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46화
“그런데 주인님. 여기 이 숙녀분은 누구십니까?”
“클라리사의 간병인이신 로제타 클리프 양이네.”
“아!”
와튼은 테런의 소개를 단박에 알아 들었다.
그의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번져 나가는 것을 보며, 로제타는 적어도 자신이 이곳에서 군식구는 아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클리프 영애. 이번에 함께 올라오셨군요.”
“네, 그렇게 되었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모심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깍듯한 와튼의 인사에 로제타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때였다.
“가주께서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그들의 머리보다 더 높은 곳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크기는 절대 크지 않았으나, 대신 음성에 힘이 어려 있었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며 사용인 모두가 숨죽였다.
클라리사도 마찬가지였다.
클라리사는 몸을 굳히며 반사적으로 반걸음 뒤로 몸을 물리더니 이내 로제타의 뒤에 반쯤 숨어 버렸다.
테런의 시선이 중앙 계단 위쪽으로 향했다.
평상시에 중앙 계단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저택을 소유한 직계 가족뿐.
로제타는 본능적으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시선이 한 박자 늦게 위로 들렸다.
그리고 허공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위엄 있는 한 노년의 여성과 시선이 부딪쳤다.
‘카밀라 에스테스 대부인.’
로제타는 저를 보고 있는 카밀라의 얼굴이 살짝 구겨지는 것을 눈치챘다.
생김새를 보다 뚜렷하게 보기 위해서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엇인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미간을 찌푸리는 표정이었다.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내려다보는 카밀라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날 싫어해. 왜지?’
로제타는 당혹스러운 마음을 애써 숨기고, 카밀라를 향해 약식으로나마 인사를 했다.
드레스 자락을 옆으로 펼치고, 무릎을 살짝 굽혔는데, 로제타의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 카밀라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카밀라의 냉랭함을 눈치 빠르게 읽어 낸 테런이 서둘러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소개를 하려 했다.
“할머님. 이쪽은, 클라리사의…….”
“됐습니다, 가주님. 소개는 나중에 받지요.”
그녀는 제 손자를 내려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으니까요. 가주. 잠시 저 좀 보실까요?”
“……예, 할머님. 곧 올라가겠습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카밀라는 더 이상 이곳에 볼 일 따위는 없다는 듯이 찬바람이 일 정도로 매정하게 등을 돌려 다시 계단을 밟아 올랐다.
테런이 한숨을 삼키며 천천히 몸을 돌려세웠다.
그는 로제타와 시선을 마주치자 미안하다는 듯 눈꼬리를 아래로 떨어트리며 미소 짓고는, 집사에게 말했다.
“와튼. 클리프 영애가 사용할 방을 내어 드리게.”
“예, 알겠습니다.”
카밀라가 자리를 뜨자, 그제야 긴장이 한결 가신 모양인지 클라리사가 보다 편안하게 행동하며 말했다.
“와튼! 내 방 근처로 부탁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가씨. 아! 그러지 말고 아가씨께서 직접 고르시면 어떨까요?”
“좋아요!”
와튼이 눈치껏 클라리사를 데리고 먼저 자리를 떴다.
로제타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테런에게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제가 같이 가지 않아도 될까요? 아무래도 제대로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녀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손가락을 얽고 있었다.
“우선 쉬고 계십시오.”
짧지만 단호한 테런의 말은 무엇인가 더 할 말이 남은 듯 벌어져 있던 로제타의 입술을 다물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혹시…… 내가 지금 선을 넘은 걸까?’
로제타는 질문을 더 이어 나가지 않았다.
테런이 제안한 계약 결혼을 받아들였으나 아직 자신이 어디까지 끼어들어도 되고, 어디까지는 안 되는지 알지 못했다.
로제타는 테런이 제게 충분히 신사적으로 굴고 있음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그래도 마음의 거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기에 괜히 그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순순한 그녀의 대답에 테런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에스테스 파크에서 봐 왔던 것과 달리 딱딱해 보이는 그 모습에서 로제타는 테런에게 조금 더 거리감을 느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네, 공작님.”
테런이 입매를 늘인 채 뒤돌아섰다.
계단을 밟아 오르는 마음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하지만 피로함을 드러낼 수 없었다.
‘에스테스 파크에서 참 좋았는데.’
짧게나마 내키는 대로 지낼 수 있었던 영지에서의 생활이 벌써 그리워졌다.
하지만 이곳은 영지가 아니었고, 그래서 그는 자신을 더욱 다잡을 필요가 있었다.
자신에 대한 통제를 완벽히 해야지만 우습게 보이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 * *
방은, 아무래도 주인의 성정을 닮는 모양이라고 테런은 생각했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용서치 않겠다는 듯 칼이 잡힌 커튼 주름과 방위를 맞춰 건 듯한 액자까지.
카밀라의 엄격한 성격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테런은 저를 찌르듯 쳐다보고 있는 카밀라의 날카로운 눈빛을 묵묵히 견뎌 내었다.
“테런. 내가 널 왜 불렀는지 알겠지?”
