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66화
“컹!”
어디선가 토토가 큰 소리로 짖으며 달려왔다.
순식간에 도착한 개는 로제타의 앞에 엉덩이를 착 붙이고 앉아 바쁘게 꼬리를 흔들었다.
“어머. 토토.”
로제타의 얼굴이 반가움으로 물들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니? 건강해 보이긴 하는데.”
함께 올라온 토토는 에스테스 하우스에서 풀어 놓고 지내고 있었다.
워낙 영리한 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로제타가 손을 뻗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자, 기분이 좋았는지 토토가 또 한 번 목청껏 짖었다.
“컹컹!”
제법 우렁찬 그 소리에 로제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서둘러 제 입술 위로 검지를 세웠다.
“쉿!”
으슥한 밤이었고, 불 꺼진 창도 많았다.
토토의 소리로 누군가 나와 보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조금 곤란해질 것 같았다.
그에 편안한 차림새도 한몫했다.
토토는 무척 영리한 개였기에 그녀의 의중을 곧바로 알아챘다.
개는 짖는 대신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원래 그녀가 가려던 길 방향으로 훌쩍 달려 나갔다.
그러다 멈춰서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빨리 따라오지 않느냐는 것처럼.
“네가 호위해 주겠다는 거니?”
로제타가 반짝이는 별 같은 잔웃음을 터트리다가 한 박자 늦게 토토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계속해서 미뉴에트 곡조를 흥얼거렸다.
그녀는 많은 곡을 알지 못했다.
홍장미로 살 적에도, 그리고 클리프 남작가에 살 때도 그런 사치가 허용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뉴에트는 그녀가 아는 유일한 멜로디였지만, 이상하게 질리지가 않았다.
그렇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제보에 도착한 그녀는 가지고 온 것들을 나란히 내려놓았다.
“자. 이건 토토 몫.”
그녀는 가장 먼저 브리 치즈를 반으로 갈라 토토에게 내밀었다.
많이는 못 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지, 토토는 한 입 거리인 치즈 덩어리를 홀랑 삼키지 않았다.
이빨로 살금 물어 바닥에 내려놓은 뒤, 토토는 혀로 조금씩 치즈를 핥아먹기 시작했다.
“넌 참 특이한 개야.”
로제타가 웃으며 바라보다가 와인병으로 손을 뻗었다.
코르크 마개를 따자 향긋한 포도주의 냄새가 코끝으로 밀려 들어왔다.
병을 기울이자, 검붉은 빛의 액체가 넘실거리며 빈잔을 채웠다.
“오늘의 성공을 위해, 축배!”
작은 목소리로 자축한 그녀가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달큼한 맛이 가득 퍼지다가 이내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으, 좋다.”
그때 잎사귀들이 바람에 스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를 안주 삼아, 그녀는 한 모금, 두 모금…… 계속해서 홀짝였다.
그러다 보니 로제타는 어느새 세 잔을 연속으로 비운 상태였고, 이제 와인병엔 딱 한 잔만큼의 양밖에 남지 않았다.
“오늘은 아쉬움의 날이네.”
로제타가 섭섭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병 안에 남은 마지막 술을 모조리 잔으로 옮겨 따랐다.
“이것만 마시면 들어가야겠다.”
하지만 말과 달리, 그녀는 단숨에 잔을 비우지 않았다.
마시는 것을 잠시 쉬고 있기 때문일까?
그사이 조금씩 알딸딸해지며 취기가 올라왔다.
로제타는 손에 꼭 쥐고 있던 와인 잔을 눈앞까지 들어 올렸다.
초점이 살짝 맞지 않는 눈으로 남은 술을 바라보던 그녀는 와인 잔의 다리를 잡고 빙글빙글 가볍게 돌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주량이 그렇게 세지는 않나 보구나.”
어느새 혀가 꼬여 있었다.
그런 자신의 발음이 조금 웃겨, 로제타는 피식 웃어 버렸다.
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양손으로 의자의 끄트머리를 짚었다.
바람이 기분 좋았으나 몸이 자꾸 휘청거렸다.
그녀가 중심을 잡으려고 황급히 상체를 숙였을 때였다.
자신의 그림자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덮듯이 밀려 올라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여기서 뭐 하고 있습니까?”
“어?”
정수리 위로 내려앉는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에, 로제타의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가 뜨였다.
로제타는 다시 몸을 들어 올리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상대를 알아본 그녀의 두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공작님이다아.”
테런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들어오시느은, 거예요?”
“네. 잠깐 볼일이 있어서.”
테런은 짧게 대답하며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느릿한 말투와 묘하게 경계심 없는 태도.
로제타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곧 그녀의 옆에 놓인 빈 와인 병과 술잔이 확인했다.
그가 가볍게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술 마셨어요?”
“네에!”
그녀는 씩씩하게 대답하고는 뭐가 그리 웃긴지 까르르 웃음까지 터트렸다.
그런 로제타의 모습에, 테런은 그만 무장 해제되어 미간을 풀고 따라 웃어 버리고 말았다.
“말투가 클라리사 같군요.”
