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예쁜 애 옆에 예쁜 애-60화 (60/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60화

두 사람은 그렇게 나란히 걸음을 옮기며 말을 나눴다.

“와튼에게서 당신이 할머님을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아……. 죄송해요.”

테런이 멈칫했다.

행여 자신의 말이 그녀를 책하는 것처럼 들렸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가 곤란하다는 듯 잘생긴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이 잘못했다는 게 아니었습니다.”

“알아요, 저도. 염려해 주신 것뿐이라는걸.”

수줍음이 묻은 그녀의 말에, 테런은 멋쩍은 듯 빈손으로 자신의 콧잔등을 살짝 긁었다.

“그나저나 이젠 정말 괜찮습니까? 응접실에서 당신이 주저앉은 모습을 보고 쓰러진 줄 알고 정말 놀랐어요.”

로제타 역시 깜짝 놀란 것은 매한가지였기에 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조금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빈혈이 있습니까?”

진지한 그의 질문에 로제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전 그저 리스턴 영애가 흘린 보석을 주워 드리려고 했을 뿐이에요.”

테런이 입술에 힘을 주어 늘이다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상체를 숙이면 피의 흐름이 일시에 멈춰 어지럼증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로제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뒷말을 삼켰다.

그녀는 눈치껏 보석에 손가락이 닿았을 때 환영을 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금세 괜찮아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녀 역시 제가 무엇을 본 것인지 알지 못해 설명하기가 난감했다.

“그런데요.”

“편히 말씀하십시오.”

“아까 리스턴 영애께서 가져온 그 붉은 보석은 무엇일까요?”

선물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이상했다.

보석을 선물할 때는 보통 공예품을 주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자면 원석을 잘 가공한 브로치나 귀걸이, 반지 같은 것.

하지만 올리비아가 가져온 것은 원석이었다.

‘보통 선물로 원석을 주는 사람은 없지.’

그래서인지 그 보석에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상태가 매우 이상했지 않나.

보통 힘을 가진 보석이 아니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테런이 내놓은 대답은 특별했다.

“리스턴 영애가 가져온 것은 ‘불의 정령석’입니다.”

“그게 뭔가요?”

“투명한 크리스털에 리스턴 후작이 불의 힘을 넣어 놓은 것이죠. 그래서 색이 붉은 겁니다.”

“그럼 어떤 힘을 불어넣느냐에 따라 색깔이 다른가요?”

“그렇습니다. 만약 바람의 힘을 주입하면 제 눈 색과 똑같은 청록색이 되죠.”

“아하.”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정령석을 선물하는 이유가 뭔가요?”

“선의와 호감의 표시입니다. 일종의 친목을 도모하고자 함이죠.”

“아…… 그렇다면 불의 정령석에는 어떤 힘이 있는데요?”

“음, 일례로 차가운 물에 불의 정령석을 넣으면 금세 따뜻해지죠.”

테런이 피식 웃으며 뒷말을 이었다.

“할머님께서 반신욕을 좋아하시거든요.”

“아.”

그러니까 결국은 선의의 선물이라는 걸 테다.

‘그 보석을 가져온 이유는 이제 충분히 알겠고.’

그러면 왜 자신이 그렇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일까?

불현듯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다.

“그럼 바람의 힘이 불의 힘과 상극인가요?”

자신 역시 실프라는 바람의 정령을 다루지 않나.

그렇기에, 만약 불과 바람이 서로 상극이라면 그 힘들이 부딪쳐서 아까의 그 난리가 난 것은 아닐까?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4가문의 힘은 서로 보완적이니까요.”

무언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만한 대답을 듣지 않을까 살짝 기대하고 있던 로제타는 테런의 대답에 조금 실망했다.

하지만 곧바로 수긍했다.

‘하기는.’

대놓고 싸우자는 게 아닌 이상, 상극인 힘을 일부러 선물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녀가 입술을 앙다물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다음 가설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추가로 더 짚이는 것이 없어 마음이 조금 답답해졌다.

그때, 옆에서 테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따지자면 흙이 불에 약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흙이요?”

“흙 자체도 그렇고, 대지에서 자라는 모든 것이 탈 것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생각에 잠겨 말꼬리를 흐리듯 대답한 로제타가 이내 테런을 돌아보며 물었다.

“하지만 흙의 가문인 랭우드 후작가는 대가 끊겼죠?”

그 순간 테런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예.”

대답은 한참 만에 돌아왔다.

하지만 로제타는 왜 그의 대답이 늦었는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들이켠 숨을 간직하듯 잠시 호흡을 멈췄던 테런이 다시 숨을 내뱉었다.

파르르 떨리는 숨을 길게 내쉰 테런이 꽉 잠긴 목소리로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그러나 힘겹게 말했다.

