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58화
* * *
예쁜 디자인의 드레스로 갈아입었지만, 클라리사의 해쓱한 얼굴빛을 가리지는 못했다.
로제타는 최대한 단정해 보이도록 클라리사의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하나로 묶은 뒤 리본을 매어 주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몸 상태가 안 좋을 것 같으면 바로 말해야 해. 알았지?”
“네, 언니.”
클라리사가 내내 혼자 내려가겠다고 했음에도 로제타는 그녀를 따라 함께 내려가기로 했다.
응접실에 도착하자 상석에 앉아 있는 카밀라의 옆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으로는 문 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 젊은 여성의 얼굴이 보였다.
여자는 금색과 갈색, 그 두 가지 색깔이 얼룩덜룩 물이 든 것만 같은 더티 블론드의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로제타보다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였는데, 테런과 동년배거나 혹은 더 위인 것 같았다.
여자의 눈매는 음울했으며, 애써 끌어 올리고 있는 입술 끝은 파들파들 떨렸다.
이마에 난 잔머리는 식은땀으로 살짝 젖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이 자리가 불편한 듯 보였다.
“오. 클라리사. 내려왔구나. 어서 이리 와 앉으렴.”
“네, 할머님.”
로제타는 클라리사와 함께 소파 쪽으로 다가갔다.
손님인 올리비아가 로제타의 머리카락 색을 보고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녀는 놀란 눈으로 대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카밀라가 미소 띤 얼굴로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번에 영지에서 클라리사와 함께 올라온 간병인이랍니다.”
저를 가리키는 소개에 로제타는 살짝 굳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인사했다.
“클리프 남작가의 로제타 클리프라고 합니다.”
“아, 아…… 네. 반가워요. 클리프 영애.”
저를 아는 눈치였다.
자신에 대한 소문이 벌써 났나.
로제타는 수도의 사교계는 말이 정말 빠르구나 싶었다.
“저, 저는 올리비아 리즈벳 리스턴이에요. 어떤 분인지, 무, 무척 궁금했는데…… 이렇게 금방 뵐 줄은, 몰랐, 몰랐네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황한 투로 정신없이 수습하는 올리비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로제타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다가 사과의 말을 이었다.
“초대받지 못했는데 이렇게 찾아와서 죄송해요. 클라리사 공녀님이 오늘 좀 몸이 좋지 않으시어 제가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올리비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고, 공녀님. 몸이…… 안 좋으세요?”
대답은 클라리사가 아니라 카밀라가 대신했다.
“아침에 열이 좀 났었답니다. 해열제를 먹고 난 뒤엔 많이 괜찮아졌다고 하더군요.”
“죄, 죄송해요. 공녀님께서 몸이 안 좋으신지, 미처 몰랐…… 답니다.”
“괜찮습니다, 리스턴 영애. 클라리사가 스스로 영애를 뵙고자 내려오려고 한 것을요.”
카밀라가 눈짓하자, 클라리사가의 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사라도 드리고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어머. 고, 마워라…….”
올리비아가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제 딴에는 미소를 짓는다고 한 표정이었지만,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참, 아름다운 분이시군요. 고, 공작님께서 푸, 푹 빠지실 마, 만도 하다고…… 생각되어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로제타가 깜짝 놀란 얼굴로 맞은편을 건너다보았다.
그러다 잠시 후, 시선을 미끄러트려 카밀라의 눈치를 보았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한눈에 봐도 불편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로제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이라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네? 아……! 혹시 비, 비밀인가요? 저도 아, 그냥 아버지께 들어서…….”
올리비아는 행여 자신이 말실수한 것인가 싶어서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눈을 굴렸다.
아버지에게 들었다라.
‘그 말은 리스턴 후작에게 들었다는 뜻이겠지?’
윌셔스 왕국에서 4가문은 특별한 존재니, 중요한 일은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에 가문의 수장들끼리 미리 공유하기라도 하나 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는 오늘 공녀님의 간병인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들 말씀 나누세요.”
로제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겸양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허약한 클라리사가 걱정되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따라왔을 뿐이었다.
대화는 카밀라가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사교 대화법이라는 것은 참으로 기묘했다.
상대가 용건이 있어 찾아온 것이어도 딱 본론만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볼일만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겼다.
‘피곤해.’