“그런, 가요?”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으며 로제타가 웃었다.
그 순간, 의자를 짚으며 몸을 지탱하고 있던 팔에 힘이 빠진 듯 꺾였다.
“꺅!”
로제타의 몸이 중심을 잃고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넘어지지 않은 것은 순전히 테런 덕분이었다.
“조심해요.”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온 테런이 서둘러 로제타의 어깨를 단단히 잡으며 몸을 지탱했다.
그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로제타의 바로 앞에 천천히 무릎을 굽히며 앉았다.
“술은 왜 마셨습니까?”
“기분이가, 좋아서요? 자축 중이었어요.”
“취하면 묘한 어법을 사용하는군요.”
“취하진, 않았어요.”
“그래요. 알았어요. 기분 좋은 이유나 말해 줘요. 같이 축하해 주고 싶으니까.”
“음, 그게요.”
로제타가 배시시 웃었다.
술 때문인지,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런 건지 그녀의 양 볼이 조금 발매
잠시 시간을 끌던 로제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흥분에 젖어 있었다.
“오늘 처음으로…… 선생님 발을 한 번도 밟지 않고 끝까지 췄어요.”
“아.”
테런은 로제타가 춤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뉴에트는 비교적 배우기 쉬운 춤 곡이죠.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정말 빨리 배운 것 같습니다.”
재능이 있다는 테런의 칭찬에 로제타는 기분이 좋아져 웃음을 터트렸다.
테런은 공기를 가벼이 울리는 그녀의 그 청아한 웃음소리가 듣기 좋아 잠시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말을 고르더니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이제 왈츠만 익히면 완벽하겠군요.”
“왈츠요?”
테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우리 둘이 출 일이 많을 테니까요.”
로제타의 얼굴에 걱정의 빛이 살짝 어렸다.
“그치만…… 전 미뉴에트밖에 못 배웠는걸요?”
테런은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나한테 배워 보겠습니까?”
“……네?”
“생각보다 내가 좋은 선생일 수 있잖아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테런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한 발자국 뒤로 몸을 물린 그는, 춤을 청하듯 로제타에게 손을 내밀며 허리를 굽혔다.
“한곡, 부탁드리겠습니다. 로제타 양.”
그 모습을 조금 멍한 기분으로 바라보던 로제타는 마치 달빛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천천히 제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 제 손끝이 닿자, 그 순간 찌릿한 무엇인가가 가슴께로 흘러 들어와 심장을 꽉 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손을, 처음 잡는 것도 아닌데 이상했다.
“조심히 일어나요.”
테런은 기다렸다는 듯이 로제타의 손끝을 감싸 쥐고 일으켰다.
“제가 공작님의 발을 밟으면 어떡하죠?”
“당신에게라면 얼마든지 내어 줄 수 있어요.”
“그 말, 후회하실 거예요.”
“도대체 얼마나 밟으려고요.”
살살해 줘요.
테런이 가볍게 말하며, 오른팔을 뻗어 로제타의 허리를 잡고는 살짝 제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순간 그녀의 몸에 힘이 실리고,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전…… 왈츠의 곡은 몰라요.”
“걱정 말아요. 방법이 다 있으니.”
테런이 잠시 숨을 골랐다.
잠시 후, 로제타의 귀에 낮은 목소리가 귓바퀴를 따라 감기듯 들려왔다.
음.
낮은 목소리로 허밍이 시작되었다.
음, 음음.
쑥스러움을 참 공기를 울리는 그 목소리에 로제타의 심장이 떨렸다.
남자의 목소리가 이토록 매력적일 수 있는 걸까.
귓바퀴를 따라 감도는 것 같은 그의 목소리에 로제타는 숨 쉬는 것을 잠시 잊었다.
왈츠는 미뉴에트와는 전혀 다른 춤이었다.
옆에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서 간간이 대화도 나누고 웃었던 것과 달리, 왈츠는 오롯이 상대에게만 집중하는 춤이었다.
그녀가 한 발 옮기면, 뒤따르듯 그의 발이 빈자리를 채우듯 메운다.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그 모든 동작에 잠시의 틈도 없었다.
테런에게서도 더 이상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로제타는 조금씩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정신이 갈수록 말짱해지는 데 비해 이상하게도 머리에 몰린 열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계속해서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임에도 박자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맞닿은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 때문이었다.
그에게 잡힌 허리, 그의 단단한 팔뚝 위에 올려진 제 팔.
닿아 있는 모든 곳에서 크게 맥박이 뛰는 것 같았다.
자신의 것일까?
아니면 이 남자의 것일까.
자신의 허리를 감은 그의 팔과 손에 힘이 실려 있었다. 언제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 제 쪽으로 끌어 당길 수 있다는 것처럼.
그 힘이 로제타를 긴장하게 했다.
테런이 내쉬는 숨이 그녀의 이마에 닿아 살갗을 간지럽혔다.
그녀가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차마, 얼굴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고 테런과 시선을 마주치게 된다면, 자신의 감정이 급류에 휩쓸릴 것만 같았다.
마치, 이 밤에 사로잡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