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67화
“……여기까지.”
춤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듯, 테런이 그녀를 놓아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로제타 역시 참았던 숨을 터트리듯 길게 내쉬며 살짝 몸을 빼었다.
그제야 용기를 내 고개를 들어 올려 테런을 마주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숨을 멈췄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어린 감정은 다양했다.
열망 같기도.
아니, 슬픔 같기도.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어쩌면 둘 다 아닐 수도.
그에 관해선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함부로 이름 지을 수 없는 어떠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로제타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마음이, 신경이, 어느 순간부터 온전히 그에게 가닿아 있다는 것을.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만큼, 그녀는 말을 아끼게 되었다.
그때, 다행스럽게도 테런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한 번도, 제 발을 밟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말을 긍정하듯 로제타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고개를 푹 아래로 떨어트렸다.
“정말 훌륭한 춤 선생님이시네요.”
“제자의 실력이 훌륭해서 그런 거죠.”
그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완벽하니, 미스터 그로만의 교습은 더 듣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3분의 2쯤 진심이 섞인 말이었으나, 로제타는 그저 가벼운 농담을 들었다는 듯 살짝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다가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 냈다.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그전에 잠깐만요.”
테런은 자신을 지나쳐 가려는 로제타를 다급하게 멈춰 세웠다.
“잠깐만 더, 시간을 내줘요.”
로제타는 그에게 잡힌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테런은 결코 강압적이지 않았다.
그녀가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금방 풀려날 수 있을 정도로 대는 듯 마는 듯 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녀 역시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그의 손을 털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로제타가 그를 밀어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자, 테런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목을 조금 더 힘을 주어 잡았다.
그 순간, 로제타는 왠지 모를 안정감이 들었다.
그는 로제타를 다시 가제보의 벤치에 앉혔다.
그런 뒤, 자신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공작님?”
테런은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작은 상자였다.
떨리는지 짧게 숨을 들이켠 그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순간, 로제타의 초록빛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세상에…….”
그녀는 두 손을 포개어 벌어진 제 입을 감추었다.
새끼손톱만 한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반지가, 달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테런은 조심스럽게 반지를 꺼내고는 상자를 잠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런 뒤, 빈손을 뻗어 여전히 입을 가리고 있는 그녀의 왼손을 가만히 잡아 제 쪽으로 끌어 내렸다.
“준비가 너무 늦었습니다.”
테런이 그녀의 손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로제타의 약지와 소지가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지지할 데를 잃은 손가락은 허공에서 어색하게 잠시 움찔했다.
분명 제 몸인데, 그 부위만 제 것이 아닌 듯 어색하게 느껴졌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로제타가 잠시 시간 차를 두고 고개를 끄덕이자, 테런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지를 그녀의 약지에 밀어 넣었다.
어디 한 군데 걸리는 곳 없는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반지는 가장 안쪽의 살까지 밀려오고 나서야 멈췄다.
거짓말처럼 꼭 맞는 사이즈에, 로제타는 신기하다는 듯 반지가 끼워진 제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두근. 기분 좋은 울림이 느껴졌다.
그녀 못지않게 그 반지 낀 손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테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결혼을 결심해 줘서 고마워요.”
그가 앉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로제타와 시선을 마주쳤다.
“언제, 어느 순간이든 당신을 존중하겠습니다.”
그의 입에서 ‘존중’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오자, 로제타는 가슴이 따끔했다.
계약 결혼을 제안받았던 날, 그에게서 들었던 말이 불현듯 떠오른 까닭이다.
「평생 영애를 부인으로서 존중하며 살겠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존중하겠다고 말한다.
변한 것은 자신이었다.
처음 테런에게서 계약 결혼을 제안 받았을 때와 지금의 제 마음은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어떡해.’
로제타는 울고 싶어졌다.
그가 내보인 친절과 배려를 먹이 삼아, 어느샌가 무럭무럭 자란 욕심이 이제 더 큰 것을 바라기 시작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로제타는 손가락을 끝에서부터 말아 쥐었다.
‘욕심나요, 당신이.’
차마 입 밖으로 뱉을 수 없는 말을, 그녀는 꼭꼭 눌러 삼켰다.
멀어지는 테런의 손이, 아쉬웠다.
* * *
테런은 어딘가 좀 멍했다.
