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50화
치매인 할머니는 하나뿐인 가족이자 동시에 버거운 짐과도 같았다.
보호자가 필요한 어린 나이에, 도리어 할머니의 보호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녀로서는 모든 상황이 힘들었다.
그래서 때로는 할머니가 몹시도 미웠다.
가끔은 그런 감정이 모두 제 탓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나뿐인 혈육인데. 나는 어떻게 할머니를 미워할까.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마치 누군가 주입하기라도 하듯, ‘할머니를 미워하면 안 된다’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그녀의 마음은 더 힘들어졌고, 스스로를 옳지 못하다고 몰아붙였었다.
‘지금은…… 그게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아.’
당연한 감정이었다.
사람이니까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지칠 수도 있는.
‘내 말이, 이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
로제타는 테런이 그 자신을 괴롭히지 않길 바랐다.
“우리는 신이 아닌걸요.”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늘 한결같은 마음만을 품고 가는 사람도 없구요.”
테런은 그저 잠자코 그녀가 건네는 말을 듣고 있었다.
“누군가를 대할 때 꼭 한 가지 마음으로만 대하지 않아도 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 사람은 인형이나 다름없다고 느끼고요.”
“인형이라…….”
로제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태도로 제 생각을 이어 나갔다.
“제 생각은 그래요. 상대가 내 사람이라 하더라도, 매번 그를 사랑할 순 없는 거라고요. 나와 생각이 맞지 않을 땐 당연히 짜증도 나고 그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로제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공작님은 지극히 정상이세요.”
그런 뒤 그녀는 피콕블루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당부하듯 말을 이었다.
“그러니 스스로를 못된 아이라고 몰아붙이진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테런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로제타는 순간 자신이 너무 주제 넘은 말을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바람이 가볍게 불어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걷어 내며, 로제타는 속으로 잘됐다, 싶었다.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진 것 같아, 대화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모처럼 바람이 좋은데 조금 더 걸을까요?”
“그러시죠.”
다행히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왔다.
로제타는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어 보기로 했다.
하급 정령이긴 하지만, 자신 역시 실프를 다루기에 바람의 정령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정령을 다룬 서책보단 가주인 테런이 더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슬그머니 운을 한번 떼어 봤다.
“공작님께선 바람의 정령을 모두 다루실 수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피르의 힘이 가장 강력하다 보니 그 녀석의 도움만 받고 있지만요.”
“그럼…… 하급 정령은 별로 필요하지 않으시겠네요?”
앞만 바라보며 걷던 테런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전부터 생각했었는데, 영애께선 실프에게 관심이 많으시군요.”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지적당한 그녀는 조금 뜨끔한 기분이었다.
저를 바라보는 테런의 시선에 왠지 뺨이 따가웠다.
당황한 티를 숨기기 위해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 그게……. 장난꾸러기라고 하니 궁금해서요.”
테런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었다.
“보여 드리고 싶지만 아마 불러도 안 나올 겁니다.”
“……왜요?”
로제타가 조용히 되물었다.
테런이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몇 번 불러 봤지만 나오지 않더라구요. 저도 어렸을 때 잠깐 본 게 다라 친하지 않고요.”
괜히 지레 뜨끔한 로제타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실프가 테런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 것이, 자신과 계약을 맺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싶었다.
테런은 말을 이었다.
“저도 한번은 그 녀석이 궁금해져서 피르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문을 지키고 있다는 대답을 들려주더군요.”
“문이요?”
테런이 쓴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주 오래전 맡겨 놓은 게 있거든요.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부탁을 했더니 그 아이를 보초로 세워 둔 모양입니다. 원래 귀찮은 일은 보통 가장 막내의 몫으로 돌려놓으니까 말이죠.”
“아.”
로제타의 입술이 살그머니 벌어졌다.
단순히 힘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라 또 다른 임무가 있어서 그렇게 빨리 돌아갔던 거였구나.
로제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기까지 했다.
확실히 책 한 권을 읽는 것보다 테런과 짧게 몇 마디 나누는 것에서 더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기분이었다.
“바람의 정령이 그런 부탁을 들어주기도 하는군요. 몰랐어요.”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능력입니다.”
테런이 검지를 세워 제 입술 위를 지그시 누르며 한쪽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바람은 결국 공기고,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의 정령에게 중요한 것을 맡기면 적들이 볼 수 없게끔 모습을 감춰 숨겨 준다는 것이었다.
“그럼 정령에게 맡겨 놓으셨다는 것은 언제 되찾으실 생각이신가요?”
“……글쎄요.”
그녀는 정말 가볍게 물었을 뿐인데, 테런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달라졌다.
끝을 흐린 말과 왠지 쓸쓸함에 물든 것만 같은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바람결에 흩어져 버릴 것처럼 작았다.
왠지 물어선 안 될 것을 물은 것 같아, 로제타는 입술을 다물었다.
‘어떡하지?’
