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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49화 (49/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49화

앞으로 쏟아지는 그녀의 몸을, 테런이 가볍게 두 팔로 받아 안았다.

“괜찮으십니까?”

“아, 네. 네. 감사해요……. 또 도움을 받았네요.”

로제타가 정신없이 감사 인사를 한 뒤,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어서 방문을 닫을 생각이었는데…….

푸드덕, 날갯짓 소리가 나더니 이내 어깨가 살짝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왼쪽에 어느샌가 날아온 피르가 그녀의 어깨를 횃대 삼아 앉아 있었다.

“피르?”

테런이 놀라서 푸른 새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로제타는 속으로 낭패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피르는 마치 딴청을 피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만 갸웃할 뿐, 제 계약자인 테런에게로 가지 않고 있었다.

“뀨.”

로제타는 일단 둘의 눈치를 살폈다. 보아하니 피르가 실프의 방문을 테런에게 얘기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영애. 이 녀석이 왜 영애의 방에 있습니까?”

“어, 그게 저…… 환기를 하려고 문을 열어 놨는데, 발코니 난간에 앉아 있더라구요.”

로제타는 더듬거리며 손가락으로 발코니 창을 가리켰다.

그때, 그녀의 어깨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피르가 답답하다는 듯 내쉬는 것 같았다.

‘새한테 혼나는 기분인데.’

로제타가 뜨끔한 속을 감추며 테런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 순간, 피르가 날개를 펼쳐 또 날아올랐다.

두 사람의 주위를 한 바퀴 휙, 빠르게 돌던 새는 로제타의 뒤로 날아갔다.

그런 뒤, 마치 거짓말하면 못쓴다는 듯 그녀의 목 뒤를 부리로 콕 찍었다.

“아얏!”

따끔함에 로제타가 파드득 몸을 떨며 오른손을 목 뒤에 가져다 대었다.

아주 살짝 쪼는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목 뒤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했다.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감싸고 지그시 누르고 있는 사이, 테런이 피르에게 화를 냈다.

“이 녀석이.”

그때 피르가 또 한 번 빙글 돌다가 이번에는 테런의 이마를 콕, 찍었다.

“뺙!”

마치 ‘바보야!’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이건 뭐 깡패도 아니고.”

갑작스러운 공격을 당한 테런은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뭐에 화가 난 것인지 모르겠군.”

그 뒤로도 피르는 마주 보고 서 있는 두 사람의 주위를 날며 ‘뺙! 뺙!’ 하고 울었다.

로제타는 이제 왠지 저 정령의 울음소리를 구분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평소엔 ‘쀼’, 지금처럼 화가 났을 땐 ‘뺙!’.

“화가 많이 났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공작님은 피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시죠? 지금 뭐라고 하는 건가요?”

“온갖 욕을 하는 중입니다.”

“대체 왜…….”

“저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테런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좁히고 눈을 가늘게 떠 피르를 노려보았다.

로제타는 그의 이마 한가운데 빨개진 자국을 보며 풉,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자신의 이마를 보고 웃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테런이 멋쩍은 듯 서둘러 손가락으로 잘 빗어 넘긴 앞머리를 흩트렸다.

반듯하던 이마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사라지자, 테런의 인상이 또 훅 바뀌었다.

조금 낯선 기분이 든 로제타가 살짝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근데 진짜 무네요.”

하아. 테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 제가 교육을 잘못한 탓입니다.”

“정령 교육을 누가 할 수 있겠어요? 너무 심려치 마세요.”

하지만 그녀가 계속해서 목덜미를 잡고 있자, 테런은 적잖이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많이 아프십니까? 괜찮으시면 제가 좀 상처를 봐 드리겠습니다.”

“아, 아뇨.”

로제타가 슬쩍 뒤로 몸을 물리며 목에서 손을 뗐다.

아직 쪼인 데가 홧홧했지만, 계속 붙잡고 있으면 테런이 고집을 부리며 기어코 보자고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목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민망했다.

자신이 직접 바로 살필 수 없는 신체 부위라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때, 피르가 또 한 번 크게 소리를 질렀다.

“뺙!”

이번에는 복수형으로 ‘이 바보들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피르는 테런과 로제타를 한심하다는 듯 잠깐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위로 솟구쳐 올라가더니, 이내 정령계로 사라졌다.

“나중에라도 꼭 사과시키겠습니다.”

사실은 정말 괜찮았다.

피르가 실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그냥 돌아가 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어서.

하지만 테런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했으면 하는 생각에 로제타는 입꼬리를 힘주어 끌어당겨 웃는 모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공작님. 이 시간에 제 방엔 어쩐 일이세요?”

“아.”

본래의 방문 목적을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테런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잠시 괜찮으시면 산책 어떠십니까?”

