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52화
조용한 그녀의 물음에 클라리사와 레나가 동시에 반문했다.
“왜요?”
“굳이요?”
두 사람 다 로제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어, 그게…….”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어깨 위로 늘어트린 자신의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그제야 이유를 알아챈 레나가 눈치껏 말을 보탰다.
“머리카락을 드러내시는 편이, 영애와 어울리는 색의 드레스를 찾는 데 더 도움이 될 거예요.”
로제타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레나는 상체를 숙였다.
그런 뒤 로제타가 무릎 위에 올려 놓은 후드를 덥석 쥐어 도로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그러니 이건 마차에 두고 가죠.”
“그럴까요?”
“그럼요. 게다가 오늘 날씨도 무척이나 좋은걸요? 햇볕 마음껏 쬐고 광합성 해야죠.”
“맞아요, 언니! 그리고 전 언니의 머리카락이 정말 많이 좋단 말이에요! 감추지 마세요.”
클라리사와 레나의 응원에 움츠렸던 마음이 용기를 얻었다.
“그럼 저희가 먼저 나갈게요.”
로제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맨 마지막에 마차에서 내렸다.
곧 로제타의 귀에 파도의 너울처럼 번져 나가는 감탄사와 수군거림이 섞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저런 미모는 정말 처음 봅니다.”
“어머. 저 머리카락 색은?”
사람들은 가던 길도 멈추고 서서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시선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조금 움츠러들었다.
평민들이 사는 지구에서도 가장 외곽의 빈민촌에 모여 사는 파스트라인들의 거주지에 굳이, 직접 찾아간다면 모를까.
수도에서 붉은 머리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그랬기에 귀족들은 지난 15년간 단 한 번도 수도에서 붉은 머리를 보지 못했다.
하여 로제타를 본 그들은 상상 그 이상으로 충격을 받았다.
처음엔 아름다운 외모를 홀린 듯이 보고 있던 사람도 뒤늦게 정신 차리고 그녀의 머리카락 색깔에 눈살을 찌푸렸다.
“저 붉은 머리, 파스트라인 아니에요?”
“세상에, 어떻게 야만인이 귀족 지구까지 올 수 있는 거죠?”
“옆에 혹시 클라리사 공녀님 아닌가요? 요양 가셨다더니 언제 돌아오셨담? 아! 혹시 공녀님이 새로 들인 메이드 아닐까요?”
에스테스 영지에서 신전에 다닐 때보다 훨씬 혹독한 시선들이었다.
평민 지구와 맞닿아 있다곤 하나, 이곳은 엄연히 귀족 지구였다.
보수적인 집단은 이질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배척감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로제타는 마른침을 삼켰다.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 될 것만 같았다.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거지?’
참고 싶지 않았지만 참아야 하는 게 맞는 것만 같아 절로 움츠러들었다.
클리프 남작가에서 살 때는 애착을 가질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오히려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그녀는 에스테스 공작가에 신세를 지고 있었고, 자신이 경거망동하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클라리사나 테런의 허물로 이어질 것이 뻔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책을 안겨 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제타는 수모를 견디듯 숨을 들이켠 뒤,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레나가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소곤거렸다.
“영애. 지금 충분히 잘하고 계세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당당하게 구셔야 해요.”
로제타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부들부들 떨리는 제 손을 조용히 감싸 쥐는 작고 보드라운 촉감이 느껴졌다.
클라리사였다.
그 아이가 제 안의 용기를 나눠 주겠다는 듯 로제타의 손을 가만히 잡아 주고 있었다.
“클라리사.”
“언니…….”
고맙다는 듯 애써 입꼬리를 당겨 웃어 보려 했지만, 얼굴 근육이 긴장되어 영 쉽지 않았다.
“계속, 서 있는 것도 이상하니 우선은 의상실에 들어가도록 하죠.”
“네, 영애. 그렇게 해요.”
떨림이 쉬이 가라앉지 않아 로제타가 거의 숨을 쉬지 않은 채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다행히 늦진 않은 것 같군요.”
등 뒤에서 낯익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싱그러운 향이 코끝으로 훅, 끼쳐 왔다.
그리고 저를 보며 다정하게 웃고 있는 피콕블루색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를 알아본 로제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어떻게…….”
“오라버니!”
돌아선 그녀의 앞에, 테런이 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그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평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가까이에 서 있는 로제타는 알 수 있었다.
어지간히 급하게 온 듯 그의 가슴이 조금 가파르게 부풀었다 꺼지고 있다는 것을.
