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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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일주일을 이동한 마차는 수도로 들어가는 성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듣기로, 테런과 긱스가 영지로 내려올 때는 사흘 정도 걸렸다 했는데 아무래도 클라리사와 로제타를 배려해서 움직이다 보니 시간이 배는 더 걸린 것 같았다.
“그럼 이따 보자, 클라리사. 그리고 토토도.”
테런과 약속은 했지만, 로제타와 떨어지기 싫었던 클라리사는 토라진 티를 내며 웅얼거리듯 대답했고, 토토는 씩씩하게 큰 목소리로 대답하며 바쁘게 꼬리를 흔들었다.
“컹컹! 컹!”
로제타가 마차를 갈아타기 위해서 내리자, 테런이 해쓱한 얼굴을 하고선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괜찮으세요, 공작님?”
“하하하, 영애. 고맙습니다. 마차를 바꿔 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무래도 또 오는 동안 마차 안에서 서류를 본 모양이었다.
수도로 올라오는 동안 계속 이런 식이었다.
잠깐 쉬며 끼니를 때울 때나 여관에서 묵을 때 테런과 긱스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두 남자의 얼굴이 갈수록 상하고 있었다.
“일이 많으신 모양이에요.”
테런이 살짝 고개를 떨구고는 큰 손으로 제 이마를 덮었다.
눈이 뻑뻑한 모양인지 눈 앞머리를 엄지로 꾹 누르기도 했다.
“긱스의 가방에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를 해치우면 다른 서류가 튀어나오거든요.”
“얇아 보이던데…….”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테런이 피로에 물든 얼굴로 피식 웃고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차까지 모시겠습니다.”
“멀지 않은걸요.”
“에스코트는 신사의 즐거움이니 부디 뺏지 말아 주십시오.”
테런의 능청에 로제타가 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기쁜 마음으로.”
함께 이동한 걸음은 고작 스무 걸음일 뿐이었다.
테런이 로제타의 손을 놓고 마차 문을 두드렸다.
“긱스.”
문을 열자 안에서 늘어놓은 서류와 자리를 정리하고 있던 긱스의 모습이 보였다.
로제타가 서둘러 말했다.
“제가 봐도 괜찮은 서류라면 굳이 치우지 않으셔도 돼요. 듣자 하니까 이동할 거리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아서요.”
“그래도 앉을 자리는 마련해 드려야지요.”
긱스가 재빨리 마차에 널브러진 서류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로제타의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영애를 잘 모시게.”
테런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오른 그녀가 자리에 앉고는 짧은 헛기침을 연속으로 터트렸다.
에스테스 파크에서부터 긱스와 여러 번 마주치긴 했었지만, 이렇게 단둘이 대면하듯 앉는 것은 처음이라 새삼스럽게도 긴장이 되었다.
테런에게서 계속 일하며 왔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긱스는 서류를 보지 않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로제타가 민망함을 꾹 참으며 웃음을 띤 얼굴로 말했다.
“괜히 저 때문에 서류를 못 보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닙니다. 저도 잠깐 쉬고 좋지요.”
긱스의 목소리와 태도는 꽤 정중했다.
“조금 민망하지만, 다시 한번 제대로 인사를 드립니다. 에스테스 공작님의 수석 보좌관인 긱스 라스크라고 합니다.”
“로제타 클리프입니다.”
그새 말들도 목을 다 축인 모양인지 다시 마차가 구르기 시작했다.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로제타는 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화제를 찾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도와 가까워서 그런지 길이 상당히 매끄럽네요.”
“우선 가까운 곳부터 정비 사업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긱스의 설명을 들었다.
지방 영지의 길들은 모난 돌이 튀어나온 데가 많아서 아무리 마차를 조심스럽게 몰아도 덜컹거림이 심했다.
그 탓에 마차가 아무리 튼튼하고 좋아도 멀미가 조금씩 났었다.
하지만 수도에 가까워질수록 그러한 흔들거림은 많이 줄어들었다.
로제타가 창밖을 살짝 내다봤을 때였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긱스가 말을 붙여 왔다.
“클리프 영애. 혹시 일전에 수도에 와 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아뇨,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럼 간단하게 알고 계시는 것도 좋겠군요.”
긱스는 콧대를 타고 내려온 안경을 검지로 살짝 밀어 올리며 설명했다.
“수도인 아렌트는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안쪽에 있는 왕궁을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나가죠.”
윌셔스의 왕궁은 라츠산이라는 거대한 산을 등지고 아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라츠산은 산 정상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기에 그 산을 넘어 누군가가 침략을 해 올 가능성이 극히 낮았다.
하여 군사적인 관점으로도 요충지에 가까웠다.
“왕가를 비롯해 이능을 가진 다른 세 가문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죠?”
“네. 바람의 에스테스와 불의 리스턴, 그리고 땅의 랭우드…… 맞나요?”
“맞습니다.”
긱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천천히 설명을 이었다.
“세 가문의 대저택은 왕궁을 수호하듯 각자의 구역에 자리를 잡고 있지요. 동쪽에 리스턴 후작가, 서쪽엔 랭우드 후작가, 그리고 가운데는 에스테스 공작가가 있습니다.”
“그렇군요.”
긱스의 설명에 따르면 그 대저택의 외부에 다른 귀족 가문의 거주지가 있고, 또 그 외부에 평민 지구가 있다는 것이다.
“음, 뭐랄까요. 마치 무지개 같네요.”
“그렇게 비유를 하시는 분은 처음이지만,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긱스에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던 로제타는 자신이 탄 마차가 꽤 빠르게 이동하고 있음을 깨닫고 놀랐다.
