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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57화 (57/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57화

로제타가 내는 인기척에 살짝 뒤를 돌아본 카밀라는 그녀에게 굳이 아는 척하지 않고 다시 제 손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뒤 팔을 뻗어 클라리사의 이마를 살짝 짚었다.

대야를 들고 침대 가까이 서둘러 다가온 로제타가 한껏 낮춘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의사가 지어 준 약을 먹고 열은 금방 내렸습니다.”

“……그런 것 같군.”

들릴 듯 말 듯 작게 대답한 카밀라는 곧장 클라리사의 이마에서 손을 뗐다.

‘클라리사를 엄하게 대하긴 하시지만, 그래도 손녀니 걱정은 하시겠지.’

하지만 그런 로제타의 생각은 곧바로 달라졌다.

카밀라가 잠든 클라리사의 어깨를 잡고 살짝 흔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클라리사. 일어나 보렴.”

로제타가 화들짝 놀라며 카밀라를 말렸다.

“대부인. 외람되지만 공녀님께선 이제 막 잠드셨답니다. 그러니…….”

하지만 이미 늦은 터였다.

클라리사가 ‘우웅’ 소리를 내며 눈을 비비며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언……. 하, 할머님?”

클라리사는 로제타 대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카밀라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잠이 싹 달아난 얼굴을 했다.

누워 있던 그녀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하, 할머님.”

“아파서 오늘 오전 수업을 취소했다는 소식을 듣고 와 봤단다.”

“앗, 네……. 몸이 조금 무거워서요…….”

카밀라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턱 끝을 살짝 치켜든 뒤 고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약을 먹고 난 뒤는 좀 어떻지?”

“로, 클리프 영애께서 돌봐 주신 덕분에 매우 괜찮아졌어요.”

“다행이로구나.”

손녀를 돌봐 줘서 고맙다는 등 치하의 말 한마디라도 해 줄 법하건만, 카밀라는 로제타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아무런 말을 건네지 않았다.

로제타 역시 카밀라의 의도를 읽은 것인지 불편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

카밀라는 계속해서 클라리사에게만 말을 걸었다.

“테런의 말대로 일주일 치 수업은 취소하기로 하자꾸나.”

“저, 정말이세요, 할머님?”

부드럽게 건네는 목소리에 마치 큰 잘못을 한 것처럼 푹 숙이고 있던 클라리사의 얼굴이 위로 들렸다.

그녀의 눈빛은 방금 들은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얼떨떨해 보였다.

“그럼.”

아이에게 확신을 심어 주듯 카밀라 대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할머님!”

클라리사가 환한 얼굴로 외쳤다.

수업을 빼 혼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카밀라가 걱정까지 해 주자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클라리사. 그럼 오늘은 쉬게 되었으니, 이 할미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니?”

“네? 무슨…….”

카밀라가 클라리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느릿하게 말했다.

“저택에 손님이 오셨단다. 리스턴 후작가의 올리비아 양이지.”

“아…….”

언뜻 들으면 그냥 설명 같아 보였으나, 속뜻은 그게 아니었다.

“마리안느. 괜찮겠니?”

얼핏 부드럽게 권유하는 것처럼 들렸으나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실려 있는 목소리였다.

한편 카밀라가 자신을 미들 네임으로 부르자 클라리사의 작은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녀의 할머니가 미들 네임을 부를 때는 딱 두 가지였다.

엄하게 야단치거나 경고할 때.

미들 네임으로 불렸을 때, 삼십 분 동안 벽장에 갇힌 적도 있었기에 클라리사는 이 상황에 커다란 압박감을 느꼈다.

4가문의 사람들은 다른 귀족들과 달리 미들 네임을 가진다.

일종의 그들만의 가풍이기도 했다.

미들 네임은 가문의 선조 중 본받을 업적을 이룩한 사람이나 인품이 훌륭하던 이의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그러니 카밀라가 미들 네임으로 부르는 것은 선대를 욕보이지 말고, 네가 짊어진 이름의 무게를 느끼고 바르게 처신하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오랫동안 카밀라의 화법에 익숙해져 있던 클라리사는 그 뜻을 알아들었다.

“네…… 할머님. 준비할게요.”

클라리사가 침울한 목소리로 답하며 꼭 쥐고 있던 테런의 테디 베어를 손에서 놓았다.

그런 뒤 작은 손으로 덮고 있던 이불을 슬쩍 걷어 내었다.

그때, 로제타가 각오를 되새기기라도 하듯 숨을 들이켠 뒤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대부인. 주제넘지만 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그제야 카밀라의 눈길이 로제타에게로 향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시선이었다.

