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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64화 (64/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64화

그랬기에 유능한 보좌관은 쓸모없는 걱정으로 시간을 버리는 대신 단칼에 그가 체했을 가능성을 부정해 주는 것으로 신의를 대신했다.

“드신 게 없기 때문에 얹힐 리가 없습니다.”

“난 왜 아무것도 안 먹었지?”

“입맛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나는 왜 입맛이 없을까…….”

하지만 긱스는 이번에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말꼬리 잡아먹는 문답을 계속해서 받아 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좌관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테런의 입술을 가르고 한숨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그 얼굴에서 그가 느끼고 있는 언짢음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테런이 느끼는 불쾌함의 이유는 다름 아닌 로제타의 사교댄스 교사 때문이었다.

그녀의 교사는 30대 초반의 돌아온 싱글로, 상당히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무척이나 언변이 화려한 남자였다.

며칠 전, 그가 처음으로 에스테스 하우스에 오던 날.

테런은 로제타를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1층의 파티 홀로 내려갔었다.

춤에 따라 동선이 다양하기에, 보다 넓은 곳에서 교습하라고 손수 내어 준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파티 홀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로제타가 수줍은 듯 웃으며 젊은 남성과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유리창 너머로 비쳤기 때문이었다.

뒤따라온 긱스가 우두커니 선 그에게 물었다.

「각하. 안 들어가 보십니까? 선생님께 인사하신다고 오신 거 아닙니까?」

창문을 녹여 버릴 듯 따가운 눈길로 안을 들여다보며, 테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긱스. 이게 대체 어찌 된 상황인 거지? 어째서 남자가 가르치고 있는 거야?」

무슨 그런 질문이 다 있냐는 듯, 제 상관을 이상하게 바라보던 긱스가 대답 대신 반문했다.

「예? 그럼 클리프 영애가 남성용 스텝을 배우실 필요가 있습니까?」

테런은 말문이 턱 막혔다.

자신이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다.

아무렴. 로제타가 배워야 할 스텝은 여성의 것이지.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자 교사와 나란히 서서 여성용 스텝을 배우면 되는 게 아닌가.

‘이건 뭔 궤변이지?’

스스로도 말이 안 되는 생각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라앉은 기분은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방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테런은 그날 파티 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에 서서 첫 수업을 훔쳐보았다.

인사를 하지 않으실 거면 집무실로 돌아가 일이나 하시라는 긱스의 재촉을 들을 때까지 말이다.

무엇 때문인지 테런은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런 그의 뒤를 따르던 긱스는 매우 불손하게도 ‘왜 저러는 거야.’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테런이 정신을 빼놓고 있는 일이 많았다.

긱스는 이제 익숙하다는 듯 테런을 상대하지 않고 그의 책상 위에 결재해야 할 서류를 올려 두었다.

“오전에 드린 건 다 하셨습니까?”

“응. 아, 그런데 이건 반려하지. 일정 다시 짜 오게. 나티스의 공사를 먼저 시작한다면 보급 물자의 운송 루트가 꼬이게 될 거야.”

“알겠습니다.”

긱스가 희한하다는 듯 테런을 봤다.

분명 온 정신이 다른데 팔려 있는데 귀신같이 일은 철두철미하게 하고 있었다.

미루는 법도 없이 진도가 착착 나가니까, 긱스의 입장에선 그가 집중은 하지 못해도 별다른 잔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깃펜은 놓고 이번에는 손톱 끝으로 정신 사납게 책상 위를 두드린 테런이 웬일로 자세를 바로 하고는 긱스를 바라보았다.

더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레나에게 뭐 좀 들은 거 없나?”

“뭘 말씀입니까?”

“로제타 양의 수업 진도 같은 것 말이야.”

“배움이 빠르시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테런의 미간이 잠시 찌푸려졌다.

“그러면 선생에게 조건을 좀 걸어 보게.”

“예?”

“계약한 날보다 이르게 로제타 양이 춤곡을 모두 외우면, 단축한 날수만큼 보너스를 주겠다고 말이야.”

긱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하면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제 상사가 하는 꼴불견스러운 행동을 더는 참아 주기 힘들어졌다.

“각하. 질투하는 남자는 보기 흉합니다. 그냥 가만히 계십시오.”

그 순간 테런의 피콕블루색 눈동자가 미끄러지듯 움직여 긱스를 바라보았다.

“누가, 뭐를 해?”

“질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내가? 질투를? 무슨 말도 안 되는.”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 내쫓아야 모양새가 좋을까, 고민하고 계신 바로 그 지점입니다.”

테런은 뭐라고 반박하려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질투는 모르겠지만, 사교댄스 교사를 쫓아내려고 벼르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로제타를 가르치는 선생이 젊은 남자라는 게 마뜩잖아 호시탐탐 교체할 이유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로제타가 선생을 무척이나 따라 끝끝내 그를 해고하지 못했다.

자신이 보기엔 그저 언사가 가벼운 것뿐인데, 로제타와 레나, 심지어 클라리사까지 그를 유쾌하다고 좋아했다.

