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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48화 (48/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48화

“제게요? 무슨 부탁이요?”

클라리사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로제타가 제게 부탁을 한다는 사실이 너무 기쁜 듯 보였다.

“이제 수도에 올라왔으니, 언니라는 호칭은 우리 둘만 있을 때 할까?”

“네?”

“여기에 우리와 친한 줄리아나 콜린이 없잖니. 혹시 대부인께서 보시면 클라리사가 혼나지 않을까 해서.”

“아…….”

“예법에 엄격하신 분이라고 했던 게 생각이 나서.”

“네……, 맞아요. 할머님은 조금 무서워요.”

클라리사의 표정이 빠르게 침울해졌다.

하지만 그러길 잠시, 그녀가 고개만 빼꼼 들어 올린 채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그래도 와튼이 할머님께 이르진 않을 거예요!”

“응. 그럴 분 같아 보이진 않으셨어. 그래도 당분간만 조심하면 어떨까?”

자리에서 일어난 로제타가 클라리사에게 다가가 그녀의 몸을 꽉 안아 주었다.

클라리사 역시 로제타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칭얼댔다.

“하지만 언니랑 오라버니랑 결혼하시는 거면, 제가 언니라고 불러도 되는 것 아닌가요?”

“음, 물론 당연히 그렇지. 하지만, 예법이라는 게 있으니까. 나도 무척이나 아쉽단다.”

“힝.”

클라리사가 더욱 로제타에게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웅얼거렸다.

“네, 언니.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 우리 예쁜 클라리사.”

로제타가 웃음 띤 목소리로 고마움을 표하며, 은빛 실 같은 클라리사의 머리카락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 * *

잠시 후, 클라리사는 에스테스 대부인이 부른다는 전갈을 받고 울상을 지으며 떠났다.

그녀는 문을 나서기 직전까지 로제타에게 당부했다.

“내일은 같이 의상실에 가는 거예요!”

“알았다니까.”

로제타가 웃으며 클라리사를 배웅했다.

홀로 남은 그녀는 하녀가 준비해 준 뜨거운 물에 지친 몸을 풀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배가 조금 허전했는데, 하녀가 눈치껏 준비해 놓고 나간 샌드위치와 쿠키가 눈에 보였다.

“센스 있다.”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환한 얼굴로 쿠키를 하나 오독, 씹었을 때였다.

“아, 맞다.”

최근엔 계속 마차에서 생활해야 했기에, 영 부를 기회가 없었던 오랜 친구가 생각이 났다.

“실프.”

가만히 이름을 부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핑, 소리와 함께 작은 정령이 나타났다.

-로제타아아아!

언제나 그렇듯 호들갑스러운 등장이었다.

실프는 조금 토라진 듯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왜 이렇게 안 불렀어?

“내가 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 단 게 먹고 싶었던 거지?”

-아앗, 들켰다.

실프가 눈을 찡긋하고 웃으며, 로제타의 주위를 나비처럼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오랜만에 인간계에 나온 것이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소환된 장소가 눈에 익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어라? 그런데 여긴 어디야?

실프는 더 높이 날아올랐다.

허공에 뜬 채 빙글빙글 돌던 정령은 창문가로 뽀르르 날아가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한 톤 더 높아진 목소리로 감탄을 터트렸다.

-꺄아아! 오랜만이다아아!

와 본 적 있다는 소린가?

‘하기는.’

실프도 엄연한 바람의 정령. 테런과 계약한 피르의 아래에 속해 있는 아이니만큼, 이곳을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내가 더 조심해야겠네.’

한밤중에는 불러도 되겠지.

로제타는 속으로 다짐을 마친 뒤 가볍게 실프를 불렀다.

“실프. 쿠키 안 먹을 거야?”

-앗! 먹어야지! 뭐 해 줄까?

그냥 먹으면 좋으련만.

매번 맛있는 걸 먹이기 위해서 부탁할 거리를 만드는 것도 너무 힘든 일이었다.

“앞으로 이 방에서 생활할 거야. 하녀들이 청소는 마쳤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손이 닿지 않는 곳에는 먼지 가 있을 테니, 바람으로 싹 걷어 내 주었으면 좋겠어.”

-맡겨 줘!

실프의 씩씩한 대답을 들으며 로제타가 가장 큰 창문을 열었다.

방 안 한가운데서, 실프가 비장한 표정으로 힘을 모았다.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눈을 감으며 집중하자, 실프를 중심으로 휘이이이, 공기가 작게 소용돌이치며 바람을 일으켰다.

공기의 흐름은 조금씩 강해지고 빨라졌다.

실프가 감은 눈을 번쩍 뜨며 기합을 넣었다.

-얍!

그 순간, 제자리에서 소용돌이치던 바람이 쑥,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어둑해진 창밖으로, 실프의 반짝이는 빛 가루가 포슬포슬 흘러내리고 있었다.

로제타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그 이상한 기합은?”

-큰 힘을 쓸 땐 필요해!

