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62화
자신을 향해 날아와 꽂히는 여자의 신경질적인 음성에, 아직 어린 자신이 움츠러들었다.
로제타의 의식은, 그녀가 바로 자신을 클리프 남작가에 버린 여자임을 직감했다.
‘어떻게 생겼을까?’
그녀의 생김새를 파악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눈여겨보려고 했으나, 마치 어둠에 먹혀 버린 듯 얼굴 부분이 완전히 지워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꿈은 마치 누더기를 가져다 깁기라도 한 것처럼 장면 장면이 뚝, 뚝 끊겼다.
이번에 이어진 꿈에선, 여자가 한층 흥분이 가져 보였다.
한결 낮아진 음성으로 그녀가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내가 널 키울 필요는 없겠지.」
뒤에 이어진 말은 발음이 뭉개져 제대로 들을 순 없었지만 대략 이런 것 같았다.
더는 데리고 있어야 할 이유도 없으니까.
「집에 갈래요. 집에 보내 줘요. 여기, 여기 싫어. 흐흑.」
「네가 돌아갈 집 따윈 없어.」
여자는 어린 로제타 쪽으로 무섭게 다가와 우악스럽게 손목을 틀어쥐었다.
자신은 가지 않으려고 작은 몸으로 버티고 섰지만 이내 힘의 차이를 이길 수 없어 따라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아파! 아파요!」
자지러지게 울면서 어린 로제타는 끌려 나갔다.
「죽을 수 없다면 차라리 비참하게 살려무나.」
저주에 가까운 음산한 말이 로제타에게 아프게 박혔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헉!”
로제타는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호흡하는 것을 잊기라도 한 사람처럼 다시 내쉬진 않았다.
꽉 다물린 그녀의 입술이 새하얗게 질려 턱과 함께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수분이 다 밖으로 빠져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그 탓에 이젠 추위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둥, 둥. 거센 심장 박동이 온몸을 두드려 댔다.
그녀는 계속 누워 있는 채였다.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초록빛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고, 무엇인가에 두려움을 느끼듯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다 떨어져 가는 허름한 여관방의 벽이 아니라, 고급 천으로 만든 우아한 캐노피 천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로제타는 한참 만에 속 안에 묵혀 두었던 숨을 길게 뱉어 내었다.
하얗게 질린 안색이 조금씩 제 빛깔을 찾고 있었다.
“……꿈. 그래, 꿈이야.”
그녀가 누운 채로 중얼거리더니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손바닥에도 땀이 흥건해 상당히 축축했다.
그렇게 몇 번을 누운 채로 심호흡한 뒤, 로제타는 팔꿈치로 침대를 짚으며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켰다.
마치 열병을 앓기라도 한 것처럼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녀는 베개를 세운 뒤 침대 헤드에 기대듯 앉았다.
그런 뒤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걷어 내기 위해 손으로 빗질을 하듯 넘겼다.
하지만 땀에 젖은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쓸리지 않았고, 손가락 사이사이에 그물처럼 엉켜 달라붙었다.
그녀의 머릿속 역시, 엉킨 머리카락만큼이나 복잡했다.
“잃어버린, 기억일까?”
추측을 꺼내 놓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꿈은 꾸었으되 그것이 정말 자신의 기억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공상일 뿐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랗고, 빨갛고, 주황색이었던 눈이라…….”
꿈속에서 내리는 눈송이의 색깔 때문에 더욱 제 기억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 눈이 내리다니. 세상에, 말이 안 되잖아.”
그 외에 힌트가 될 만한 것들을 더 떠올려 보려고 했으나, 벌써부터 기억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어디다 적어 둘까?”
오늘 꾼 꿈을 다음에 또 꿀 수 있을지도 모르고, 행여 날이 밝으면 모두 잊힐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로제타는 한숨을 삼키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성냥에 불을 붙여 촛불 하나를 켜자 촛대를 중심으로 어두운 방 안에 어슴푸레 빛이 돌았다.
그녀가 숄을 찾아 가볍게 어깨에 두른 뒤, 책상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푸드덕.
고요한 밤을 헤치는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쫓듯, 그녀가 반사적으로 창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시선 끝에 얼핏, 푸른 꽁지깃이 보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파란, 새.
로제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의 이름을 소리 내어 보았다.
“……피르?”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고, 더는 눈에 비치는 것도 없었다.
그저 시리도록 빛나고 있는 하얀 달 말고는.
* * *
자정이 훌쩍 넘었으나 올리비아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들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피로에 젖은 눈꺼풀은 끔뻑거리다가 이내 무겁게 닫혔다.
게다가 그녀는 에스테스 공작가에서 돌아온 지 이미 몇 시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불편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이유는, 아직 그녀가 마커스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올리비아가 병든 닭처럼 의자에 앉아 불편하게 졸고 있을 때였다.
