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53화
4. 모두, 그녀를 가늠하다
의상실의 이름은 부티크 유리로, 월셔스 왕국 최고의 심미안을 가지고 있는 디자이너 유리 블레어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유리 블레어는 탐미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으로 아름다움과 옷, 그 두 가지 말고는 별다르게 관심을 두는 것이 없었으므로 로제타를 편견 없이 대했다.
유리는 로제타의 외모를 보며 연신 감탄을 터트렸고, 열성적으로 그녀에게 어울리는 드레스들을 골라내었다.
「이것 한번 입어 보세요. 생각보다 노란 계열도 잘 어울리실 거예요.」
「이건 드레스 치맛단에 비즈를 달아 놓았어요. 하늘거리는 보라색 원단이라 한층 더 고혹적으로 보이실 거랍니다.」
「외출복으로 이런 건 어떠세요? 치마가 종 모양의 버슬 스타일이랍니다. 재킷엔 벌룬 슬리브를 달아, 입으셨을 때 아주 맵시가 좋을 거예요.」
그냥 눈으로 보는 것은 안 됐다.
보는 것과 입는 것의 차이가 어마어마하다는 유리의 설명에, 할 수 없이 로제타는 패션쇼에 서기라도 하는 것처럼 권유받은 모든 드레스를 입었다가 벗는 것을 반복했다.
사실 그녀는 꼭 필요한 두세 벌만 사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그 계획이 다 어그러진 것은 모두 테런의 탓이었다.
소파에 앉아 로제타가 갈아입고 나온 드레스를 보던 테런이 커튼이 열릴 때마다 매번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었다.
「그것 좋군요.」
「이것도 좋네요.」
「방금 그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는 로제타보다 더 집중하며 그녀의 드레스를 골랐고, 이내 모두 사겠다고 대답했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대금까지 다 지불했다.
그냥 가만히 놔뒀다간 이 의상실에 있는 구두와 모자까지 다 사재낄 것 같았는데, 아주 다행스럽게도 클라리사가 그를 데리고 갔다.
「언니 옷 다 고르셨으면, 이번엔 제 옷도 골라 주세요, 오라버니.」
클라리사가 옷 사는 스타일은 로제타도 익히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옷을 입었다가 벗었다가 하며 동행한 사람의 의견을 계속 묻기 때문에 조금 힘들었다.
테런 역시 몇 번 따라갔다가 학을 뗀 적이 있었는지, 도와 달라는 듯 레나와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로제타는 그가 옆에 있으면 자신이 더 시달릴 것 같았기에 슬그머니 눈길을 피하며 잘 다녀오라는 짧은 인사말만 전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들이 나가고 나서야 로제타는 피곤한 얼굴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레나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피곤해 보이시네요.”
“조금요.”
로제타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이 부티크에 들어온 지 두 시간 만에 처음으로 앉는 것이기에 정말 몸이 지쳤다.
그렇게 기댄 채 잠시 숨을 고른 로제타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는 조금 식은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많이 사도 될는지 모르겠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더 사도 모자랄걸요? 이제부터 영애는 온갖 사교 모임에 초대되실 거랍니다.”
“그건 아닐 거예요. 사실 제가 아직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았거든요.”
그 순간 레나의 눈에 놀람의 빛이 번졌다.
“정말요?”
로제타가 민망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클리프 남작가는 빈말로라도 부유하다고 할 수 없었거든요.”
사교계 활동을 하려면 반드시 데뷔탕트를 치러야 한다.
데뷔탕트를 치르지 못한 귀족은 사교 모임을 열 수 없었고, 초대 역시 누군가의 동행인으로서만 참석할 수 밖에 없었다.
“어머 어머. 잘 말씀해 주셨어요, 영애. 공작님께 얼른 말씀드리고 데뷔탕트부터 하시는 것이 좋겠네요.”
“아…… 괜히 저 때문에…….”
“에이.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데뷔탕트가 별건가요? 국왕 폐하와 왕비님 앞에 나서 이름을 소개하고 인사를 하는 게 전부인 것을요. 그 외엔 그냥 무도회와 같답니다.”
레나는 연신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안 그래도 영애와의 약혼을 어떤 방식으로 공표하는 게 좋을까, 고심하시는 것 같았는데 겸사겸사 좋은 상황인 것 같아요.”
그런가.
듣고 보니 또 맞는 말 같기도 하단 생각을 하며, 로제타는 또 한 모금 차를 머금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눈매가 살짝 찡그려졌다.
“……아.”
“왜 그러세요?”
레나의 물음에 답도 하지 못한 채, 로제타가 얕은 신음을 잠시 흘렸다.
목 뒤가 순간적으로 홧홧해지더니 이내 따가움을 느꼈다.
그곳은 어젯밤 피르에게 쪼인 곳이었다.
사실 피르에게 찍힌 이후 통증은 간간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느 땐 쪼였다는 사실을 잊고 있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가, 또 어떤 땐 지금처럼 아팠다.
화끈거림과 통증이 수반될 땐, 입술을 깨물 정도였다.
로제타가 한참 만에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었다.
“레나.”
“네, 영애. 뭐 필요한 것 있으세요?”