“할머님께서 누리시는 소소한 사치가 조만간 끝이 나겠군요.”

“왜요?”

“투명한 크리스털이 더 이상 발견되지 않고 있거든요.”

로제타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테런은 자신이 제 발등을 찍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대화에서 랭우드의 존재를 빼놓거나 제쳐 둘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로제타더러 눈치 없다고 탓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몰랐고, 상처도 몰랐다.

그러니, 당연히 그럴 수 있었다.

테런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땅의 모든 광물은 랭우드 후작가의 힘으로 발견이 됩니다. 아마 어딘가 더 있다고 하더라도, 우드의 힘이 없으면 저희는 찾을 수 없죠. 모든 산을 깎아 낼 것이 아니라면 말 입니다.”

그렇군요. 작게 중얼거리던 로제타가 곧바로 다음 질문을 이었다.

“그런데 왜 꼭 투명한 크리스털이어야 하는 거죠?”

유리도 되지 않나.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테런이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다른 광물이나 유리에 정령의 힘을 주입했다가는 깨집니다.”

“정말요?”

“네. 사실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테런은 입술을 꾹 다물어 버렸다.

두 사람 사이에 작은 고요가 찾아왔다.

어느 누구도 그 조용함을 불편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각자의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 * *

3층으로 올라온 로제타는 테런과 함께 곧장 클라리사의 방으로 건너갔다.

“공녀님께선 약을 드시고 바로 자리에 누우셨어요.”

두 사람이 올라오기 전까지 클라리사의 곁을 지켰던 메이드가 보고를 마치고 공손히 인사한 뒤 방을 나섰다.

아이는 그새 곯아떨어져 있었다.

작은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을 확인한 로제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다행히도 열이 다시 오르진 않았어요.”

“클라리사가 고생이 많군요. 어른들의 사정과 욕심으로.”

테런이 안쓰럽다는 듯한 눈길로 제 동생을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로제타 쪽을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곧은 시선이었다.

“그리고 당신도요.”

로제타가 ‘별말씀을요.’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클라리사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방 안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런 뒤 조용히 로제타가 사용하는 방의 응접실로 건너왔다.

찻잔과 티팟을 전시해 놓은 장식장 한편에 붉은 리본을 맨 테디 베어가 놓여 있는 것이 테런의 눈에 들어왔다.

“에스테스 파크에서 데리고 오셨군요.”

“아, 네. 긴 여행을 함께한 동지죠.”

테런이 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리자 로제타가 조금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도 지어 줬어요. 클라리사가 데리고 있는 쪽은 테테, 제가 데리고 있는 아이는 디디.”

“조금 성의가 없는데요.”

“이름은 그래도 저 아이를 어디에 두는 게 가장 좋을까에 대해선 고심을 했어요. 그러다 예쁜 아이는 예쁜 것들 사이에 두는 게 제일 좋겠다는 결론을 냈죠.”

로제타는 테런의 농담에 가볍게 응수하며 그에게 의자를 권했다.

“차라도 한잔하시겠어요?”

“차는 괜찮고…….”

그가 잠시 말을 흐리다가 물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 아직이요.”

“그렇다면 같이 하시죠.”

“저랑요?”

테런이 그러면 여기에 당신 말고 누가 있냐는 듯 웃으며 둘러보았다.

“부담됩니까?”

“아, 아뇨. 그저 생각지 못해서…….”

“사실 제가 지금 배가 매우 고픕니다. 어울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테런이 설렁줄을 잡아당겼고, 곧 찾아온 사용인에게 방에서 식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음식은 금방 준비되었다.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간소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도 적당하고 질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감자를 곱게 갈아 만든 콜드 수프는 입맛을 돋웠으며, 메인 요리인 송아지 뒷다릿살 스테이크는 핏기만 살짝 가져 무척이나 연했고, 씹을수록 육즙이 흘러나와 입 안을 감쌌다.

“정말 맛있네요.”

“입맛에 맞다니 다행입니다. 주방장이 들으면 정말 좋아할 거예요.”

테런은 손수 다 비운 접시를 트롤리에 옮겨 담았다.

그 모습을 본 로제타가 살짝 놀란 얼굴로 서둘러 입을 열었다.

“사람을 부를게요.”

“아뇨, 괜찮습니다.”

테런은 단호하게 고개까지 내저었다.

사실 그는 아까부터 입이 간지러웠다.

식사하는 동안 괜히 먼저 이야기를 꺼내면 그녀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꾹 참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사용인들을 부르기 위해 설렁줄을 당기면 그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솔직히 거기까지는 도저히 인내할 자신이 없었기에 나서서 치워 버린 것이었다.

로제타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는 동안에는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에, 테런은 빠르게 정리해 트롤리를 방 밖에 내놓았다.

그런 뒤 다시 로제타의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