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47화
카밀라는 더는 손자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모로 돌렸다.
그런 제 할머니의 고집스러운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테런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할머님의 인정이 없어도, 제가 그녀와 결혼을 취소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화를 내다가 더는 먹힐 것 같지 않았는지, 카밀라는 애써 자신의 울화를 누르며 이번에는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 영애와 결혼하면 네 평판이 떨어질 게다. 추문이 달라붙을 것이라고.”
“좋은 사람입니다.”
카밀라는 혀를 찼다.
그렇게 사교계에 나가는 것을 꺼리더니, 이제는 그 판이 어떤 생리로 돌아가는지도 다 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사교계에서의 평판이 언제 인성을 따지더냐.”
“행여 그렇다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게 왜 상관이 없니!”
카밀라가 결국 또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테런은 더 듣기 힘들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님. 제가, 괜찮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딱딱한 테런의 말에 카밀라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만큼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때껏 결혼 문제로 그를 심하다 싶을 정도로 독촉했을 때에도, 단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유들유들하게 상황을 넘기는 것이 그의 특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랬던 제 손자가 이런 태도를 보이다니!
카밀라는 순간적으로나마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싶어, 제 시력을 의심하기도 했다.
“내가 결혼을 재촉해서 네가 아무나 데려온 것 안다. 그렇다면 이 할미가 고른 여성과 해도 되지 않겠니? 조금 더 가문에 도움이 되는 영애로 말이야.”
“할머님의 말씀을 이렇게 정정하게 되어 유감입니다만, 이 두 가지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전 아무 여성이나 데리고 온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가문에 도움이 되는 결혼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테런은 자꾸만 반복되는 이 설전에 지치고, 조금 짜증이 났다. 그는 슬슬 이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 제게 도움이 되는 여성분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게 로제타 클리프 양이고요.”
타협은 없다는 듯 확고한 테런의 태도에 카밀라는 기가 찼다.
도대체 그 사생아 남작 영애가 제 손자에게 무슨 도움을 준다는 것인지,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엄청난 지참금을 가져오는 것도 아닐 테고, 에스테스 공작가에 비견할 만한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니다.
카밀라가 보기에 로제타 클리프의 장점이라곤 눈에 띄는 미색 그것 하나뿐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물론 그마저도 얼핏 보고, 판단한 것일 뿐이었지만.
“테런!”
“조만간 정식으로 클리프 영애를 소개할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테런은 부드러운 경고의 말도 잊지 않았다.
“할머님께서 평생 지켜 오신 신조가 부디 그날에도 관철되었으면 합니다.”
자신이 정식으로 소개하기 전까지 따로 로제타를 만나지 말 것, 그리고 상견례 날에는 부디 로제타를 대우해 달라는 말이었다.
제 이야기가 씨알도 먹히지 않자, 카밀라는 골치 아프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그녀는 보란 듯이 손을 들어 올려 양쪽 관자놀이를 꾹 누른 채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그 영애도 아니?”
“목적어를 생략한 채 말씀하시면 맥락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카밀라는 얄밉다는 듯 제 손자를 한번 흘겨본 뒤 한숨을 크게 내쉬고 말을 이었다.
“네 전 약혼녀가 붉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순간, 테런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뻣뻣해진 동작으로 카밀라를 바라보다가 누군가 숨통을 죄기라도 한 것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그녀가 그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클리프 영애랬나? 자신이 그 아이의 대용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불필요한 말은 굳이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이 할머님의 가르침이셨습니다.”
“대용품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는구나.”
카밀라는 예리하게 짚어 냈다.
그제야 테런이 속으로 아차 했으나, 당황한 티를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런 것을 드러낼 만큼, 더 이상 순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이 아닌 말에 굳이 반박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죠.”
태연한 척 대답한 테런이 나지막하게 깐 목소리로 재차 입을 열었다.
“그리고 설령, 그녀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
“물론입니다.”
테런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뒷짐을 지었다.
악물고 있는 턱에서 그가 인내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로제타와 자신은 어디까지나 ‘계약’을 맺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행여 그녀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상처받을 일은 없다고, 테런은 생각했다.
하지만 카밀라의 날카로운 말들이 가슴에 남아 그의 심장을 발톱으로 따끔따끔하게 할퀴는 것만 같았다.
그런 그를 유심히 바라보던 카밀라가 이내 태세를 전환했다.
“내 손자가 지난 스물셋 먹도록 여자를 만나 보지 않아 아직 여심을 잘 모르는구나.”
