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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54화 (54/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54화

“네? 그게 무슨…….”

“정말 아무런 상처가 없어요. 목 뒤에 물린 것 맞으세요?”

“네, 이 부분이요.”

로제타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채로 손을 들어 가장 화끈거리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듯 짚었다.

“여기를 중심으로, 마치 불에 덴 듯 화끈거려요. 머리카락이 스칠 땐 따갑기도 하고요.”

“하지만 피부에 붉은 기도 하나 없어요. 그냥 눈처럼 하얗기만 하답니다.”

“하지만 정말 이 부분에서 열감이 느껴지는데…….”

“그렇지만 영애가 방금 짚으신 데엔 그저 불그스름한 점 하나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걸요.”

레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제타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레나를 보며 되물었다.

“거기에 점이 있나요? 제가?”

“아, 모르셨나 보군요.”

“제 눈으로는 어떻게 볼 수 없는 위치라서…….”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하자, 레나가 잠시 고민하더니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머리를 걷고 거울에 비춰 보면 보이실 거예요. 달 같은 모양이랍니다.”

소파에서 일어난 로제타는 화장대로 걸음을 옮겼다.

레나가 눈치껏 손거울을 챙겨 들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로제타는 붉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움켜쥐고 어깨 위로 늘어트린 뒤, 화장대 거울을 등지고 섰다.

“여기요. 비춰 보세요.”

레나가 건넨 손거울을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리자 그녀의 말대로 목과 어깨의 경계 부근에 희미한 연분홍빛의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반점은 초승달 모양이었다.

레나가 다시 한번 제 육안으로 직접 로제타의 점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최근에 생긴 상처 같은 건 아닌 것 같아요. 뭐, 사람에 따라선 붉은 점이 생기기도 하니까요.”

로제타는 거울을 조금 더 들어 올려 달 모양의 점을 살폈다.

“21살이 되도록, 저 부위에 점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네요.”

“머리를 늘 내리고 다니시니 그러실 만도 하죠.”

로제타가 거울을 든 손을 내려놓았다. 목덜미는 여전히 따끔따끔했다.

‘그럼 난 이 통증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절로 한숨이 터져 나오자, 레나가 차선책을 제시했다.

“의사에게 한번 보이는 편이 낫지 않으시겠어요?”

로제타는 주저했다.

점 말고는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는데, 의사에게 선보여 봤자 뭐가 달라지려나 싶었다.

“음, 아뇨. 견딜 만하니까 조금 더 참아 볼게요.”

“하지만…….”

“대신 얼음주머니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우선은 그냥 견뎌 보기로 했다.

괜히 의사를 부르는 게 카밀라 대부인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자신을 반대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스스로 안겨 주는 꼴이 되고야 만다.

그러니 제대로 인사를 받고 인정을 받기 전까진, 조금 조심하는 편이 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하루 정도 참아 보고, 증상이 더 심해지거나 하면 그때 의사를 불러 주길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괜한 걱정을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아요. 긱스 경에게도, 그리고 공작님의 귀에도 들어가는 일이 없었으면 해요.”

레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요, 레나.”

로제타는 걱정하는 눈길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레나에게 괜찮다는 듯 미소 지어 보였다.

* * *

마차 앞에서 로제타, 클라리사와 헤어져 집무실로 올라가던 테런은 묵묵히 제 뒤를 따르는 긱스에게 넌지시 말했다.

“미안하네. 아침에 그렇게 가 버려서.”

한참 잔소리를 할 생각이었지만, 선수 치듯 먼저 사과의 말을 건네 오는 테런의 태도에 긱스는 이내 괜찮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 테런은 집무실 문을 열자마자 도로 닫았다.

그 행동에 당황한 긱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테런을 쫓아 나와 물었다.

「아니! 겨우 영지에서 모셔 왔는데 또 어디 가시는 겁니까아!」

「로제타 양에게.」

「누구요? 아, 클리프 영애 말씀이군요. 왜요?」

「걱정돼.」

「무엇이 말씀입니까?」

「……상처받을까 봐.」

왜 그런 감정을 느낀 걸까.

생각도 해 보기 전에 그의 걸음은 이미 마구간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상해.’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성으로 통제가 조금씩 안 되고 있었다.

그녀와 관련된 일에, 자꾸만 거리 지키기가 안 되는 기분이었다.

“외출은 어떠셨습니까?”

긱스의 물음에 테런이 한숨부터 내쉬었다.

긴말을 하지 않아도 언뜻 드러난 표정에서 테런이 무척이나 심란해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가지 않았으면, 퍽 곤란스러웠을 거야. 로제타 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더군. 애써 아닌 척은 하고 있었지만.”

그의 뒤를 따라 걷던 긱스가 살짝 놀란 눈으로 테런을 바라보았다.

“왜 아무 말이 없는가?”

걸음을 옮기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테런은 자신을 어벙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긱스를 보고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

“왜 날 그러고 보는 거지?”

“새삼스러워서요.”

“뭐가.”

“벌써 클리프 영애의 이름을 부르실 줄 몰랐습니다.”