“아. 하는 거랑 안 하는 거랑 달라?”

-그러엄!

실프가 허리에 척, 팔을 올리며 콧김을 세게 뿜었다.

로제타가 웃으며 쿠키를 하나 들고 살짝 흔들었다.

“수고했어. 어서 쿠키 먹자.”

-좋아!

실프가 들뜬 목소리로 대답하며 과자가 놓인 테이블로 날아왔다.

-로제타! 얼른, 얼른! 얼른 쿠키 부숴 줘!

쿠키를 보고 흥분한 실프가 날갯짓을 빨리했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얇은 날개가 움찔 떨렸다.

그녀가 홱, 소리가 날 정도로 바람을 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어!

“응? 왜 그래?”

울상인 실프의 얼굴을 흘깃하던 로제타가 무심히 물었다.

-피르 님!

실프가 먹기 좋게 쿠키를 잘게 부수고 있던 로제타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뭐? 피르라고?”

그녀는 서둘러 창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일전에 보았던 대로 손바닥만 한 크기의 피르가 발코니 난간에 앉아 로제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실프는 눈앞에 쿠키를 놔두고 왔던 길을 되돌아 발코니로 뽀르르 날아갔다.

그녀는 피르의 주위를 팔랑팔랑 날아다니며 변명 같은 말들을 종알거렸다.

-아니에요, 피르 님! 내내 그 앞에 있다가 지금 나온 거예요! 제가 힘이 어딨다고 인간계에 놀러 나오겠어요!

“뺙!”

피르는 마치 잔소리를 하는 것처럼를 부리로 콕 쪼았다.

-힝. 진짜 아닌데. 로제타가 불렀단 말이에요오.

실프가 양손을 머리 위에 들어 올려 감싸고는 울상으로 쫑알쫑알 투덜거렸다.

-그렇지만 저 방금 나왔는데요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한 번 콕!

-알았어요! 돌아가면 되잖아요! 힝, 피르 님 미워요!

밉다는 듯 빽 소리를 지른 실프가 피르를 향해 혀를 날름 내밀고는 뽀르르 로제타 쪽으로 날아왔다.

“실프?”

-로제타, 나 갈게!

그런 뒤 쿠키를 한 아름 욕심껏 껴안고는 빛 가루만 남긴 채 정령계로 돌아갔다.

로제타는 다소 황당한 기분으로 피르와 실프의 실랑이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실프가 돌아갔으니, 피르도 돌아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었다.

피르는 여전히 발코니 난간에 앉아 로제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를 살펴보는 것처럼.

‘물론 피르는 진짜 새가 아니라 정령이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어색했다.

실프는 돌아가 버리고, 저만 홀로 남았는데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피르의 계약자는 테런이었다.

그러니 실프와 로제타가 서로 말이 통하는 것처럼, 그들 역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존재에게, 에스테스의 사람도 아닌 자신이 하급 바람의 정령을 불러낸 것을 들켰으니, 혹여 테런에게 말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혹시…… 공작님한테 이를 거니?”

조심스럽게 물어봤지만 피르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좋아. 이렇게 되면 회유를 하는 거지.’

로제타는 마른침을 삼키며 작전을 바꿨다.

그녀는 최대한 상냥한 웃음과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피르? 쿠키 좋아하니?”

솔직히 말해 놓고도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예상 밖의 수익이 있었다.

“뀨?”

피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관심을 보인 것이다.

‘바람의 정령들은 단것을 좋아하는구나.’

기쁜 기색을 속으로 삼키며 로제타는 피르에게 손짓했다.

“나눠 줄게. 이리 와 보렴.”

그때였다.

방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테런의 목소리가 뒤이어 따라왔다.

“영애. 접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의 방문에, 로제타는 당황했다.

동그래진 그녀의 눈이 닫힌 문과 피르를 번갈아 쳐다보며 바쁘게 움직였다.

‘엇, 이걸 어떡하지?’

다행히 실프는 돌아간 상황이었지만, 피르는 아직 회유하지 못했기에 마음이 불안했다.

‘피르가 이를 수도 있는데.’

재촉하듯 또 한 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영애, 주무십니까?”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물던 그녀는 피르를 향해 ‘쉿’ 입 모양을 해 보이고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로제타가 문을 아주 살짝만 열었다. 얼굴만 겨우 내밀 수 있을 만큼 아주 좁은 틈이었다.

테런이 그런 그녀를 조금 황당하다는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로제타가 마치 굼벵이처럼 꾸물거리며 좁은 틈을 비집고 나오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애? 왜 그러십니까?”

“잠시만요.”

어떻게든 테런이 방 안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왜 굳이 이렇게까지 힘든 길을 택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던 테런은 잠자코 지켜보다가 오른손을 들어 문을 잡았다.

그런 뒤 그대로 힘을 주어 제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편하게 나오라는 일종의 배려였다.

“꺄악!”

하지만 그 반동에 로제타의 몸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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