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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61화 (61/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61화

“네, 말씀하세요.”

냅킨으로 입술 주위를 정리하던 로제타가 밝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맛있는 음식까지 먹고 나자 컨디션이 한층 더 좋아진 상태였다.

무슨 말이든지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테런을 바라보았다.

“오늘 왕궁에 다녀왔고, 폐하께 약혼을 허가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애의 데뷔탕트가 정해졌죠.”

“네?”

로제타가 큰 눈을 깜빡였다.

10초도 되지 않는 사이에 뭔가 큰 일이 결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너무 대수롭지 않게 들은 것만 같았다.

“도로 공사 문제로 왕궁에 가신 게 아니었나요?”

“겸사겸사.”

테런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런데 데뷔탕트까지 남은 시간이 조금 빠듯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요?”

“보름 뒤입니다.”

로제타의 미간이 살짝 좁아지며, 눈이 가늘어졌다.

“조금이 아니라, 정말 많이 빠듯하네요.”

“그래서 내일부터는 조금 빠듯한 일정으로 움직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어요.”

로제타는 아무래도 각오를 단단하게 해 둬야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레나가 당신의 보좌관이 될 겁니다. 원래는 하녀장인 엠마 부인이 당신을 도와야 하겠지만, 지금 그녀는 할머님의 수발을 들고 있으니까요.”

“저도 레나가 편하고 좋아요.”

“다행이군요.”

테런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말을 이었다.

“내일 오전 당신이 데뷔탕트 때 입을 드레스와 우리의 결혼식 때 입을 드레스를 상의하러 마담 유리가 방문 할 겁니다. 치수는 미리 재 놓은 게 있으니 시간을 벌었죠.”

“레나의 설명으론, 마담 유리가 무척이나 바쁘다고 들었는데…… 용케 시간을 냈네요.”

“돈과 권력, 명예. 삼박자가 맞으면 이럴 때 좋죠.”

그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테런의 설명은 마치 휘몰아치는 듯했다.

말이 빠른 것은 결코 아니었으나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사교댄스를 가르쳐 줄 선생이 올 겁니다.”

“네? 춤이요?”

로제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데뷔탕트 때, 우리의 첫 춤으로 파티가 시작될 테니까요.”

테런이 오른손을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리고는 천천히 손가락 두 개를 폈다.

“적어도 춤곡 두 개는 외워 두는 편이 좋습니다.”

“저 몸 쓰는 일을 잘하지 못하는데.”

로제타가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어떡하죠? 사실 전 사교댄스를 한 번도 춰 본 적이 없어요. 물론 배운 적도요.”

“그러기 위해서 배우는 거니까, 괜찮아요.”

어설퍼도 기본 스텝만 어느 정도 배워 둔다면, 당일에는 그가 어떻게든 리드해서 끌어 줄 수가 있었다.

“일단 최선을 다해 배워 볼게요.”

“잘하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로제타의 일정은 춤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매일 아침이나 저녁 식사 후 세 시간 동안 집사인 와튼에게서 귀족 명부 수업을 들어야 했다.

“정말 빡빡한 일정이네요.”

설명을 들은 것만으로도 이미 진이 싹 빠져 로제타의 얼굴빛이 조금 해쓱해졌다.

테런이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일단 계획이 그렇다는 설명을 드린 겁니다. 아무래도 조정이 좀 필요할 것 같긴 해요. 아까 할머님을 뵐 때도 힘들어했으니까요.”

로제타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건 이제 정말 괜찮아요.”

“그래도.”

“공작님.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 같지만.”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웃고 있었다.

“전 뒤에서 누가 제 얘기 하는 것 싫어요.”

말인즉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그리고 그 누구도 자신을 헐뜯을 수 없도록 최선을 다해 배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뜻을 알아들은 테런이 격려의 눈빛을 보냈다.

마치 각오를 되새기듯 짧게 숨을 들이켰다 뱉은 로제타가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얼굴에 비장함까지 살짝 떠올라 있었다.

“데뷔탕트를 하기 전에 대부인을 만나 뵙는 게 좋겠어요.”

“괜찮겠습니까?”

염려 묻은 테런의 물음에 그녀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괜찮지 않을 건 또 없으니까요.”

테런이 가슴의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덜어 내려는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최대한 늦지 않게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부탁드려요.”

테런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돌아가려는 듯 보였다.

로제타도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녀는 테런을 올려다보며 곱게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즐거운 식사였어요.”

“종종 자리를 마련해야겠군요.”

“무리하진 마시고요.”

배웅의 길은 짧았다.

“그럼.”

짧은 인사를 남긴 테런이 망설임 없이 방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걸음은 단 한 걸음밖에 옮기지 못했다.

그 바람에 로제타 역시 문의 손잡이를 쥔 채, 방문을 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있었을까.

테런이 다시 몸을 돌려세웠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표정이 사뭇 진지하면서도, 어딘가 혼란스러워 보였다.

“뭐 깜빡하신 말이라도 있으세요?”

그렇다는 대답을 대신하기라도 하는 듯, 그가 턱을 아래쪽으로 당겼다.

로제타는 테런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그가 할 말을 기다렸다.

잠깐의 주저 끝에, 테런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씩 당겨 올리는 입꼬리가 시원스러웠다.

그가 빙그레 미소 짓는 모습에, 이번에는 로제타가 잠시 멈칫했다.

심장에서 시작된 가벼운 진동이 온 몸으로 퍼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공작님도요.”