로제타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공작님? 어떻게 여기에……? 분명 오늘, 같이 못 오신다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등장에 그녀가 더듬으며 간신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 로제타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테런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일정을 조금 조율해 봤습니다.”
사실 로제타가 수군거림을 들을 것 같아서 무리해서 시간을 뺀 것이었다.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니, 역시나 그녀를 두고 다른 이들이 쑥덕이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앞으로 그녀의 입지를 위해서라도 첫 외출 시엔 자신이 동행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자꾸만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사실 본래 제 성격대로라면 그까짓것,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관심조차 두지 않았겠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계속 쓰였다.
로제타가 날카로운 말에 상처 입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런은 그런 제 마음을 굳이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로제타의 옆에 서 있던 클라리사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손뼉을 쳤다.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잘하셨어요, 오라버니!”
제 여동생을 따뜻한 눈빛으로 한번 내려다본 테런이 마저 숨을 고르고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선물입니다.”
그가 불쑥 무엇인가를 앞으로 내밀었다.
로제타는 테런의 등장에 이미 깜짝 놀라 그가 뭘 들고 있는지까지는 살펴볼 생각을 못 하고 있던 터였다.
그저 왜 뒷짐을 지고 있을까, 그것만 잠깐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마도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일부러 감추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머나.”
로제타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가 내민 것은 로제타의 머리카락 색깔과 똑같은 붉은 장미 다섯 송이였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산 모양인지 꽃은 신문지에 둘둘 말려 있었다.
“너무 멋이 없나요?”
포장지가 너무 볼품없나 싶었던 테런이 겸연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로제타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무척 예뻐요.”
“표정이 그리 밝진 않으시기에.”
“아, 이건. 그저…… 선물을 받을 것이라곤 정말 조금도 생각질 못해서요.”
그가 어서 받으라는 듯 장미 꽃다발을 로제타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손이 닿을 그때, 살짝 고개를 숙인 그가 로제타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계약 조건으로 내미셨던, 일주일에 한 번 만남. 이번 주는 오늘로 하죠.”
“아.”
로제타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입에서 ‘계약’이라는 단어가 들리는 순간, 저도 모르게 살짝 들떴던 마음이 조금 식었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견디듯 살짝 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그런 뒤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어요.”
멀지 않은 곳에서 귀족들이 그들을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것 보세요. 에스테스 공작님이 꽃 선물을 하셨는데…… 그럼 메이드가 아닌 모양인데요?”
“공작님께서 직접 꽃을 주실 정도면 귀족 영애라는 소리지 않아요?”
“아! 그럼 사생아겠네요. 윌셔스의 귀족 중에서, 저렇게 강렬한 빨간 머리는 이제 ‘섞인 게’ 아니면 절대 태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쉿! 다들 이제부터 입조심해요. 공작님께서 저렇게 선물까지 챙겨 안겨 주실 정도면 적잖은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지 않겠어요?”
“아, 그렇겠네요.”
사람들이 누군가가 한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시간을 내어 달라고 하길 잘했어.’
물론 에스테스 남매가 함께 시간을 보냈으면 한 것도 진심이었지만, 자신에게도 꽤 좋은 선택지가 된 것 같았다.
지금도 보라.
단순히 테런과 함께 있을 뿐인데,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지 않았는가.
‘공작님이 날 존중해 주신다고 해서 다행이야.’
술렁거리던 가슴이 많이 괜찮아졌다.
한결 여유를 되찾은 로제타는 테런이 준 장미 꽃다발을 양손으로 들어 올려 코끝까지 가져다 댔다.
“향기가 좋네요.”
싱긋 웃으며 말하자 주위에서 낮은 감탄사가 탄식처럼 잔잔하게 퍼졌다.
주로 남성들의 음성이었다.
그 목소리가 귀에 꽂히던 그 순간, 테런이 짜증이 조금 섞인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로제타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테런은 마치 남자들의 시선에서 그녀를 감추고 싶다는 듯 가리고 섰다.
클라리사와 레나가 눈치껏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자, 그가 로제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도 마침 타이를 하나 맞출 참이었습니다. 같이 들어가시죠.”
“즐거운 시간이 되겠네요.”
그녀가 차분히 제 손을 얹자, 테런이 가볍게 감싸 쥐었다.
그가 로제타를 정중하게 에스코트할수록, 그녀를 향한 귀족들의 수군거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에스테스 공작 일행이 모두 의상실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숨죽인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제정신을 차리며 서로 질문을 던져 댔다.
“그런데 여자, 정말 누구죠?”
아직은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