성격치곤 많이 참았지.”
중년 남성이 콧방귀를 뀌며 대답하자, 패트릭이 거들 듯이 물었다.
“그럼 올리비아에게 귀띔해 둘까요?”
“아니다. 그건 내가 직접 할 테니 너는 그 일에 대해선 신경 쓰지 말도록 해라.”
“예.”
패트릭은 깊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다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버지.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일단은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뭐지?”
“에스테스 남매와 함께 올라오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고 했습니다.”
“그게 누구지?”
“에스테스 공녀의 간병인이라고 합니다. 20대 초반의 남작가 영애인데, 사생아라고 하더군요.”
“뭐, 간병인쯤이야.”
중년 남자는 곧바로 흥미를 잃었다는 듯 패트릭을 향해 성의 없이 나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패트릭이 깊게 허리를 숙인 뒤 서재를 나서자 서재 안은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중년의 남성은 손안에서 펜던트를 굴렸다.
그러자 펜던트에 달린 보석에서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벽난로 안에서 가만히 타오르던 장작불 역시 난로를 벗어날 정도로 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감정이라도 있는 불꽃처럼.
제법 위협적인 불길이었으나 중년의 남성은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방으로 튀는 불티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그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슬슬 시작해 봐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