간신히 대답한 로제타의 귀가 달아 올라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비슷한, 연한 붉은빛으로.

* * *

“으, 윽…….”

불 꺼진 방 안.

넓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로제타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옆으로 돌아누우며 몸을 웅크리듯 말았다.

로제타가 고통을 느낄 때마다 그녀의 목덜미에서 초승달 모양의 붉은 반점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 읏…….”

반점이 점멸을 반복할수록 그녀의 이마와 목덜미에 땀이 흥건해졌다.

입고 누웠던 네글리제 역시 젖어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다.

“하아, 읏…….”

또 한 번 메마른 신음이 열이 섞인 더운 숨과 함께 입술을 가르고 터져 나왔다.

이제 그만 눈을 뜨고 싶어.

로제타는 눈을 감은 채로 생각했다.

그녀는 자고 있지만 반쯤 깨어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하지만 도무지 깨기가 힘들었다.

눈꺼풀 위에 마치 무거운 돌덩이라도 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얼마 만에 꾸는 꿈이지?’

그녀는 지금부터 자신이 꿈을 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도 생생하게 휘이이잉-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음에 이어질 내용을 짐작했다.

꽁꽁 언 손을 얻어맞고, 한참 동안 눈밭을 걷다가 매정하게 클리프 남작가 앞에 버려지겠지.

자신은 제발 저를 버리지 말라고 비참하게 애원할 것이다.

이제는 지겨울 정도건만, 자력으로는 도무지 이 꿈을 통제할 수 없기에 로제타는 그저 어서 시간이 흘러 꿈에서 깨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뭐지?’

처음으로 꿈의 내용이 바뀐 것이다.

‘여긴 어디야?’

그녀가 서 있는 곳은 끝도 없이 펼쳐진 눈밭이 아니라 어딘가의 숲속인 것처럼 보였다.

시린 바람에 계절이 겨울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뭇잎이 다 떨어지지는 않았다.

뾰족한 잎 위로 쌓인 눈도 하나도 없었다.

그제야 로제타는 이 꿈이 자신이 잊어버린 다른 날의 기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드렁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는 꿈의 내용에 집중했다.

하지만 꿈이라는 게 대개 그렇듯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어딘가 흐릿하며, 특징적인 것만 단편적으로 떠오르듯 기억이 날 뿐이었다.

게다가 오늘의 꿈은 평소에 꾸던 것보다 더 흐릿하고, 어딘가 뚝뚝,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마치 수신이 잘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로제타는 자꾸만 흐트러지는 정신을 단단히 붙잡으며 다시 꿈속 상황에 집중했다.

꿈속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버림받던 날처럼 살을 엘 정도로 거세게 휘몰아쳤던 눈보라는 아니었다.

잘 익은 감자처럼 포슬포슬한 눈이 느릿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눈의 색깔이 하얗지 않다는 것이었다.

눈송이는 마치 빛이 비치고 있는 것처럼 붉고…… 또 노랬으며, 간간이 주황빛도 돌았다. 원색은 아니었다.

‘무슨 눈 색이 이렇지?’

그때, 멀리서 무엇인가 번쩍이듯 밤하늘이 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꿈속의 그녀는 아직 아이였으며, 그녀의 키로는 나무 너머의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듯싶었다.

그때였다.

「말도 안 돼…….」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제야 로제타는 옆에 누군가 있으며, 자신이 그 여자의 치맛자락을 잡은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추워요. 들어가면 안 돼요?」

어린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옆에 선 여자는 어린 로제타의 물음에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주춤거리는 걸음으로 발을 끌듯이 앞으로 걸어 나갔고, 이내 넋이 완전히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안 돼……. 이건 거짓말이야……. 안 돼! 이래선 안 된다고!」

그러길 잠시. 여자는 이내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아악! 안 돼. 안 돼! 브……언! 조……!」

여자는 상처를 입은 짐승처럼 처절한 목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연신 불렀다.

‘누구지? 누굴 부르는 거야?’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워낙 흐릿한 기억인 데다가 여자의 발음이 울음기와 섞여 뭉개져 있어 알아듣기 힘들었다.

여자가 자꾸만 앞으로 걸어 나갔고, 그 바람에 로제타의 작은 손에서 그녀의 옷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혹시라도 그녀를 놓칠까, 조바심이 난 표정으로 어린 로제타는 멀어지는 여자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그런 뒤 그녀를 따라잡을 때마다 다시 여자의 옷을 작은 손에 꼭 쥐었다.

마치 어린 로제타가 여자를 붙잡는 꼴이었다.

「이거 놔! 놓으라고!」

여자가 사납게 울부짖었을 그때였다.

어디선가 굉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실제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온몸이 진동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리고 곧 환한 빛이 그녀를 덮치더니, 이내 지축이 거세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 뒤, 빛은 걷히고 새카만 어둠이 그녀를 먹어 치웠다.

마치 연극에서 극의 전환을 알리듯 암전되는 것처럼 말이다.

뚝 끊긴 기억에, 로제타는 이제 꿈에서 깨려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곧 다시 밝아지는 느낌이 들더니, 숲이 아니라 어딘가 허름한 여관 같은 곳에 들어와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서 네가 살아남게 된 걸까?」

여자는 건조하게, 그러나 악의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어린 로제타에게 저주에 가까운 말들을 퍼부었다.

「죽으려면 네가 죽었어야 맞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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