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55화
윌셔스 왕국에서 소비하는 광물의 8할은 랭우드의 영지에서 나온다.
농기구와 무기에 사용하는 쇠와 철, 귀족들의 장신구에 사용하는 보석까지.
거의 독점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랭우드는 윌셔스 왕국에서 손에 꼽히는 부호 가문이기도 했다.
하나뿐인 공작가인 에스테스 공작가와 비견될 정도였다.
물과 바람, 그리고 불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니만큼 거의 부수적인 수입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랭우드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사람이 터전을 만들고 살아갈 흙은 무상으로 제공하되, 광물은 철저히 제값을 매겨 받았다.
보석 장신구는 착용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농기구와 무기 또한 사용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모두 개인적인 만족을 위하여, 그리고 편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니만큼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게끔 한 것이다.
그래서 랭우드는 부수적인 수입을 얻었고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랭우드 후작가가 몰락한 이후 광물은 더 원활히 수급이 되지 않고 있었다.
이런 경우엔 필시 가격이 높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시장이 안정되어 있었다.
왕가에서 개입한 것이 아닌데도.
테런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른 묵직한 숨을 길게 내쉰 뒤 자세를 가다듬었다.
“리스턴 후작의 요청은 불가하다고 전하게. 에스테스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타당한 우선순위를 먼저 고려하겠다고.”
괘씸해서 더 해 주기 싫은 마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리스턴 후작가의 요청을 거절하시면 왕실에 진정을 넣을지도 모릅니다.”
“폐하께서도 후작의 욕심을 아시니, 이 국책 사업도 그렇게 탐내던 리스턴이 아니라 우리에게 맡긴 것 아니겠나?”
“그 덕에 저희만 죽어 가고 있는데 말이죠.”
긱스가 투덜거리자 테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인원을 보충하지. 자네 아래에 둘 사람들도 더 채용하고 말이야.”
그 순간 긱스의 눈이 반짝 빛났다.
“참말입니까? 나중에 무르지 않으시겠죠?”
테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보다 더 바빠질 예정이라서 말이야.”
진짜 싫다는 듯 긱스의 얼굴이 얇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아까 마차에서 들어 보니 로제타 양이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은 모양이야.”
“네? 하지만 클리프 영애의 나이가 올해로 21살이 아닙니까?”
“그 집안의 작자들이 어디 그런 걸 챙겨 줄 사람들이었겠나?”
“하기는요.”
“그래서 말인데, 왕궁에서 열어 주고 싶어.”
“클리프 영애의 바람입니까?”
“아니. 내 생각.”
데뷔탕트를 치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1년에 한 번씩 윌셔스 왕실에서 열어 주는 합동 데뷔탕트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귀족 영애들이 이 기회를 이용했다.
하지만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는데, 보통 3가문의 미혼 자제가 데뷔할 때였다.
왕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가문이니만큼, 왕실에서도 존중의 의미로 혜택을 주는 것이다.
하여 정규 사교 시즌이 아니더라도 가문의 요청이 있으면 이들을 위해 무도회를 열어 주었다.
그렇게 단독으로 데뷔하면 그날의 주인공이 되고, 사교계에서도 단번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된다.
많은 이목을 한 번에 집중시키며 화려하게 데뷔할 수 있으므로, 많은 미혼 영애들이 이를 선망했다.
테런이 노린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왕실에서 ‘특별히’ 데뷔탕트를 열어 주는 사람.
왕실이 주목할 것이고 귀족들이 선망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로제타가 아무리 배척받는 빨간 머리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더는 앞에서 그녀를 모욕할 수 없게 될 터였다.
“폐하께 어떻게 운을 떼어야 좋을까.”
“각하를 아끼시는데 그 정도 청이야 당연히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그렇긴 한데……. 약혼 보고를 목적으로 입궁했다간 괜히 붙잡힐 것 같아서 말이지.”
그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로제타가 없는 자리에서 그녀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상당한 실례기도 했고.
“만약 왕궁에 들를 적당한 명분이 필요하신 거라면, 제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긱스 자네가? 어떻게?”
테런의 반문에 긱스는 제 책상으로 돌아가 단정하게 철한 서류를 가지고 왔다.
“예산 증액 요청서입니다. 아주 골치 아픈 일이죠. 이걸 내미시면 아주 바쁜 척을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척이 아니라 진짜로 바쁜데.”
“뭐 그건 하기 나름이시고요. 어쨌든 그 결에 폐하께 약혼에 대해서도 넌지시 운을 띄우시면 될 겁니다.”
“역시 자넨 유능해.”
“당연한 말씀을 다 하십니다.”
긱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거만하게 굴었다.
“자, 이제 문제가 하나 해결되었으니 어서 일하십시오.”
“정말, 지독하군. 지독해.”
테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이내 보좌관의 말에 따라 순순히 자세를 바르게 만들었다.
그러다 깜빡 잊고 있던 걸 떠올려 곧바로 긱스에게 지시를 내렸다.
“참, 긱스. 레나가 추천한 춤 선생이 있어. 그에게 접촉해, 로제타와의 수업 일정을 잡도록 해.”
“알겠습니다. 이력서도 받아 올릴까요?”
