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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51화 (51/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51화

* * *

명색이 불의 능력을 다스릴 줄 아는데도 불구하고, 리스턴 후작가는 언제나 어두컴컴했다.

가주인 마커스 댄 리스턴이 밝은 것을 원체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마커스는 리스턴 후작저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 잡은 음침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예의상의 노크도 필요 없다는 듯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방의 주인을 불렀다.

“올리비아.”

침대에 앉아 있던 올리비아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용건이 있으면 언제나 사람을 시켜 그녀를 불러냈기에, 이렇게 마커스가 제 방을 기별도 없이 방문할 것이라 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너무도 놀라 혀까지 씹었다.

“아, 아버지.”

그런 뒤 한 박자 늦게, 방금까지 만들고 있던 인형을 후다닥 손에서 내려놓았다.

올리비아가 인형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마커스가 눈매를 사정없이 일그러트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못마땅한 기운이 잔뜩 묻어났다.

“또 그런 쓰레기 같은 것을 하고 있었느냐?”

“시, 심심해서…… 잠깐 소일거리로요. 어차피…… 조만간 후원하는 고아원에 들를 예정이라…… 그때 주면 좋아할 것 같아서…….”

“그런 것쯤 대충 돈으로 사면 되지 않더냐!”

“죄, 죄송해요.”

올리비아는 마치 학습이라도 된 사람처럼 사과의 말을 뱉으며, 만들다 만 인형을 서둘러 반짇고리에 집어넣고 제 뒤쪽으로 슬쩍 치웠다.

행여 아버지인 마커스에게 또 뺏기면 지난번처럼 불살라 버릴 것 같아서였다.

“쓸모없기는.”

다행히도 마커스는 혀를 차며 올리비아를 비난하는 것에서만 그치고, 그녀가 만들던 인형은 뺏어 가지 않았다.

올리비아가 민망함을 참듯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다가 슬그머니 놓았다.

“어쩐…… 일이세요. 부르셨으면 제가 갔을 텐데…….”

그제야 제 딸을 방문한 이유를 다시 떠올린 마커스가 말을 이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이, 일이요?”

기쁘기보단 걱정부터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마커스의 말마따나 자신이 모자라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그가 시킨 일을 단 한 번도 제대로 해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올리비아는 마음이 무거웠다.

또 아버지를 실망하게 하고, 그 탓에 꾸지람을 들을 것만 같았다.

마커스는 언제나 올리비아를 쓸모없는 것이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부터 차분하고 조용했던 그녀의 성격은 소심한 데다 숫기가 없는 것으로 치환되어 평가받았고, 사교성이 없다고 구박을 받았다.

물론 패트릭의 모친이자, 그녀에겐 계모인 마커스의 후처가 이간질한 이유도 있었지만.

아무튼, 갈수록 움츠러들며 자란 올리비아는 성인이 되어서도 ‘벽의 꽃’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자신의 대에서 반드시 작위를 영전할 계획이었던 마커스에게 그런 올리비아는 성에 차지 않는 딸이었다.

하지만 없는 셈 치며 버리기는 또 아까운 패라 그는 그녀를 망나니 왕세자 바론의 침실로 보냈다.

억지로 밀어 넣기는 성공했으나, 그녀는 도통 침실 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고, 그 탓에 바론은 화가 나 돌아가 버렸다.

그날, 올리비아는 마커스에게 호된 매질을 당했다.

「열 살도 안 된 약혼녀보단 여러 모로 네가 더 나을 텐데! 어째서 그 아랫도리 가벼운 왕세자를 꼬드기지도 못하는 것이냐!」

「하지만 전…….」

「바론의 마음에만 들면 네가 왕세자비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가문의 부흥에 일절 도움이 되지 않는 쓸모없는 패.

그것이 바로 올리비아 리즈벳 리스턴이었다.

왕실을 비롯한 3가문은 남녀 상관없이 능력만 가질 수 있다면 가주가 될 수 있었다.

리스턴 후작가에서 사용하는 불의 힘은 펜던트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히나 더 성별에 구애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마커스는 일찌감치 올리비아를 배제했다.

가문의 세를 키울 능력이 없어 보이니, 정략결혼으로 팔아 버리는 게 훨씬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덕에 올리비아의 이복동생인 패트릭이 후계자로 급부상했다.

그는 제 지위를 조금 더 확고히 다지기 위해 마커스의 개처럼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무거운 마음으로 물었다.

“어떤…… 일인가요?”

침울한 목소리로 묻자, 마커스가 조금 흥분한 듯 가슴을 부풀리다가 빠르게 말했다.

“에스테스 공작이 영지에서 약혼녀를 데리고 왔다는구나.”