화제를 돌릴 만한 적당한 대화의 주제를 찾지 못한 로제타가 속으로 끙끙댔다.
그사이, 테런이 말을 이었다.
“아마, 평생 찾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가 살짝 고개를 떨구자 앞머리가 살랑, 바람에 흔들리며 그의 눈빛을 가려 버렸다.
“맡겼다기보단, 지켜 달라고 부탁한 것에 가까워서요.”
다시 보고 싶다고 꺼내어 달라고 그러면 ‘그것’이 세월의 흐름을 직격으로 맞아 바스러질지도 모른다.
차라리 못 보는 게 낫지, 이 세상에서 아예 사라져 버리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테런은 언제나 매일매일 그리움을 견뎌 냈다.
그 아이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단 사실이 사라지는 것보다, 그저 자신이 외롭고 괴로운 게 나은 것 같아서.
로제타가 무거워진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봐요.”
“아닙니다.”
테런이 애써 입꼬리를 당기며 미소 지었다.
“그런데 영애. 사실 제 용건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네?”
“시간이 늦었음에도 영애를 뵙고자 한 데는 총 세 가지 이유가 있거든요.”
테런이 숨을 들이켠 뒤, 목소리를 바꾸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용건입니다.”
테런이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작은 명패 같은 것이었다.
어서 받아 가라는 듯, 그가 그것을 앞으로 조금 더 내밀자, 로제타가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눈앞까지 끌고 와서야 그가 제게 준 것이 에스테스 공작가의 가문 패라는 것을 깨달았다.
로제타가 놀란 토끼 눈으로 테런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걸 왜 제게 주세요?”
“내일 클라리사와 함께 외출하신다고 들었는데, 아닙니까?”
“아, 그건 맞는데…… 그거랑 별개로 이걸 왜 제게 주시는가 해서요.”
“지금은 제 약혼녀 자격으로, 그리고 앞으론 제 부인이 되실 테니, 당연히 드리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로제타는 제 것이 아니라는 듯 가문 패의 끄트머리만 만지작거렸다.
테런은 괜찮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에스테스는 손님께도 대접하는 의미로 종종 가문 패를 내어 드립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편히 사용하십시오. 로제타…… 양.”
“네……. 네?”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듣던 로제타의 머리가 다시 위로 들렸다.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던 그녀는 자신이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영 확신을 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방금 뭐라고…….”
그녀의 반응에 테런 역시 조금 민망한 모양인지 고개를 살짝 떨구고 뒷덜미를 긁적였다.
“사실 이게 세 번째 용건입니다. 이제 슬슬 호칭을 정리하는 편이 나은 것 같아서요.”
“아…….”
어. 음. 아. 다양한 추임새를 꺼내어 놓던 로제타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에 도저히 어찌할 줄을 모르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발끝으로 바닥을 괜히 쿡쿡 치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네, 그렇죠. 옳으신 말씀이세요.”
“불편하시면 다시 원래대로 부르겠습니다.”
“아, 아뇨. 그럴 리가요.”
로제타는 고개를 젓는 것과 동시에 손사래까지 쳤다.
“편하게 불러 주세요.”
“이름을 허락해 주어 고맙습니다. ……로제타 양.”
아직 입에는 잘 붙지 않는 모양인지, 작고 어색하게 슬쩍 한 번 더 부른 그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로제타도 잊지 않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챙겨 주신 가문 패는 잘 사용하도록 할게요. 생각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사실 그녀도 걱정은 좀 된 상태였다.
카지노 칩을 환전한 돈과 에스테스 파크에서 클라리사의 간병인으로 일하며 받은 월급 등이 있긴 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다.
영지에서야 간편하게 생활했다곤 하나, 더 이상은 그럴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수도에서 생활하는 만큼 드레스와 기타 등등 새로 사야 할 물건들이 많았다.
테런 아셔 에스테스 공작의 약혼녀가 되는 만큼 앞으로 제게도 시선이 모일 테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평가받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가 돈과 관련된 고충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다.
그런 상황이니만큼, 수도에 온 첫날, 테런이 이렇게 먼저 나서 가문 패를 챙겨 주었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로제타를 배려해 주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한 것이었다.
“아쉽습니다. 저도 내일 함께 가면 좋을 것을요. 그럼 자연스레 약혼에 대한 소문도 날 테고, 겸사겸사 저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을 테고요.”
눈을 찡긋하며 진담 섞인 농담을 던지는 그의 말에 로제타가 웃음을 흘리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러게요. 같이 가시면 좋을걸.”
또다시 불어온 바람에 로제타가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걸어 귀 뒤로 넘겼다.
보름달의 환한 달빛이 하얀 그녀의 얼굴에 쏟아진다.
그 옆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던 테런은 달빛에 비친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봄의 신록처럼 생기가 넘치게 반짝이는 것을 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상하게도 심장께가 조금씩 간지러워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더 이상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