“아니, 됐네.”
긱스가 웬일이라는 듯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레나에게 듣기로, 이미 수도에서 명성이 자자한 댄스 선생이라고 했다.
꼼꼼하고 재치 있는 수업 덕에 이미 영애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고 했고, 아직 어린 자식을 둔 부모들 역시 그에게 제 자식의 춤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기 위해 줄을 설 정도라고 했다.
원래 자식 교육은 최고로 좋은 것만 시키고 싶어 하지 않나.
그러니 굳이 자신이 검증하지 않아도, 부모들이 한차례 검증했으니 괜찮으리라 싶었다.
“인기 있는 선생이라고 하니 아마 수업이 풀로 잡혀 있을 거네. 웃돈을 주고서라도 모셔 오도록 해.”
“에스테스 공작가에서의 요청인데 있는 일정도 조정하겠지요.”
테런이 피식 웃었다.
“알겠습니다, 각하. 그럼 수업 일정을 잡는 대로 그 부분만 보고 드리겠습니다.”
“고생이 많군.”
테런이 다시 서류 산을 바라보았다.
본능적으로 ‘아, 오늘도 야근이겠구나’ 싶어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 * *
클라리사의 방으로 건너가기 직전, 로제타는 조그만 목소리로 자신의 오랜 친구를 불러 보았다.
“실프.”
하지만 특유의 그 ‘핑’ 하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하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안 나오는 거지?”
혹시나 못 들어서 못 나오는 것인가 싶은 마음으로 아까보다는 조금 더 목소리 크기를 키워서 불러 보았다.
“실프?”
그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소환에 응하지 않는 게 벌써 며칠째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하지만 자신의 처지에선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어디 물어볼 데도 없고.’
테런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지만, 로제타는 고개를 저었다.
도움을 받을 수 없으리라 여긴 탓이다.
답답함에 그녀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가 이내 길게 내쉬었다.
그러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탁상시계의 시곗바늘이 가리키고 있는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실프에게 팔려 있던 정신이 확 들었다.
클라리사에게 아침 약을 가져다줄 시간에서 5분 정도 지나 있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벌써 일어났겠다.”
실프는 오후쯤에 한 번 더 소환해 보기로 하고, 일단은 서둘러 작은 은쟁반에 약 봉투와 물컵, 그리고 사탕을 챙겼다.
테런의 약혼녀로 공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그녀의 신분은 공식적으론 클라리사의 간병인이었다.
그랬기에 종전처럼 매일 아침과 밤에 약을 챙겼다.
약 시간을 놓치면 아이를 만날 수 없었기에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카밀라 대부인이 클라리사에게 다시 가정 교사를 붙였기에, 수도에서 생활한 이후로 로제타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외국어, 자수, 수학, 피아노, 세계사, 매너 글쓰기, 교양 승마, 신학 교리, 황실 예법 등등.
아직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벅찰 정도로 많은 수업이 촘촘한 시간 간격으로 짜여 있었다.
로제타는 힘들 것 같으니 테런에게 말해서 과목의 수라도 줄여 보자는 말에 클라리사가 힘없이 미소 지으며 우울하게 중얼거리던 모습을 떠올렸다.
「할머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거예요. 전 성인이 되면 바론 전하의 정비가 되어야 하니까, 지금부터 준비 해야 한다고 늘 입이 닳도록 말씀하셨거든요.」
그 말에 로제타는 단단히 화가 났다.
클라리사의 인생이지 않은가.
그녀가 배우고 싶어서 배우는 것이라면 모를까, 남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배워야 하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귀족이니까 최소한의 예법과 글 같은 건 배울 수 있다고 칠 수 있지만, 왕비가 되기 위해서 교육시킨다니.’
도통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바론이 좋은 놈이라면 또 몰라.’
로제타가 가장 많이 화가 나는 부분이 그 점이었다.
그가 클라리사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꽂혀 버린다는 미래를 뻔히 알고 있기에 더욱 속에서 천불이 나는 기분이었다.
로제타는 언제고 한번 테런에게 시간을 좀 내 달라고 한 뒤, 클라리사의 파혼에 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눠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직 어려서 조금 더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혹독한 스케줄로 생활하는 클라리사가 너무도 안쓰러워 이른 시일 내에 해결하고 싶었다.
“아얏!”
목 뒤가 찌릿했다.
쟁반을 쏟을 뻔했지만, 손가락에 힘을 바짝 준 덕분에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피르에게 쪼인 곳은 조금씩 이상한 감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평소엔 괜찮다가 간헐적으로 ‘찌릿’ 한 아픔이 번지며 눈앞이 새하얘졌다.
하지만 그 고통이 정말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지나가기 때문에 로제타는 그냥 참는 것으로 상황을 넘겼다.
때때로 거울 앞에서 목 뒤를 확인해 보기도 했는데, 분명 연분홍색이었던 초승달 모양의 반점이 기분 탓인지 조금씩 진해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또 언제 아팠냐는 듯 몸이 괜찮아지자, 로제타는 은쟁반을 한 손으로 옮기고 짧게 노크를 한 뒤 커넥티드 룸의 문을 열었다.
“클라리사. 아직 있니? 오늘 내가 좀 늦었어,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