카밀라의 태도가 눈에 띄게 한결 여유로워졌다.
마치 어디 한번 두고 보자는 사람 같았다.
어차피 약혼일 뿐. 바로 결혼하는 것도 아니니 조금 더 두고 볼 셈으로 카밀라는 한 발 뒤로 물러서기로 했다.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단다, 테런. 일단은 이 할미가 유의하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그럼 편안한 오후 되시길.”
테런이 카밀라를 향해 묵례했다.
서둘러 이 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 *
대개의 귀족 저택이 그러하듯, 에스테스 하우스 역시 말발굽 형태의 구조였다.
와튼을 따라 위로 올라가며, 로제타는 짤막하게 저택 구조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2층은 온전히 공작 부처께서 사용하시는 공간입니다. 지금은 주인님께 짝이 없어, 혼자 사용하고 계시지만요. 서쪽이 서재와 집무실, 그리고 동쪽이 침실입니다.”
“그렇군요.”
“3층의 서쪽엔 대부인의 침실이, 그리고 동쪽에 공녀님의 침실이 있습니다. 손님방도 마련되어 있지요.”
로제타는 방금 들은 말을 속으로 되새겼다.
‘서쪽은 대부인의 방.’
꼭 기억했다가 절대 길을 잘못 들지 말아야지.
다짐을 거듭하는 사이, 와튼의 걸음이 멈췄다.
“이곳이 영애께서 앞으로 묵으실 방들입니다.”
로제타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방들? 왜 복수형이지?’
그 이유는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집사가 문을 연 뒤, 뒷짐을 지며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섰다.
로제타가 먼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이다.
고맙다는 듯 그를 향해 미소 지어 보인 로제타가 왠지 설레는 마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세상에……!”
그리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방은, 음…….
그러니까 굳이 현대의 관점으로 따지고 보자면 40평대 아파트만 했다.
“침실과 응접실, 드레스 룸, 그리고 욕실이 하나 딸려 있습니다.”
게다가 채광이 어찌나 좋은지, 큰 창을 통해 방 안에 햇빛이 쏟아질 듯 들어오고 있었다.
“정말, 제가 이곳을 사용해도 되는 건가요?”
이 대저택에 온 뒤론 계속 감탄만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홍장미로 살았을 적, 내 집 마련은커녕 전셋집으로 옮기는 게 그토록 소원이었는데!
그런데 이렇게 드넓은 방을 저 혼자 써도 된다니.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놀란 눈으로 저를 뒤돌아보는 로제타에게, 와튼은 자상하게 웃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는 조금 신이 나 보이는 로제타에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응접실에 있는 저쪽 문을 열면, 클라리사 아가씨의 방과도 연결이 됩니다.”
커넥팅 룸 같은 개념이구나.
로제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천천히 둘러보십시오. 짐 정리를 도와드릴 메이드를 곧 올려 보내겠습니다.”
로제타는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와튼을 바로 붙잡아 세웠다.
“아! 괜찮아요!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을 정도로, 몇 벌 없어서요. 저 혼자 해도 충분할 것 같아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다른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그럼, 목욕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오래 이동하다 보니 좀 씻고 싶어서요…….”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와튼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막 몸을 돌려세웠다.
그런데 그때, 클라리사의 방과 연결되어 있는 쪽의 문이 벌컥 열렸다.
뒤이어 클라리사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그 순간 와튼의 한쪽 눈썹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클라리사의 등장에 반가워 아는 척을 하려 했던 로제타는 그런 집사의 반응을 기민하게 눈치채고, 서둘러 호칭을 정정했다.
“클라리사…… 공녀님.”
“앗. 와튼이 있었네요.”
“클리프 영애께서 묵으실 방을 잠시 안내해 드렸습니다.”
“그랬구나……. 나는 언니만 계신 줄 알고오…….”
“그럼 두 분 편히 말씀 나누십시오.”
말꼬리를 흐리는 클라리사의 모습에, 와튼은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었다.
로제타와 클라리사는 마치 눈치 게임이라도 하듯이 서로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탁, 하고 문이 완전히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서로의 모습이 너무 웃겨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자마자 까르르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클라리사, 잠깐 이리 와 볼래?”
먼저 웃음을 멈춘 로제타가 여기 와 보라는 듯 응접실에 놓여 있던 의자 하나를 뒤로 빼고는 그 위를 두드렸다.
“왜요, 언니?”
클라리사가 다가와 앉자, 그제야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로제타가 다문 입술에 힘을 주듯 길게 늘였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음, 사실 내가 부탁이 하나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