첫 번째는 길이 잘 닦여 있어 바퀴에 채는 것이 없다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빠른 속도였다.
아무리 길이 잘 닦여 있어도 그렇지. 이렇게 빨리 달려도 되는 건가?
전생에서 음주 운전으로 과속을 하던 차량에 치여 숨졌기에 이런 쪽에 조금 예민했다.
“시내에서 이렇게 빨리 달려도 되나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부터는 오직 4가문만 사용할 수 있는 전용 도로로 이동하기 때문에 사고가 날 위험이 극히 적으니까요.”
“4가문만 이용하는 도로가 따로 있나요?”
로제타가 놀란 얼굴로 되묻자 긱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뭐, 일종의 특혜죠.”
그가 입을 길게 늘였다가 이내 그녀의 눈치를 한번 보고는 설명을 이었다.
“하지만 4가문은 그 특혜를 누릴 만합니다. 윌셔스 왕국민들의 생활을 이 가문들이 책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말이죠.”
윌셔스 왕실은 깨끗한 식수를 끌어오고, 리스턴은 왕국민들의 삶이 어둡지 않도록 불을 밝혀 준다.
에스테스는 바람 속성이라 하는 일이 많았다.
비바람을 몰고 와 농사일을 돕기도 하고, 공기의 흐름을 이용해 타국의 정세를 살피는 일도 하였다.
그리고 랭우드는 왕국민들이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단단한 땅을 다졌다.
“애석하게도 랭우드 후작가는 불의의 사고로 그 대가 끊어졌지만요.”
긱스가 자신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가 멈칫했다.
그는 로제타의 표정을 살피듯 잠시 얼굴을 힐끗거리다가 짧은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다시 돌렸다.
“그렇기에 윌셔스의 왕국민들과 귀족들은 왕가와 다른 3가문에 존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그밖에 더 궁금한 점은 없으십니까?”
“음,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앞으로 에스테스의 안주인이 되실 테니까요.”
긱스의 말에 로제타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에스테스 대부인이 어떤 분인지 궁금해요.”
“카밀라 님은…….”
긱스가 말을 고르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고심하는 것이, 찌푸려진 미간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예의와 예법에 엄격한 분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에스테스에 대한 자긍심이 크신 분이죠.”
로제타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긱스의 상황을 이해했다.
그는 테런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용인은 아니었지만, 에스테스 공작가에 속해 있는 만큼, 윗사람인 제 주군의 혈육을 감히 판단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로제타는 긱스의 그런 신중함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그가 최대한 사실만을 객관적으로 전한 그 말은 솔직히 별 도움은 못 되었다.
이미 클라리사에게서 들어 본 말과 별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법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어.’
로제타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선대 공작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아! 제임스 님은 아마 당분간 만나 뵙기 힘드실 겁니다.”
“얘기는 클라리사…… 공녀님으로부터 들었어요. 작위를 물려주시고 수도를 떠나셨다고.”
“예, 맞습니다. 지금 어디쯤 계시는지는 아마 바람의 힘을 쓰시는 공작님 말고는 모를 것 같습니다. 제임스 님은 정말 내키시는 대로 왕국 전역을 돌아다니시거든요. 그래도 선대 공작 부인의 기일엔 올라오실 것 같으니, 그때는 뵐 수 있으실 겁니다.”
“그렇군요.”
로제타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에스테스 공작가에 다다라 있었다.
마차가 멈춰 선 뒤 얼마 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렸고 바깥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올 적과 마찬가지로 테런이 그녀를 마중 나와 서 있었다.
그는 정중하게 왼손으론 뒷짐을 지고 남은 오른손을 로제타에게 내밀었다.
“에스테스 공작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세상에…….”
테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려온 로제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지의 에스테스 파크가 전원적인 느낌이라면, 이곳은 도회적이었고 세련되었다.
로제타는 한눈에 이 저택이 마음에 들었다.
넓은 부지. 하지만 그 위용을 결코 뽐내지 않는 단정함.
현관까지 이르는 길에는 수심이 얕은 인공 연못이 곧게 뻗어 있었고, 그 양옆에는 포세린 타일이 깔려 있었다.
벽체는 하얗고, 지붕은 테런과 클라리사의 눈동자 색을 닮아 푸르렀다.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편의상 이곳은 에스테스 하우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제 방은 3층이에요!”
테런과 클라리사가 번갈아 하는 설명을 들으며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덧 현관 앞에 다다라 있었다.
문 앞에 서 있던 풋맨이 자세를 가다듬고는 그들을 보며 인사했다.
“드디어 잡혀 오셨군요, 주인님.”
“잘 지냈나, 조셉.”
테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너무도 스스럼없이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들어가시죠.”
풋맨이 절도 있고 우아한 동작으로 저택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
어떻게 미리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인지, 에스테스 하우스의 사용인들이 모두 나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대략 쉰 명 정도는 되어 보이는 인원이었다.
그들은 문이 열림과 동시에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에스테스 남매와 로제타에게 허리를 굽혀 가며 인사했다.
“주인님.”
그중 외알 안경을 쓴 머리가 희끗희끗한 집사가 테런에게로 다가와 그가 벗어 건네는 모자와 외투를 받아 들었다.
“와튼. 내가 없는 사이에 별다른 일은 없었나?”
“예. 클라리사 아가씨. 더욱 건강해 지신 모습을 뵈니 기쁩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집사! 잘 지냈어요?”
남매와 살갑게 인사를 주고받던 도중, 와튼이 클라리사의 옆에 서 있던 로제타에게 시선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