배려라고는 조금도 없는, 부술 기세로 거칠게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바람에 화들짝 잠에서 깬 올리비아가 긴장한 눈빛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드, 들어와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거친 기세로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이복동생 패트릭이었다.
“나와. 아버지께서 찾으셔.”
마른침을 삼키며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구겨진 매무새를 짧게 단정했다.
마커스의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면 정말 작은 것으로도 트집이 잡혀 혼이 나기 때문이었다.
“굼벵이냐? 빨리 따라오지 않고 뭐 하고 있어?”
“으, 응. 가. 지금.”
올리비아는 조용히 패트릭의 뒤를 따라 걸으며, 마커스의 서재로 향했다.
올리비아의 방문을 두드릴 때와 달리, 패트릭은 매우 정중하게 서재 문을 두드리며 점잖은 척 목소리를 내었다.
“아버지. 올리비아를 데리고 왔습니다.”
미리 언질 들은 게 있었던 모양이었다.
패트릭은 서재 안에서 입실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었고 제 이복 누이를 안으로 떠밀 듯이 밀어 넣었다.
마커스의 서재 문짝만도 못한 취급이었다.
그렇게 올리비아가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가축처럼 실내로 들어섰을 때였다.
서재 벽 안쪽에 설치되어 있던 벽난로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화르륵 불길이 치솟았다.
그 기세에 깜짝 놀란 올리비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분명 그녀 역시도 불의 가문의 일원 중 하나인데, 이상하게도 불이 무서웠고 껄끄러웠다.
다루는 이의 성격에 따라 다른 모양인지, 아버지인 마커스나 패트릭이 다루는 불의 힘은 거칠고 사나워서 무서웠다.
올리비아는 책상에 앉아 있는 마커스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아, 아버지를 뵙습니다.”
하지만 마커스는 그녀의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
그는 제 딸에게 앉으라는 말도 없이 자신이 제일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에스테스 대부인에게 그 영애에 대해서 물어보았느냐?”
기대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듯 심드렁한 말투였다.
마른침을 꼴깍 삼킨 뒤 올리비아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지, 직저, 직접 만났어요.”
그 순간 서류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던 마커스가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크게 뜬 눈으로 되물었다.
“어떻게?”
“클라리사 공녀가 내려왔는데, 가, 같이 왔더라고요.”
“호재였구나. 그래. 직접 만나 보니 어떤 여자더냐?”
“인, 사, 외에는 별로 말을 섞지 않아서…… 잘, 모르겠…….”
그 순간 마커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자라 빠진 것이라, 그저 살피고 관찰하는 것도 이젠 제대로 못 하는 것이더냐!”
크게 질책하는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오는 기분이었다.
주눅 든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쓸모없는 것. 그냥 네가 에스테스 하우스에서 그 여자에 대해 보고 들은 것 모두를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봐라.”
“그게…… 외모가 무척 아름다운 분이셨어요.”
마커스가 거칠게 혀를 찼다.
“외모가 반반해서 빠진 것인가. 그래, 그리고?”
올리비아가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입을 뗐다.
“그리고…… 불.”
“불?”
“붉은 머리카락이었습니다.”
“뭐?”
마커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듯 보였다.
“붉은 머리가 어떻게…… 아. 혹시 야만인의 피가 섞인 것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았어요.”
“하기는. 이제 윌셔스에 야만인들 말고는 붉은 머리가 없기는 하지.”
그가 홀로 중얼거리는 사이 올리비아는 마구잡이로 자신이 봤던 로제타의 모습에 대해서 늘여놓았다.
“그리고 제가…… 대부인께 드릴 보석을 실수로 떨어트렸는데.”
“머저리 같은 것이 이젠 물건을 제대로 옮기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군. 그게 얼마짜린 줄이나 알더냐!”
마커스는 머리가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제 딸의 실수에 대해서 빈정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남지 않은 귀한 투명 크리스털이었다.
큰 것은 모조리 왕실에 납품하다 보니 제 수중에 남은 물건은 몇 개 되지도 않을뿐더러 그 크기가 작았다.
게다가 투명 크리스털 역시 랭우드의 몰락 이후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되다 보니 하나하나가 아쉬운 상태였다.
그런 귀한 것을 굳이 에스테스의 카밀라에게 선물한 이유는 올리비아를 그곳에 보낼 구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보석과 광물이면 몰라도 투명 크리스털은 가짜를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올리비아가 그것을 떨어트렸다는 말에 짜증이 치솟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올리비아는 주눅이 든 상태로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그런 뒤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얼른 보고를 마치고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아, 아무튼 클리프 영애가 그것을 주워 주셨는데…… 그때 그 영애의 행동이, 조, 조금 이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