더는 보는 눈이 없자, 카밀라는 곧바로 테런에게 말을 낮췄다.
애써 침착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흥분한 마음을 도무지 숨기기가 어려워 보였다.
카밀라는 크게 숨을 들이켠 뒤 봉투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어서 열어 보렴. 내일부터 네가 맞선을 볼 영애들이니까.”
테런은 카밀라가 어지간히 화가 났구나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앉으라는 이야기도 없이 바로 본론을 꺼낼 리가 없었다.
“우선 후보는 네 명으로 추렸단다. 한 명씩 차례로 만나 본 뒤, 이 할미와 의논하여 네 짝을 고르자꾸나.”
애써 고상하게 말하기 위해 입꼬리를 늘였지만 도통 감정이 통제되지 않는 듯, 카밀라의 입술과 볼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처음엔 네 녀석이 너무도 괘씸해서 그냥 내 마음대로 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래도 평생을 부대끼며 살 사람인데 적어도 선택할 기회는 주자,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었지.”
어서 열어 보라는 듯 카밀라가 봉투를 테런의 쪽으로 밀었으나, 그는 팔을 뻗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테런은 그저 무감한 눈길로, 아마도 영애들의 초상화가 담겨 있을 봉투를 내려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테런? 무엇 하고 있니? 어서 열어 보지 않고?”
카밀라에게서 가벼운 재촉을 듣고 나서야 테런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괜한 고생을 하신 것 같습니다, 할머님.”
“손자를 위한 일인데, 이런 게 무슨 고생이겠니.”
“아뇨. 그 뜻이 아니라…… 모두 무르시는 편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어째서?”
“일전에 이르신 대로 결혼할 여성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카밀라가 격하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네게 그럴 시간이 어디 있었다고? 내게서 백 일의 시간을 얻어 간 뒤 곧장 꽁무니 달아나듯 영지로 내려가지 않았니? 그 탓에 내가 이토록 화가 나 네 맞선을 서두르는 것이고!”
테런은 제게 쏟아지는 그녀의 날카로운 기세를 그저 묵묵히 받아 내고 있었다.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 홀에서 보지 않으셨습니까? 비록 그녀의 인사는 받아 주지 않으셨지만요.”
“……뭐?”
“가신 가문인 클리프 남작가의 로제타 영애입니다. 수도로 올라오기 전 청혼을 했고, 그녀는 수락했지요. 가까운 시일 내에 약혼 사실을 공표할 예정입니다.”
“테런 아셔!”
카밀라가 분노에 차 소리를 질렀다.
“네가 감히 어떻게!”
“왜 이리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할머님. 이르신 대로 신붓감을 찾아왔지 않습니까?”
“하!”
카밀라가 거칠게 숨을 토해 낸 뒤 싸늘한 시선으로 제 손자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애써 침착하려고 애쓰고 있었으나, 흥분한 마음을 도무지 숨기기가 어려워 보였다.
반면 테런은 시종일관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결혼하라 하시어 데리고 왔을 뿐입니다. 왜 이리 역정을 내십니까?”
그런 그의 태도가 카밀라의 화에 더욱 불씨를 지폈다.
“그래! 내가 결혼하라고 그랬지! 하지만 아무나 데려오라는 뜻은 아니었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니?”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테런 아셔 에스테스! 아둔한 척하지 말아라. 내가 원한 손자 며느릿감을 알고 있으면서, 네가 감히! 네가 어떻게 저따위 여자를 데리고 와!”
“폄하하지 마십시오. 그녀 역시 귀족입니다.”
“천박한 붉은 머리를!”
그 순간 테런의 눈이 매서워졌다.
이를 악물었는지 아래턱이 단단해졌다.
“정말 의윕니다. 할머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리라곤 조금 생각지 못해서요.”
스산한 목소리였다.
자신에게서 붉은 머리가 어떠한 존재인지,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
상처 주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그리 비수를 꽂아 버리는 것인지.
테런은 가슴 깊은 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억눌러 온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만 그래도 제 할머니이기에, 마지막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괜히 목소리를 높이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짓씹듯 말을 뱉었다.
“한미하다고는 하나 오랜 기간 에스테스에 충성을 바쳐 온 가신, 클리프 남작가의 적녀입니다.”
“붉은 머리가 적녀는 무슨! 명부에만 이름을 올리면 다 적녀인 줄 아느냐!”
“누가 뭐래도 그녀는 남작 부처의 소생입니다. 서류상으로는 말이죠.”
카밀라는 제 손자가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평소엔 가족들에게 한없이 무르게 굴었지만, 한 번 고집을 세우면 그 누구도 꺾지 못한다는 것을 그가 어렸을 때부터 지켜봐 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발짝 물러서기에 자존심이 상했다.
이 가문이 어떤 가문이던가.
윌셔스 왕가가 지붕이라면, 에스테스는 기둥이었다.
그런 대가문의 안주인을, 한낱 사생아 남작 영애 따위에게 맡길 수 없었다.
에스테스로서는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잃는 것만 가득한 혼사였다.
그래서 카밀라는 마지막 강수를 두었다.
“난 인정 못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