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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63화 (63/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63화

마커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사납게 물었다.

“이상해? 뭐가 어떻게 이상했느냐?”

“정령석에 손을 대는 순간, 마, 마치 어지럼증이 인 것처럼 주저앉아서 일어서질, 모, 못했어요.”

“허약한 체질인가 보지?”

마커스는 비웃으며 테런의 안목을 조용히 씹었다.

그는 더 흥미가 없어졌다는 듯 다시 서류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관심 없다는 투로 물었다.

“그밖에 다른 이상한 점은 없었고?”

아비가 보고 있지 않음에도 올리비아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때 에스테스 공작님께서 들어오셨고…… 그 영애를 부축해서 데리고 나가셨어요.”

“공작이, 직접?”

“네. 영애를…… 무척 아끼시는 듯 보였어요.”

올리비아의 설명에 마커스가 거칠게 혀를 찼다.

“밸도 없는 것 같으니.”

마커스가 길게 눈을 흘겨 제 딸을 노려보았다.

또 이유 없이 제게 쏟아지는 비난에, 올리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방심하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아 입술을 꾹 말아 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다행히 마커스로부터 퇴실 허락이 떨어졌다.

“알겠으니 그만 나가 보도록 해라.”

“네? 네. 그럼 좋은 밤 되셔요. 아버지.”

올리비아는 들어올 적과 달리 빠른 속도로 나갔다.

홀로 서재에 남은 마커스는 깃펜의 촉으로 종이 위를 쑤시듯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카밀라에게 보낸 제 딸의 초상화가 테런에게 채 전해지지도 않았음을 깨달았다.

마커스는 굳은 표정을 유지하다가 못마땅하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사이가 좋다, 라…….”

카밀라에게 대항해 그냥 아무 여자나 데리고 온 줄로만 알았는데 아무래도 아닌 듯싶었다.

권력을 위해 에스테스와 사돈지간이 되어 볼까 했더니 아무래도 일이 튼 것 같았다.

바론에게 전해 듣기론 국왕이 테런의 약혼 보고에 기꺼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약혼녀를 위한 데뷔탕트도 왕궁에서 열어주겠다는 말까지 흔쾌히 했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이 약혼을 깨고, 그 자리에 제 딸을 밀어 넣는 일이 요원해 보였다.

“도로 개발 건도 물 건너갔군. 쯧.”

그래도 마커스는 테런이 카밀라의 뜻에 따라 세도가의 영애와 맺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참 다행이다 싶었다.

그래야 견제가 가능할 테니까.

“올리비아에게 숫기만 조금 더 있었어도 일이 진척됐을 텐데.”

마커스의 목소리에서 강한 아쉬움의 향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 * *

“또 뵙습니다, 클리프 영애.”

“어서 오세요, 마담 유리.”

로제타가 웃으며 맞이하자 유리 블레어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유리는 들어와서도 문을 닫지 않았다.

“잠시만 문을 열어 두어도 괜찮을까요? 들일 물건이 좀 많아서요.”

“물건이요?”

유리 블레어는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일전에 테런이 의상실에서 대량으로 주문한 드레스를 전부 로제타의 치수에 맞춰 수선해 가지고 왔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함께 온 의상실 직원들과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저마다 드레스나 구두, 모자 같은 것을 하나씩 든 채 분주히 그녀의 드레스 룸을 오갔다.

드레스 한 벌의 값이 왕국민들의 한 달 생활비와 맞먹는 금액이기에 나르는 손길들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거의 비다시피 하던 로제타의 드레스 룸이 차곡차곡 채워지기 시작했다.

실감이 나지 않는 듯 조금 어벙한 눈으로 줄지어 들어오는 행렬을 바라보던 로제타의 옆으로 레나가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성혼하시게 된다면 바로 공작 부인의 방으로 옮기시겠지만, 우선은 사용하는 방에다 물건을 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공작, 부인의 방이요?”

로제타가 놀라서 작게 되물었다.

레나가 왜 그러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아니에요.”

테런과 결혼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공작 부인의 방을 사용할 것이라고는 정말 조금도 생각지 않고 있었기에 레나의 말이 더 얼떨떨하게 들렸다.

“수도에 두 분의 약혼 사실이 소문은 났지만, 정식 효력은 영애의 데뷔탕트 때부터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전까지는 되도록 노마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잘했어요, 레나.”

로제타는 입 안이 조금 마르는 기분이라 입술을 꾹 다물고 힘을 주었다.

작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얼추 짐이 다 들어왔다. 마지막 사용인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자 그제야 유리가 티 테이블로 다가왔다.

로제타가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옷 수선이 생각보다 빨리 되었군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만든 드레스를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입어 주신다는데, 당연히 빨리해 드려야죠.”

유리가 입가를 가리고 호호 웃으며 대답했다.

“수도에 소문이 자자하여요.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클리프 영애의 데뷔탕트와 결혼식 때 입으실 드레스를 저희 의상실에 맡겨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로제타가 조금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게 유리의 눈에는 쑥스러워하는 것으로 비쳤다.

“앞으로도 저희 의상실을 많이 이용해 주세요.”

“마담 유리가 바쁘지 않으시다면요.”

과하지 않은 선에서 적당히 그녀를 띄우고, 로제타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 레나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오후 일정이 빡빡하셔서, 되도록 스케치를 빨리 끝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레나의 설명에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지고 온 가방을 열었다.

별로 커 보이지 않았음에도 가방은 마치 마법 보따리라도 되는 것처럼 안에서 두꺼운 책 세 권을 토해 내었다.