“산책이요?”

생각지도 못한 제의에 로제타의 눈이 잠시 커졌다.

하지만 거절할 이유가 마땅히 없었기에 로제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피르가 발코니에 찾아왔을 때만 하더라도 하늘엔 붉은빛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는데, 어느덧 완연한 밤이 되었다.

에스테스 하우스의 정원에는 석등이 켜져 있었다.

은은한 불빛이 바닥을 밝히고 있어 걷는 데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테런은 로제타의 보폭에 맞춰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산책하자고 한 것 아니었나?’

로제타는 고개를 갸웃했다.

테런을 따라서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그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난 할 말 없는데.’

지금이라도 들어가 보겠다고 얘기하고 돌아가야 하나, 머릿속으로 그런 걱정들을 부지런히 하면서도 로제타는 착실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이 산책이 썩 나쁘지 않은 것은 잘 가꿔진 정원수들을 스친 바람이 코끝으로 싱그러운 향을 옮겨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말없이 얼마를 걸었을까?

중간중간 만나던 사용인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적한 곳에 도착하자 테런이 가만히 멈춰 섰다.

덩달아 선 로제타가 그를 살짝 올려다보자, 테런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늘 할머님의 무례를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아. 로제타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감았다가 떴다.

아까 도착했을 때, 인사를 받아 주지 않은 카밀라의 태도에 대해서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그리고 로제타는 그의 그 짧은 한마디와 무거워 보이는 표정에서, 카밀라가 자신을 반대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반대하시나 봐요.”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로제타가 웃었다.

테런은 그런 그녀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상처, 받지 않으셨습니까?”

“인사를 받아 주지 않으셔서 민망하긴 했지만, 상처까지는…… 글쎄요. 예상한 일이라서요.”

로제타가 조용히 짓는 미소가, 테런에게는 쓸쓸함으로 비쳤다. 그래서 그는 더 미안해졌다.

“실례가 아니라면 오늘 두 분이 어떤 말씀을 나눴는지 알 수 있을까요?”

미리 알아 두면, 나중에 대부인을 대할 때 조금이나마 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테런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저 없이 따로 만나는 일은 없으실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아까 할머님께 당부드리고 왔습니다. 조만간 정식으로 인사드리는 자리를 만들 테니, 저 없이 영애를 따로 만나는 일은 삼가 달라고 말이죠.”

“그렇게까지 하진 않으셔도 괜찮은데.”

집안의 어른이 반대할 거란 걸 이미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그와의 계약 결혼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고상하신 분이지만 가끔 사람의 상처를 후벼 파기도 하시는 분이라. 뭐 대체로 그 대상은 저에 국한되긴 합니다만.”

“전 괜찮아요. 그런 말, 많이 듣고 자랐는걸요. 그래서 나름의 회피 방법도 있죠.”

“회피 방법? 어떤 겁니까?”

음, 이런 거 알려 줘도 되나?

잠깐 고민하던 로제타가 이내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 쥔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 뒤 검지를 하나씩 편 뒤, 자신의 귀를 막았다.

“이렇게 콕, 막는 상상을 해요. 그러고서…….”

“그런 뒤에는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어쩌라고? 아무것도 안 들리거든? 에렐렐레.’”

로제타의 현란한 발음에 테런의 입술을 가르고 풉, 웃음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뭐라고요? 다시 해 봐요.”

“싫어요. 그렇게 웃으시니까 창피해졌어요.”

로제타가 빨갛게 물들인 얼굴로 귀에서 손을 뗐다.

테런의 웃음이 허공에 퍼지며, 왠지 그녀를 간지럽히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웃음을 멈춘 테런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단호함이 조금 어려 있었다.

“그래도 영애.”

“네?”

“듣기 싫은 말을 듣는 상황에 익숙해지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외면할 뿐, 사실 상처는 쌓이는 것이니까요.”

“……새겨들을게요.”

순순한 그녀의 대답에 테런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왜일까. 그녀 앞에서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었다.

이유는 저도 알 수 없었다.

그 충동을 이기기 힘들어, 테런은 평소라면 숨기고 혼자 삭였을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오늘 할머님을 뵙고 와서, 저는 좀 무서워졌습니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 있긴 했으나 더없이 쓸쓸했다.

“제 뜻을 꺾기 위해, 상처가 되는 말까지 꺼내시더군요. 그런 그분의 모습에, 제가 이대로 할머님을 미워하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분인데, 제 가족인데, 그래서는 안 되는데 말이죠.”

생각지도 못한 테런의 말에 로제타가 입술을 살그머니 말아 물었다.

지금 테런이 하고자 하는 말이, 그리고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너무도 잘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도 그랬는걸.’

전생에서 홍장미로 살 때 자주 느꼈던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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