사교계 대화법의 핵심은 상대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드러낼 것.
그래서 서두에 날씨가 어떻고, 요새 근황이 어떻고 하는 말들을 빙빙 둘러 전하다가 ‘아, 참.’ 하는 말투로 방금 생각났다는 듯 본론을 꺼내야 했다.
필요에 의해서 얽힌 사무적이고 딱딱한 관계가 아니라, 친분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손님을 맞는 쪽에서도 챙겨야 할 게 많았다.
사전 약속 없이 아무리 급하게 찾아온 손님이라 할지라도, 주인은 객에게 반드시 차와 다과를 내어놓아야 했다.
전생을 현대에서 살았던 로제타에겐 이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시간 낭비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듯, 앞으로 계속 윌셔스에서 지내야 하는 로제타의 입장에선 자신이 이곳의 룰을 따르는 게 맞는 일이었다.
그렇게 대화가 오고 가는 동안 로제타는 조용히 차만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왜 이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올리비아가, 대화에는 도통 어울리지 않고 간간이 추임새만 넣으며 자신을 관찰하듯 보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좀…… 서툰 사람인 것 같아.’
사교계와는 연이 닿지 않은 자신이 봐도 올리비아는 능숙하지 못했다.
실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뚫어질 듯 쳐다보는 시선에 로제타는 더 견디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제 얼굴에 묻은 게 있나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들어 양 볼을 번갈아 가며 만지자, 올리비아
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떨어트렸다.
“아, 아뇨.”
그 이후로 행동을 조금 조심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힐끗거리며 훔쳐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로제타는 그저 속으로만 한숨을 삼킬 뿐 더는 자신이 어떻게 할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한번 불편함을 내비쳤는데도 계속 이러는 것은 상대가 제 행동을 그만둘 의지가 없다는 것을 뜻했다.
게다가 다시 한번 말을 꺼내게 되면 오히려 상대를 모욕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귀족들이란 참.’
물론 로제타의 상식으로는 그런 예법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곳의 룰이 그렇다고 하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카밀라 역시 하지 않기로 했다는 점이었다.
워낙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그녀가 대화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았을 것이었다.
올리비아에게서 더는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의지를 엿보기 힘들었기에, 카밀라는 대화를 마무리하고자 했다.
클라리사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어쨌거나 마음이 쓰였는지 카밀라가 먼저 입을 떼었다.
“클라리사. 이만 올라가 보렴.”
“예, 할머님. 신경 써 주셔서 감사드려요.”
퇴실 허락이 떨어지자 클라리사는 카밀라와 올리비아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로제타 역시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높아지는 그녀의 얼굴을 따라 올리비아의 시선도 점점 위로 들렸다.
“그럼 두 분, 편안한 대화 나누세요.”
올리비아의 눈빛에 낭패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올리비아가 로제타를 붙잡아 세우기라도 하려는 듯 뭐라 입을 벌리려던 때였다.
그보다 한 발 더 빨리 카밀라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리스턴 영애.”
“예? 아, 예. 대부인.”
“언질도 없이 에스테스까진 어쩐 일로 오신 건가요? 퍽 급한 일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도통 말씀을 꺼내지 않으셔서.”
고상한 대부인의 말에 뼈가 있었다.
그제야 올리비아가 제정신을 차렸다.
“아, 아 참.”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소리를 내었지만, 상당히 부자연스러워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카밀라도, 로제타도, 클라리사도 그런 그녀의 행동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아버님께서 에스테스 대부인께 이것을 전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올리비아는 내내 옆자리에 놓아두었던 작은 상자를 서둘러 끌어왔다.
하지만 허둥댄 탓일까?
손에서 놓쳐 버린 상자는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뚜껑이 열렸다.
조개처럼 안에 품고 있던 붉은 보석이 마치 날아가듯 빠져나왔다.
보석은 공교롭게도 로제타의 발아래까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낯빛이 창백해진 올리비아가 당황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어, 어머.”
“괜찮아요. 일어나지 마세요. 제 쪽이 가까우니까요.”
가져다줄 생각으로 로제타는 상체를 숙였다.
보석에, 그녀의 손끝이 살짝 닿았던 순간이었다.
“……읏.”
로제타는 목덜미 반점 부분에서 강렬한 찌릿함을 느끼며 눈매를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