“아뇨. 그게 아니라…… 저택으로 돌아가면 상처 좀 봐 주시겠어요?”
“어디 다치셨나요?”
놀라서 묻는 레나의 말에 그녀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다쳤다기보다는, 어제 피르에게 살짝 물렸는데 그쪽이 계속 화끈거려서요.”
“어머. 피르 님에게 쪼이셨다고요?”
레나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많이 아프신가요? 의상실 직원에게 부탁하면 비상약을 가져와 줄 거예요.”
하지만 로제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여기서 그러기는 좀 볼썽사나우니 돌아가서 부탁해요. 참을 만하거든요.”
“알겠습니다.”
로제타가 목 뒤에 가만히 대고 있던 손을 떼며 말하자,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통증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나, 로제타는 애써 괜찮은 척을 했다.
* * *
의상실에서 드레스를 구매한 뒤, 브런치까지 즐기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각하아아아. 즐거우셨습니까……?”
현관 앞에서 긱스가 팔짱을 낀 채 잔뜩 심통 난 표정으로 맞았다.
“이제 일을 하셔야지요.”
“내가 자네라면 이렇게 날 기다리고 서 있지 않고, 하나라도 일을 더 해결했을 걸세.”
“하지만 전 각하가 아니니까요.”
“빡빡하게 굴기는.”
“제가 잡으러 내려오지 않았으면, 곧바로 안 올라오셨을 겁니다.”
“자넨 날 너무 잘 알아.”
“저도 잘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테런은 내내 벼르고 있던 긱스에게 잡혀 곧바로 집무실로 끌려갔다.
“어휴. 오라버니도 참.”
클라리사는 못 말린다는 듯 이마에 손을 짚고는 눈을 감은 채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애어른같이 구는 아이의 모습에 로제타와 레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우린 티 타임을 가져 볼까?”
“좋아요! 아까 사 온 몽블랑이랑 같이 먹어요.”
“아주 좋은 생각이야. 그럼 잠시 옷 갈아입고 다시 만나자.”
“네!”
먼저 쪼르르 계단을 달려 올라가는 클라리사를 가만히 보던 로제타는 옆에 서 있는 레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까 말씀드린 일 좀 부탁드려요.”
“먼저 방으로 올라가 계시면, 제가 약통을 챙겨서 뒤따라갈게요.”
로제타가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걸음을 옮겼다.
그새 통증은 또 살짝 가신 상태여서 참을 만했다.
‘도대체 어떤 주기로 아픈 거지?’
아니, 그보다 왜 자신이 이렇게 아파야 하나 싶었다.
바람의 정령이 독도 쓰나?
아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왜 내게 독을 주입하는 거지?
아프려면 확 아프던가. 이렇게 애매하게 아픈 건 또 뭐지?
머릿속에 온갖 물음표들이 둥둥 떠 다니는 것만 같았다.
사실 그녀가 느끼는 통증만 보자면 별것 아니었다.
소리를 지를 정도로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는 것도 아니었고, 실제로 피가 난다거나 진물이 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편의상 통증이라고 칭했지만, 그것보단 다른 감각이 로제타를 더 괴롭혔다.
그녀의 신경을 가장 거스르는 것은 바로 ‘열기’였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느낌이라 그 감각을 정확히 설명할 순 없었다. 하지만 굳이 비슷한 느낌을 찾자면 이랬다.
‘뭐랄까. 마치 몹시 더운 여름날, 습기로 가득 찬 온실에 들어가 있는 것만 같아.’
물이 끓는 기분. 하지만 끓는점을 넘어서 막 끓어오르는 게 아니라, 미미하게 열이 오르고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 느낌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게 바로 피르에게 쪼인 목덜미였고.
아무튼, 방으로 돌아온 로제타가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자, 잠시 후 노크와 함께 레나가 들어왔다.
“어떤 상처인지 알 수가 없어서 일단 모든 약을 가지고 왔어요. 만약 심해 보이면 이것들을 바르는 것보단 의사를 부르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아뇨. 의사를 부를 정도는 아닐 거예요. 피르가 그렇게 힘껏 물지도 않았거든요.”
“그럼 어디 한번 볼까요?”
레나가 가까이 다가와 들고 온 약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몸을 바로 일으킨 로제타는 그녀가 보기 쉽도록 인사하듯 목을 살짝 굽혔다.
긴 머리카락이 중력에 따라 두 갈래로 갈라져 얼굴 옆으로 쏟아져 내렸다.
레나는 신중하게 남은 머리카락을 모두 걷어 내며 훤히 드러난 로제타의 목덜미를 찬찬히 살폈다.
그녀의 손끝이 매우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로제타의 살결 위를 스쳤다.
하지만 계속 살펴보기만 할 뿐, 약을 바르려는 기색은 엿보이지 않아, 로제타는 의문이 들었다.
‘상처가 어떻길래 이러는 거지?’
혹시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큰 것인가 싶어 긴장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 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영애?”
“네, 레나. 좀 어떤가요? 상처가 혹시 덧났어요?”
“음, 그게 말이죠.”
하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고, 레나는 계속해서 그녀의 목 부근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야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곤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목 뒤에 아무런 상처가 보이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