요 며칠 날씨가 좋아 창문을 열어 놓으면 그와 세 여자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와 일하다가 마음이 저도 모르는 사이 불뚝해지기도 했다.

“긱스. 쓸데없는 말이는 것을 보면, 요새 한가한가 보군. 야근이 뜸해서 그런가 보지?”

긱스가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다 하냐는 듯이 기함하는 눈길로 제 주인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그런 억울하고, 서럽고, 화가 나는 농담을 다 하십니까?”

긱스는 진심으로 화가 나 보였다.

사람을 더 뽑으면 뭐 하나. 일은 여전히 많았다.

긱스는 한숨을 내쉬며 짧게 투덜거렸다.

그런 뒤 방금 전 테런의 책상 위에 내려놓은 서류철을 눈짓하며 말했다.

“오늘은 진짜 빨리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이거나 빨리 살펴봐 주십시오. 그래야 레나한테 가 같이 퇴근 하자고 말이나 붙여 볼 수 있죠.”

다행히도 테런은 순순히 서류를 제 앞으로 당겨와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런데 반쯤 보았을 그때, 그의 머릿속에 무엇인가가 불현듯이 떠올랐다.

테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또 왜 그러십니까?”

긱스는 본능적으로 그의 도주를 눈치채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또 어디에 가시려고요?”

테런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말하지 말게. 난 오늘 처음으로 일어나는 거야.”

“그럼 그냥 묻겠습니다. 어디에 가십니까.”

“중요한 것을 깜빡하고 있었어.”

“그게 무엇입니까?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테런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자네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이야.”

“하아. 각하…….”

긱스가 잔소리를 일발 장전하던 그때였다.

테런이 오른손 검지를 하나 쭉 펴고는 비장하게 딜을 걸어왔다.

“지금 내가 나가는 걸 막지 않는다면, 자네도 이만 퇴근해도 좋네.”

진지함이 물씬 묻은 목소리와 눈빛.

빠르게 제 상사의 얼굴을 훑어본 긱스는 몸을 한쪽으로 틀고는 도도하게 말했다.

“뭐 하고 계십니까? 어서 가시지 않고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긱스 라스크는 유능했으며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테런을 붙잡아 세워서 이유를 묻는 것보단 한시라도 빨리 그를 내보내고 자신도 퇴근하는 쪽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일 보세, 긱스.”

보좌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테런이 재킷을 한 손에 움켜쥐고는 바람 같이 집무실을 나섰다.

잠시 후, 긱스는 보기 드물게 콧노래를 부르며 실내의 불을 모두 소등한 뒤 문을 나섰다.

아내에게 가는 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 * *

“어머! 당신이 웬일이야?”

파티 홀로 찾아온 긱스를 보고 레나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바람에 문을 등지고 서 있던 로제타가 고개를 돌렸다.

긱스가 민망한 듯 웃으며 뒷머리를 살짝 긁으며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혹시 내가 방해한 건가?”

“그건 아니고. 오늘 교습은 마침 다 끝난 참이야. 선생님도 돌아가셨고.”

“다행이군.”

긱스가 안도하듯 웃으며 따뜻한 눈길로 제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의 등장에, 로제타는 서둘러 편한 신발로 갈아 신은 뒤 두 사람 쪽으로 다가갔다.

“긱스 경.”

“클리프 영애.”

눈이 마주치자, 로제타는 긱스를 향해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했고, 긱스는 그녀를 향해 절도 있게 묵례하며 인사를 대신했다.

로제타는 긱스의 등 뒤를 눈으로 살폈다.

의식해서 한 행동은 아니고,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렇게 움직인 일이었다.

출입문 쪽을 힐끔거리는 그녀의 행동을 눈치챈 긱스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각하께선 함께 오지 않으셨습니다.”

“네? 아, 네에……. 그렇군요.”

왠지 속마음을 들킨 것 같다는 생각에 로제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려트리며 옆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걷어 귀 뒤로 넘겼다.

민망한 기분을 어떻게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다.

한참 만에야 로제타가 부드럽게 입술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같은 저택에 사는데도 얼굴 뵙기가 힘드네요.”

그녀의 말에 레나가 맞장구를 쳤다.

“같은 집에 사는 저도 이 사람 얼굴 자주 못 보는걸요, 뭘.”

제 아내의 투정에 긱스의 얼굴에 미안한 빛이 스쳤다.

그라고 왜 일찍 퇴근해 가정에 시간을 쏟고 싶지 않겠는가.

“그래도 야근 수당 쏠쏠하게 벌어 오니까요.”

“당신은 정말 나보다 돈이 좋아?”

“돈 없이 궁핍하면 천년의 사랑도 식는 법이야, 여보.”

그러니까 열심히 벌어 와.

레나가 제 남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그 자리를 귀엽다는 듯 손가락으로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다복해 보이는 부부의 모습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던 로제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어요? 말씀을 편하게 하시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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