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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56화 (56/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56화

평소 같으면 일찌감치 일어나 세안을 마치고 잠옷도 다 갈아입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로제타가 클라리사의 방으로 건너갔을 때, 그녀는 아직도 침대에 누워 있었다.

“클라리사?”

한 번 더 부르자, 이불 안에서 잔뜩 가라앉은 어린 목소리가 안쓰럽게 흘러나왔다.

“언…… 니…….”

“클라리사, 무슨 일이니?”

로제타가 잰걸음으로 침대에 다가갔다.

누워 있는 클라리사의 얼굴이 새빨갰고, 은빛 머리카락은 땀에 절어 뭉쳐져 있었다.

로제타는 은쟁반을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신의 손바닥을 클라리사의 이마 위에 대었다.

“열이 좀 있는데.”

고열이라고 할 정도로 심하게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리고 약한 몸엔 분명 더 아플 듯했다.

“언제부터 이랬니?”

콜록콜록, 잔기침을 토하던 클라리사가 간신히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아침에 눈을 뜨니까…… 몸이 너무 무거워서…….”

“내가 받쳐 줄 테니까 우선 조금만 일어나 볼까? 힘들겠지만 아침 약은 꼭 먹어야 해. 알고 있지?”

클라리사가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타가 작은 몸 뒤로 왼팔을 쑥 집어넣은 뒤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빠르게 베개를 정돈해 기댈 수 있게끔 만든 뒤, 그녀는 가루약 봉지를 열어 물컵에 섞었다.

“자, 기침이 많이 나오고 있으니까 오늘은 물에 타서 먹자.”

가루약이 잘 풀어지도록 섞은 뒤 물 잔을 내밀자, 클라리사가 두 손으로 컵을 꼭 쥐고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마침내 물이 바닥을 보이고, 클라리사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칭얼거렸다.

“써요오…….”

“잘했어, 클라리사. 다시 누울래?”

“조금 앉아 있을래요.”

클라리사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님께 혼나겠죠? 오늘은 매너 글쓰기 수업이 있는데…… 이미 늦은 것 같아요…….”

“걱정하지 마. 아픈데 공부는 무슨.”

로제타가 침대 헤드 쪽에 내려와 있는 설렁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잠시 후, 메이드가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공녀님의 매너 글쓰기 수업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이 벌써 오셨나요?”

“네, 교습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선생님께 모처럼 먼 걸음 하여 주셨는데 죄송하지만, 오늘 공녀 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 수업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고 전해 주세요.”

“어머. 공녀님 많이 아프세요?”

“응…….”

로제타는 말을 이었다.

“레나는 출근했나요?”

“아, 라스크 부인은 아직 오지 않으셨어요. 보통 10시쯤 오시는데…….”

“그럼 그녀가 출근하는 대로 오늘과 내일, 클라리사의 공부 일정을 모두 취소해 달라고 전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리고 공녀님의 병간호는 제가 할 테니 젖은 수건을 가져다주시고, 식사는 소화가 잘되는 부드러운 음식을 침실로 올려 주세요. 식당까지 내려가지 못하실 것 같으니까요.”

“네, 주방장께도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나가 보도록 해요.”

메이드가 꾸벅 인사한 뒤 다시 방을 나섰다.

“고마워요, 언니.”

로제타는 간이 의자를 가지고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클라리사를 알게 된 후, 그녀가 이렇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아픈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마음 편하게 지냈던 에스테스 파크에선 열이 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오늘이 로제타가 간병인이 된 뒤 처음으로 제대로 된 병간호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로제타는 안쓰러운 눈길로 아이를 바라보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가닥가닥 떼어 내 주었다.

그동안 에스테스 파크에서 요양하며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클라리사는 원체 체력이 약했다.

수도로 올라오느라고 일주일이라는 장거리 여행을 한 데다가 여독을 풀 시간도 없이 바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기어코 몸에 무리가 온 모양이었다.

“네가 아프면 내 마음이 아파. 오늘 푹 쉬고, 얼른 낫자.”

저를 쓰다듬어 주며 다독이는 말에 코끝이 찡한 모양인지 클라리사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저 아플 때 누가 옆에서 이렇게 살펴 주는 거 처음이에요.”

잔기침을 토해 낸 클라리사가 조막만 한 입술을 열심히 움직여 말했다.

“언니가…… 엄마 같아요. 난 물론…… 엄마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요.”

클라리사가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로제타가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고는 아이의 몸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잠시 멈칫하던 클라리사 역시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늘 의젓하더니, 이럴 때 보면 영락 없이 아기라니까.”

“아니에요. 전 여덟 살이라고요.”

“여덟 살은 아직 아기란다, 클라리사.”

그렇게 작은 등을 쓸어내리며 괜찮다, 괜찮다, 달래 주던 때였다.

방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방문자는 테런이었다.

“클라리사가 아프다고 하던데.”

“오라버니…….”

클라리사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테런이 한달음에 침대로 다가왔다.

그에게 자리를 비켜 주며 로제타가 클라리사의 상태를 설명했다.

“미열이 좀 있어요. 아이들은 피곤하면 쉽게 열이 오르니까요.”