“또 클리프 영애에 대한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긱스는 영 집중하지 못하는 제 상관에게 일침 비슷한 말을 던졌다.
“무슨…….”
테런은 별 실없는 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 굴다가도 말끝을 흐렸다.
사실 긱스가 정확히 봤다.
그녀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 줄 때 로제타가 지었던 표정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녀는 마치 감정을 삼키는 것만 같았다.
툭, 하고 흘려 버릴 눈물을 참듯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기도 했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은 거지.’
그 표정에 대한 이유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기에, 그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로제타가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렇게 가슴이 답답해진 테런이 재차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바깥에서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집무실에 로제타가 찾아왔다.
“잠시 괜찮으세요?”
그녀의 방문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듯, 테런이 당황한 얼굴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쩐 일로…….”
방금 전까지 그녀에 대한 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그런데 그 당사자가 이렇게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니 테런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좀처럼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긱스가 그런 제 상관의 반응을 유의 깊게 바라보았다.
말문이 막히기라도 한 듯 계속해서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 모습에, 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대신해서 로제타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클리프 영애. 들어오셔도 괜찮습니다.”
그제야 로제타가 안심했다는 얼굴로 살포시 미소 지으며 집무실 문을 조금 더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외출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두 분 모두 편안한 오후예요. 혹 제가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무슨 그런 말씀을요. 이 틈에 저도 각하도 쉴 수 있고 좋죠. 그런데 어떤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아…… 다름이 아니라요.”
로제타가 쑥스러운 듯 웃다가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마차를 좀 쓸 수 있을까요?”
그제야 테런이 숨을 고른 뒤 질문을 건넸다.
“외출하실 계획입니까?”
그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을 좀 살까 싶어요.”
“필요한 걸 말씀하시면 와튼이 구해다 드릴 텐데요.”
“그렇긴 하겠지만, 이 핑계 삼아 수도 구경을 좀 하고 싶어서 그래요.”
테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서둘러 말을 붙였다.
“그럼 같이 가시죠.”
바람같이 고개를 돌려 저를 노려보는 긱스의 시선은 당연히 무시한 채였다.
긱스는 들으라는 듯 한숨을 푹 내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씀 나누십시오. 전 일단 내려가서 마차를 준비시키겠습니다.”
긱스가 조용히 집무실 문을 닫고 나가자, 테런은 곧바로 방금 전 자신이 한 말을 정정했다.
“아. 아니, 그러지 말고.”
그는 조금 정신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냥 밖에서 만납시다.”
“……네?”
언제나 침착하고 여유 넘치던 테런이 오늘따라 이상했다.
그런 그의 분위기를 닮듯, 저 역시도 덩달아 정신없어지는 기분이었다.
“밖에서요? 아, 혹시 공작님도 볼일이 있으신 건가요?”
그런 건 딱히 아니었지만…….
무심코 그렇게 대답하려던 테런은 서둘러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런 뒤엔 대충 넘어가고자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타는 테런이 왜 그런 제의를 했는지 이해했다는 듯 웃으며 ‘아.’ 하고 짧은 추임새를 넣었다.
그러다 그녀가 미안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오늘 외출은 클라리사와 함께 나가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용무를 보고자 해서거든요.”
테런이 클라리사와 함께 외출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한 로제타가 정정하여 말했다.
‘바쁘실 텐데 굳이 시간을 내지 않으셔도 괜찮다.’고 말하며, 그녀는 미안한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그런 로제타와 달리 테런의 표정은 조금 더 밝아졌다.
자신도 모르게 그럼 더 잘되었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돌이켜 보면 로제타와 자신의 사이에는 언제나 동생이 끼어 있었다.
로제타가 클라리사의 간병인으로 먼저 일을 시작했기에,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테런은 어느 순간부터 그게 아쉬워졌다.
로제타와 나누는 대화가 조금 더 다채로워진다면, 그때는 또 어떤 기분이 들까 궁금해졌다.
클라리사의 관심사, 클라리사의 건강, 클라리사가 어떻게 하루를 지냈는지…….
그렇게 제 동생과 관련된 주제가 아니더라도 로제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녀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수업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그렇게 사소한 것들을 알게 되고, 비교하다 보면…… 그때는 두 여자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비로소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