테런이 눈매를 살짝 더 구겼다.

제 보좌관이 저를 놀려 먹을 생각이라는 게 너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게 뭐가 어때서.”

그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의 앞에서 부를 땐 세상에서 이렇게 쑥스러운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희한하게도 없을 땐 왜 이렇게 자연스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인지. 스스로도 그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이름마저 비슷해서 그런가.’

어떻게 보면 흔하디흔한 이름인데.

이쯤 되면 자신이 일부러 비슷하게 보고자 로제타에게 그 아이를 투영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주 저열하게도.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왜 벌써 날을 세우십니까. 보기 좋습니다. 다정해 보이시고.”

긱스가 시침을 뚝 떼며 대답하자, 테런이 한 번 더 그를 노려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긱스가 쭐레쭐레 쫓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배척이 심한가 보군요.”

테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타를 희귀한 동물 보듯 바라보며 큰 목소리로 수군거리던 귀족들의 시선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가 부드럽게 입매를 휘는 순간, 동시에 터져 나왔던 남성들의 낮은 탄사도.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틀어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테런이 꽉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여러모로 눈에 띄는 여자니까.”

“영애의 외모가 특출나긴 하죠.”

어느덧 두 남자가 집무실에 도착했다.

문을 여는 그 순간, 테런은 입을 가르고 저절로 흘러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마른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가, 한데 뒤섞인 공간이 이젠 진절머리 날 정도였다.

로제타, 그리고 클라리사와 함께 보냈던 오전 시간이 무척이나 평온하고 즐거웠기에 더욱 일하기가 싫었다.

“긱스, 난 정말 일이 싫어.”

“저도 그렇지 말입니다.”

긱스가 대충 제 상관을 어르며 얼른 가서 앉으라는 듯 자리로 떠밀었다.

“나 결혼하면 당연히 휴가는 주겠지?”

“드려야죠. 클리프 영애 홀로 서약을 하러 보낼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테런이 중얼거렸다.

“하루라도 빨리 날짜를 잡는 게 좋겠군.”

“그러면 빨리 일을 하시면 됩니다.”

테런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가장 급한 건은 뭐지?”

“리스턴 후작가의 요청입니다. 땅 정비 사업에서 자신들의 영지를 우선 순위로 올려 달라고 하더군요.”

“무슨 말도 안 되는.”

미간을 찌푸린 테런이 이내 거칠게 혀를 찼다.

“랭우드의 땅을 제멋대로 편취해 놓고선, 이젠 국가사업마저 자기들 편 한 대로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군.”

클라리사와 로제타 앞에서 지었던 따뜻하고 자상한 모습 따윈 온데간데 없었다.

가끔 농담 따먹기를 할 때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긱스에게 테런은 이쪽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길을 닦아야지만 현물이 비로소 자산이 되니까요.”

각 가문의 영지는 특색이 있었다.

에스테스는 영지의 경계 중, 한 면이 바다였다.

그곳이 윌셔스 왕국 유일의 항구 도시라 무역의 교역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리스턴 후작가는 불의 힘을 이용해 화전을 할 수 있으므로 밭과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았고, 땅의 속성인 랭우드의 영지는 광산과 지열을 이용한 온천 등 휴양 시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15년 전 랭우드의 대가 끊기고 난 뒤, 랭우드 영지는 급속도로 힘을 잃었다.

피해는 단순히 랭우드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농업 종사 비율이 월등하게 높은 리스턴 후작 영지도 토질이 좋지 않아 골머리를 썩였다.

온천수 물은 더 이상 솟아 나오지 않았으며, 새로운 광맥을 찾을 수 없었다.

주인은 사라졌으나, 그 땅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마저 죽은 것은 아니었기에 남은 영지민들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관리자를 뽑아야 했다.

온천수가 말라 버린 휴양 구역은 물을 다스리는 왕가에 귀속되었다.

겨울에 뜨거운 물을 나오게 할 순 없지만, 왕가의 힘을 이용해 더운 여름 피서지로 사용할 수는 있었기 때문이다.

왕실은 남은 광산은 에스테스나 리스턴, 두 가문 중 하나에 귀속시킬 생각이었다.

왕실에 더욱더 높은 비율로 공납품을 바치겠노라 하는 쪽의 손을 들어 주고자 했다.

하지만 에스테스 공작가에서 랭우드 후작가에 깊은 조의를 표하며 입찰 경쟁에서 완전히 빠졌다.

그 덕에 리스턴 후작가가 호시탐탐 노리던 랭우드의 광산을 손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

물론 나중에 에스테스가 입찰에서 완전히 빠졌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산량의 4할이나 공납품으로 바치겠다는 말을 한 것을 후회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도로가 닦이지 않아 광부들이 광물을 캐내도 수도까지 운송해 오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나 랭우드 영지는 땅 정령의 가호를 받는 곳이라 주인을 잃은 뒤 그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이상한 점은 그뿐이 아닙니다.”

“그렇지.”

긱스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테런이 깃펜 끝으로 제 입술을 쿡쿡 찌르듯이 누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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