올리비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마커스의 말을 쉽게 이해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공작님의 약혼녀는 아주 오래전에 죽지 않았나요?”

제 말을 끊은 것이 화가 났던지 마커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멍청한 것! 죽은 랭우드의 아이가 아니라,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왔다는 뜻 아니더냐!”

“아, 네……. 죄송해요.”

마커스가 씨근덕거리다가 툭 던지듯 본론을 꺼냈다.

“네가 가서 만나 보고 오너라.”

“제, 제가요?”

올리비아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선고라도 내리듯 마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여자인지 알아보고 오너라. 작은 것 하나 세세하게 눈에 담은 뒤 돌아와 내게 하나도 빠짐없이 고하면 된다.”

“저, 저는…….”

왠지 내키지 않아 올리비아가 꿈지럭 대답을 미루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떠밀듯, 마커스가 으르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것 정도는 너도 할 수 있겠지?”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그녀는 거역할 수 없었다.

올리비아는 결국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이튿날 아침.

로제타의 방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었다.

“들어오세요.”

처음엔 메이드인가 싶었지만 들어온 이의 차림에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문객은 사용인 복장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수석 시녀들이 입을 법한, 검소하지만 단정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로제타보다 키는 좀 작지만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반짝이는 눈동자에서 똑 부러진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먼저 제 신분을 밝혔다.

“안녕하세요, 클리프 영애. 전 레나 라스크라고 합니다.”

“라스크라면……. 아, 혹시?”

로제타가 귀에 익은 이름에 살짝 아는 체를 하자, 레나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제 남편 이름이 긱스랍니다. 도착하신 날은 제가 휴무라 인사를 드리지 못해,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어요.”

“그러셨군요.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에스테스 하우스의 하녀장이신 엠마 부인을 도와 이 저택의 관리를 맡고 있어요. 편하게 레나라고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레나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사용인들의 중간 관리자이자, 긱스 라스크의 작위를 따라 준남작 부인이었다.

“엠마 부인은 보통 노마님과 시간을 보내세요. 그러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제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꼭 기억해 둘게요.”

레나는 첫눈에 로제타가 마음에 든 듯 보였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남편에게 미리 들었어요. 곧 우리 공작님과 성혼을 하신다고.”

“아,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레나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로제타는 일순 긴장했다.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인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나의 태도는 그녀의 예상에서 현저히 빗나가는 것이었다.

“처음에 남편이 농담하는 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애를 직접 만나니 왜 공작님께서 급히 결혼을 결심하셨는지 충분히 알 것 같네요.”

레나가 스스럼없이 다가와 로제타의 손을 감싸듯 꼭 쥐며 당부했다.

“그 외롭고 철없는 분, 잘 부탁드려요.”

그저 신분의 차이가 있을 뿐, 마치 테런을 막냇동생처럼 여기는 말투에 로제타는 풋, 살구 같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물론 저도 잘 부탁드리고요. 오늘부터 제가 영애의 보좌를 맡게 되었거든요. 일종의 수석 시녀, 그렇게 보시면 될 것 같아요. 혼인하시게 되면 마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아, 새삼스럽지만, 잘 부탁드려요.”

“저도요. 그나저나, 영애. 오늘은 공녀님과 시내에 나가실 거라고 들었어요.”

“맞습니다.”

“괜찮으시면 제가 수행할까 하는데 어떠세요? 의상실에 들르신 후, 맛있는 베이커리가 있는 카페도 모시고 갈 생각이랍니다.”

“저야 너무 좋죠.”

“그럼 바로 준비하실까요?”

로제타는 레나의 쾌활한 성격이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 * *

시내까지의 이동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마차 안의 세 여자가 너무도 죽이 잘 맞아 오는 내내 쉴 새 없이 웃음을 터트리고 수다를 떨었기 때문이었다.

“듀파 지구라고 했죠? 그곳이 수도에서 가장 활성화되어 있나 봐요.”

“네, 3가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귀족가가 모여 있는 곳인 데다가, 평민 지구와도 인접해 있어서 시내가 활성화되어 있거든요.”

아직 마차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 의자에 앉은 채 발랄하게 다리를 흔들고 있던 클라라사가 쑥 끼어들어 한마디 보탰다.

“근데 듀파라는 이름보단 그냥 2지구라고들 많이 불러요!”

“그렇구나.”

곧 마차가 멈춰 섰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로제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자, 그럼 내릴까요?”

“……잠시만요.”

로제타는 혹시 몰라 가져온 후드를 가만히 챙겨 제 허벅지 위에 올려 두었다.

그녀는 옷감을 만지작거리며 가늘게 뜬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후드를 쓰는 편이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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