“그동안 제가 디자인해 온 드레스들을 모아 온 자료집이에요. 결정하시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가지고 왔답니다.”

일종의 디자인 북이었다.

사교계는 의복이 유행을 탄다.

그래서 기본적인 쉐이프는 정해져 있고, 주문자의 개인 취향에 맞춰 원단이나 색깔, 레이스 같은 세부적인 디테일을 각자 다르게 제공하는 것이다.

“브로슈어가 두껍고 권수가 많네요.”

“그야 두 벌을 주문해 주시니까요.”

가장 앞에 놓인 디자인 북을 집어 들어 대여섯 장 넘겨보던 로제타는 이내 다시 내려놓았다.

원하는 바가 확실했기에, 이것을 다 살펴 고르는 것보다 상담을 통해 세부적인 의견을 나누는 게 더 의미 있고 효율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드레스가 좀 심플했으면 좋겠어요.”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을 원하시는군요.”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이목구비가 제법 화려하게 생긴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인상엔, 붉은 머리카락도 단단히 한몫하고 있음도 알았다.

그랬기에 레이스 같은 장식이 많이 달린 것보단 밋밋할 정도로 수수한 디자인이 나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쩜. 제 생각과 같으시군요.”

마담 유리가 미소 지었다.

“합동 데뷔탕트면 모르겠지만 홀로 데뷔하시니, 굳이 화려한 드레스를 선택하실 필요가 없죠.”

사교계에 그 누구보다도 밀접하게 연이 닿아 있는 사람의 말이었다.

마담 유리가 매년 얼마나 많은 영애와 귀부인들의 드레스를 제작하고, 그들의 데뷔를 도왔겠는가.

그녀의 조언은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었다.

“데뷔탕트의 주인공은 모두 흰 드레스를 입지요. 하지만 약혼식 날엔 오직 영애만 그 색을 입으실 수 있어요. 모두가 선망하는 그런 꿈의 데뷔탕트죠.”

마담 유리는 로제타에게 밀어 두었던 책 중 중간에 끼어 있는 디자인 북을 가져와 팔랑팔랑 책장을 넘겼다.

마치 몇 권, 어디에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망설임 없었다.

그 거침없는 손놀림에 이상하게도 로제타의 마음 안에서 그녀에 대한 신뢰가 상승했다.

“아, 여기 있군요.”

마담 유리는 로제타가 보기 편하도록 그녀의 쪽으로 책의 방향을 돌렸다.

“전 영애께 이런 디자인이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해요.”

로제타는 그녀가 내민 디자인을 눈여겨보았다.

둥근 어깨를 드러내는 오프숄더 스타일이었는데 팔 부분에 오간자 소재의 원단으로 피부가 살짝 비쳐 보였다.

로제타의 옆에서 함께 보던 레나가 미간을 좀 찌푸리며 자신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었다.

“하지만 너무 밋밋한 것 같은데요.”

“포인트야 얼마든지 줄 수 있지요.”

마담 유리가 콧노래를 부르며 함께 가져온 스케치북의 빈 페이지를 찾아 넘겼다.

그녀는 거침없이 하얀 종이 위에 디자인 북에 그려진 드레스와 똑같은 것을 뚝딱 그려 내었다.

“네크라인 부분에 금사로 수를 놓을 거예요.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이렇게 넝쿨 모양으로 얇은 레이스를 덧대는 거죠.”

마담 유리의 머릿속에는 이미 로제타에게 어울리는 세부 디자인이 존재하는 듯했다.

연필을 쥔 그녀의 손은 조금도 쉬지 않았고, 거침없이 디테일을 손봤다.

그녀의 손끝에서 레나의 말대로 자칫 밋밋할 수 있는 디자인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필을 길게 고쳐 잡더니 드레스 끝단 부분을 슥, 슥, 슥, 슥 덧칠하듯 매만졌다.

“치마 부분에 원단을 더 많이 사용하면, 이렇게…… 걸음을 옮기실 때마다 마치 물결이 치는 것처럼 자연 스러운 주름이 생기며 펄럭이게 되겠죠. 무척 우아해 보일 거예요.”

스케치를 마친 유리가 종이를 북 찢어 로제타에게 건네주었다.

첫눈에 보아도 화려함과 고풍스러움이 공존하는 드레스였다.

“어머. 진짜 같은 드레스가 맞나 싶을 정도인데요?”

“정말 예뻐요.”

레나의 말에 로제타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완성된 디자인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아마 실물을 받아보시면 더욱 마음에 드실 겁니다.”

마담 유리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 * *

테런은 요 며칠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하라는 일은 하지 않고 의자에 삐딱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손가락으로 깃펜을 돌리고 있었다.

멍한 눈빛과 달리 미간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으며, 목소리는 살짝 멍했다.

어렴풋이 어디선가 웃는 소리가 들려오자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이보게, 긱스. 나 아무래도 얹힌 것 같은 기분이 드네. 가슴께가 뻐근해.”

그 말에도 긱스는 심드렁했다.

이미 며칠 동안 귀에 인이 박이도록 지겹게 들은 말이라서 그런지 별다르게 걱정이 안 되었다.

처음 몇 번은 정말 걱정이 돼서 주치의를 부르기도 했으나, 테런의 강인한 신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니 결국, 저 가슴 답답함의 이유는 심리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 분명할 것이었다.

그리고 긱스는 그 이유에 대해서 짚이는 데가 분명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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