테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체를 수그려 클라리사를 살폈다.

클라리사의 얼굴을 덮을 듯 큰 손으로 아이의 머리카락을 걷고는 이내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여행이 많이 피로했나 보구나.”

테런의 그 말에, 로제타가 살짝 뾰족한 말투로 말을 보탰다.

“여행도, 피로에 한몫한 거라고 생각해요.”

테런이 굽혔던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던 로제타를 똑바로 응시했다.

“다른 이유가 더 있습니까?”

“물론이에요. 여독이 채 풀리지 않았는데 곧바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며 공부를 하다 보니 탈이 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목소리를 높이던 로제타는 말꼬리를 살짝 흐렸다.

자신이 너무 주제넘게 나섰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쩍 테런의 눈치를 살폈는데, 다행히 그에게선 기분 나빠하는 기색을 엿볼 수 없었다.

“일단 제 독단으로 오늘 클라리사의 공부 일정을 취소시켰는데…….”

“잘하셨습니다.”

테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심하게 신경을 쓰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이참에 일주일 정도 공부를 쉬게끔 하라고 일정을 조절해 두라 이르겠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로제타가 눈까지 반짝이며 반색하자 테런이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타가 클라리사와 시선을 교환하며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잘 됐다’ 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의사를 보내 주마. 약 먹기가 싫겠지만, 꼭 챙겨 먹고 푹 자도록 하렴.”

“네에…….”

침울하게 대답하는 클라리사를 웃음기 묻은 시선으로 잠시 바라보던 로제타가 다시 테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그녀는 그가 외출복 차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출하시나 봐요.”

“예. 폐하께 보고 드릴 것도 있고 해서 잠시 왕궁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가시기 전에 이렇게 얼굴 보여 주셔서, 클라리사가 많이 안심한 것 같아요.”

“나가기 전에 보고받을 수 있어 다행이죠.”

“많이 늦으세요?”

가능하면 클라리사의 옆에 테런이 있어 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건넨 질문이었다.

그녀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테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대답을 돌려주었다.

“되도록 일찍 귀가하겠습니다.”

이제 정말 나가 봐야 하는 모양인지 테런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서운함을 담은 클라리사의 눈길이 높아지는 테런의 얼굴을 따라가듯 위로 들렸다.

참는 법이 너무 익숙해진 아이였다.

차마 더 있어 달라는 어리광은 피우지 못하고, 속으로만 꾹 삼키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클라리사.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그런 어린 동생의 마음을 안다는 듯 테런이 미안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슬쩍 볼을 만진 뒤 뒤돌아섰다.

로제타도 테런에게 인사를 하려고 막 몸을 틀었을 때였다.

“언니. 저 대신 오라버니 배웅 좀 부탁드려요! 오늘은 제가 아파서 나갈 수 없어서 그래요.”

클라리사의 말에 로제타가 잠시 테런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방문 앞까지만 모셔다드리고 올게.”

로제타는 테런과 함께 클라리사의 방 밖까지 걸음을 옮겼다.

“당신이 저 아이의 옆에 있어 주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척 마음이 놓여요.”

“공작님께서 그렇게 믿어 주신다니 도리어 제가 감사드리네요.”

“로제타 양. 클라리사를 부탁합니다.”

테런의 목소리에는 진정성이 묻어 있었다.

자신에게 고개까지 살짝 숙이며 부탁하는 모습에, 로제타는 이제까지 그를 대할 때와는 조금 다른 감정으로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원작에서, 테런이 클라리사를 얼마나 아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 아이를 제게 맡긴다는 것이 남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날…… 믿는구나.’

그에게 신뢰받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에 뿌듯함과 기쁨이 조금씩 번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언제부턴가 헐거워진 마음의 빗장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 * *

테런이 보낸 의사는 곧 도착했다.

클라리사를 살펴본 의사는 큰 문제는 아니고 피로 누적으로 인한 발열 같다는 소견과 함께, 해열제를 처방해 주고 돌아갔다.

묽게 끓인 수프로 배를 채우게 한 뒤, 해열제를 먹이자 클라리사는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사이 로제타는 부지런히 아이의 머리에 물수건을 올리고 몸을 닦아 주었다.

행여라도 클라리사가 흘리는 땀이 체온을 빼앗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한참을 간호하던 그녀는 30분 전 클라리사의 머리에 얹어 놓았던 물수건을 걷어 내어 대야에 담갔다.

물이 그사이 매우 미지근해져 새 물로 갈아 와야 할 것 같았다.

메이드를 부를까 하다가 괜히 방 안에 누군가 더 들락거리는 것이 클라리사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만 같아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로제타는 클라리사를 살폈다.

테런이 선물로 준 테디 베어를 오른쪽 팔에 꼭 껴안고 눈을 감고 있는 아이는 한결 편안해진 숨으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곤하게 잠들었으니 잠깐 자리를 비우는 것쯤은 괜찮으리라.

로제타는 물이 든 대야와 수건을 챙겨 들고 조심조심, 소리가 나지 않게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클라리사의 방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병간호하는 내내 자신이 앉아 있던 간이 의자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틀어 올린 한 귀부인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 대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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