이상하게도 대놓고 적의를 품는 것보다 이편이 더 사람을 긴장시켰다.

로제타는 마른침을 모아 삼킨 뒤,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열이 내렸다고는 하나 공녀님은 지금 휴식이 필요한 상태세요. 손님을 맞이하시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이름이?”

이제야 물어 주는구나.

로제타는 씁쓸함을 삼키며 예법에 맞게 대답했다.

“클리프 남작의 여식, 로제타 클리프라고 합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오, 그래요. 클리프 영애.”

얼핏 부드러워 보이는 미소였지만, 로제타는 알 수 있었다.

그저 아주 최소한의 예의만을 차리기 위해 입술을 끌어 올렸을 뿐이라는 것을.

“음. 난 이렇게 생각해요. 아무래도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 생각도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이죠.”

카밀라는 말을 고르듯 잠시 ‘음’ 하는 소리를 내었다.

“에스테스 공작가는 윌셔스의 기둥 중 하나죠.”

“알고 있습니다, 대부인.”

“그럼 그 가문의 일원이 짊어지는 무게가 결코 다른 이들과 같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겠군요.”

묘하게 위압감이 드는 말투와 고압적인 자세에도 로제타는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공녀님은 아직 아이세요.”

“하지만 여염집의 아이들과는 다릅니다. 에스테스 공녀니까요.”

“그래도 아이입니다.”

마주 보는 두 여자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대부인과 뜻을 함께할 수 없습니다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여덟 살은 아직 아이가 맞아요. 그리고 아이에게, 어른다움을 강요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아이가 울지 않았으면, 주눅이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아이를 그렇게 구김살 없게, 행복하게 해 줄 순 없겠지만…… 적어도 제 눈앞에 있는 클라리사 하나 만은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 아닐까?

로제타의 태도에 카밀라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논쟁이 의미 없고 쓸모없다는 티를 역력히 내면서 말이다.

“영애는, 내게 잘 보일 생각이 없군요.”

자신이 테런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행동하냐는 뜻을 담고 있었다.

카밀라의 뼈가 있는 말에 로제타의 입술이 잠시 다물렸다.

그녀라고 왜, 카밀라가 무섭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클라리사가 겪어야 할 일을, 성인으로서 그냥 못 본 척 넘길 수는 없었다.

“물론, 저도 대부인께 잘 보이고 싶습니다.”

카밀라가 피식 바람 빠진 소리로 웃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꼬박꼬박 말대답할 거라고는 정말 꿈에도 예상치 못했답니다.”

로제타가 떨리는 숨을 들이마신 뒤,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대부인의 눈에 들기 위해 그른 것을 옳다고 말할 순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것 역시, 무척이나 잘못된 일 중 하나니까요.”

“지금 영애의 말은, 마치 내가 내 손녀의 건강을 해치기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들리는군요.”

“그러실 의도는 물론 없으시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비칠까 염려되어 감히 드리는 말씀입니다.”

카밀라가 로제타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질책하는 눈빛도, 짜증이 난다는 눈빛도 아니었다.

그저 관찰하는 것 같은 무감한 시선이었다.

로제타는 심지 굳게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잠시 후, 카밀라가 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역시 테런의 짝보다는 클라리사의 간병인으로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군요.”

로제타가 살그머니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카밀라는 입꼬리만 끌어 올린 뒤, 클라리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좋은 간병인을 얻었구나, 클라리사. 할미가 괜한 이야기로 네 쉬는 시간을 해친 것만 같아 마음이 무겁다.”

“하, 할머님.”

두 사람의 조용한 언쟁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클라리사가 다급하게 카밀라를 불렀다.

혹시라도 로제타가 카밀라에게 더 밉보일까, 어린 마음에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불을 마저 걷으며, 침대 아래로 두 다리를 내렸다.

“클라리사?”

“할머님. 제가 늦지 않게 준비하고 내려갈 테니, 먼저 리스턴 후작 영애를 맞아 주세요. 손님을 계속 홀로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예법에 맞지 않으니까요…….”

카밀라를 올려다보는 클라리사의 눈빛이 사뭇 떨렸다.

조마조마한 마음이 고스란히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그런 제 손녀를 조용히 내려다보던 카밀라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말리지 않으마. 정 움직임이 불편할 것 같으면 간병인과 함께 와도 괜찮단다.”

“……네, 할머님.”

클라리사의 대답을 들은 뒤, 카밀라가 몸을 돌려 방문 쪽으로 향했다.

로제타를 스쳐 지나갔지만, 카밀라는 매정하리만치 그녀에게 눈길 한 가닥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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