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68화
테런은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계속해서 로제타에게 품은 제 관심에 이유를 만들어 붙이고 있었다.
그래야지만 이런 자신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다는 듯.
테런이 짧게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골랐다.
“방금 제가 한 말은…… 클라리사를 두고, 밖에서…….”
하지만 로제타는 그의 말뜻을 오해했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제가이었다.
“정 그러시면 클라리사도 불러 외출 준비를 시킬게요. 지금 토토랑 산책을 나갔는데 그리 멀리 가진 않았을 거예요.”
사실 내색하지 않았을 뿐, 로제타의 기분은 살짝 가라앉아 있었다.
테런이 제게 하는 말과 행동을 오해하지 말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와의 관계는 계약이었고, 클라리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자신 쪽에서 먼저 내민 조건이기도 했기에 차마 누굴 원망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짧은 인사말을 남긴 채 그녀가 뒤돌아섰을 때였다.
“아뇨. 잠깐만.”
막 돌아서 나가려는 로제타를, 테런이 서둘러 불러 세웠다.
“그러지 마십시오, 로제타 양.”
“네? 하지만…….”
그는 지금의 상황이, 아니, 평소답지 않게 머저리같이 말하고 있는 지금의 자신이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 난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그런 뒤 힘겹게 쥐어짜 내듯 말을 뱉었다.
“아무래도 제 설명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로제타 양. 다시 말씀드리자면…… 전 오늘 당신과만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네?”
그가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그러니 둘이서만 만나요. 밖에서.”
“하지만 그건 계약 위반일 텐데요?”
그녀의 반문에 테런의 미간이 곤란함으로 좁아졌다.
“하지만 공작님께서 괜찮다고 하시니.”
살짝 말꼬리를 늘이며 시간을 끌던 로제타가 이내 곱게 눈을 접어 웃었다.
“저도 좋아요.”
그녀가 긍정적인 말을 돌려주기 무섭게 테런의 얼굴이 다시 반듯해졌다.
“하지만 클라리사가 알게 된다면 조금 서운해할 수도 있겠는데요?”
“평소에 꼭 붙어서 당신을 독차지하고 있는데, 하루쯤은 그 아이도 양보해야죠.”
테런에게로 향하는 로제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서다.
평소엔 그토록 우애가 좋은데, 이상하게도 최근 남매 사이가 냉해졌다.
에스테스 파크에서 테런과의 결혼 사실을 클라리사에게 알렸을 때부터였다.
대체론 괜찮은데 주로 자신이 끼면 슬쩍 서로를 까대는 것이, 마치 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가 별 뜻 없이 내뱉는 말에 로제타는 자꾸만 의미를 부여했고, 무심코 기대하기도 했다.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긱스가 올려 보낸 시종이었다.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알겠네. 곧 내려가지.”
테런이 고개를 끄덕인 뒤 외투를 챙겼다.
그런 뒤 먼저 걸음을 옮겨 시종 대신 집무실의 문을 잡고 섰다.
“가시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제타가 걸음을 움직였다.
테런과의 첫 외출에 떨리는 마음은 잘 감춘 채였다.
* * *
두 사람은 같은 마차에 올랐다.
긱스가 마차 문을 닫기 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각하.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오십시오.”
그 말에 테런은 얼굴을 찌푸렸고, 로제타는 조용히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가 내 모친이라도 되나?”
잔잔하던 긱스의 얼굴에 경악이 퍼져 나갔다.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다 하십니까?”
“자네가 먼저 날 여덟 살 먹은 말썽쟁이 소년 취급을 했기에 하는 말이야. 내 어머니께서도 내게 귀가 시간을 정해 주시지 않았어.”
“귀가 시간을 정해 드리지 않으면, 또 늦게 오셔서 저를 일 구렁텅이로 빠트리시니 그런 것 아닙니까!”
두 사람의 설전이 길어질 것 같은 낌새가 보이자, 서둘러 로제타가 끼어들었다.
“제가 약속할게요. 긱스 경. 해 질 녘까진 꼭 공작님을 모시고 오겠어요.”
긱스가 한결 안심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클리프 영애만 믿겠습니다.”
긱스가 문을 닫자 곧 마차가 부드럽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즉시, 두 사람의 사이가 어색해졌다.
의자의 간격은 넓었으나, 문을 닫으면 밀실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 밀폐된 공간에 단둘만 남게 되자 로제타는 절로 긴장이 되었다.
태연한 척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자꾸만 의식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적절한 대화 주제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그때, 다행히도 테런이 먼저 말을 건네주었다.
덕분에 대답이 제법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제가 방해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오늘 외출에 동행하는 것 말입니다.”
“아! 그럴 리가요.”
로제타가 입꼬리를 당겼다.
“오히려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테런이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인 줄은 미처 몰랐군요. 혹시 괜찮다면 어떤 용건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게요.”
로제타가 쑥스러운 듯이 웃다가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미스터 그로만에게 드릴 선물을 준비하러 나왔어요.”
“그로만이라면…… 사교댄스 선생님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테런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갑자기 그에게 선물은 왜 하시는 건지.”
“미뉴에트를 잘 가르쳐 주셨으니까요. 덕분에 빠르게 배우기도 했고요.”
“그건 당신의 습득력이 월등히 좋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만.”
테런이 어딘가 심통이 난 듯한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대꾸했음에도 로제타는 그가 자신을 칭찬해 준 것이 기뻐 배시시 웃었다.
“레나에게서 미스터 그로만을 어렵게 모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 수업을 맡기 위해, 그가 기존에 잡혀 있던 수업 일정도 모두 조정해 주는 수고를 하셨다는 것도요.”
물론 그 고생에 대해서는 에스테스 공작가에서 충분함을 넘어선 수업료로 사례를 할 것이다.
하지만 로제타는 자신도 조금이나마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미스터 그로만으로부터 사교댄스뿐만이 아니라 귀부인들의 대화법이라든가, 사교계의 파벌과 알력 싸움 등, 앞으로 그녀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정보들을 조금씩이라도 배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실 고민이 좀 됐었어요. 미스터 그로만은 수도에서 손꼽히는 선생님이시고, 그래서 귀부인들과 영애들에게 보답으로 받은 선물도 많았으리라 생각하거든요.”
로제타의 말투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테런은 그저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부끄럽지만 제가 안목이 부족해서요. 그래서…… 아무래도 공작님께서 좀 도와주시면 어떨까 싶어요. 그렇게 된다면 선물을 받게 될 미스터 그로만도 분명 만족하실 거구요.”
“그렇게 된 사정이었군요.”
테런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손을 보태야지요.”
“정말이신가요?”
“그럼요. 도움이 될 수 있다니 큰 기쁨입니다.”
속내는 새까맣게 숨긴 채였다.
“그렇다면 혹시 생각해 둔 물건은 있습니까?”
로제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춤을 출 때마다 생각한 건데, 미스터 그로만이 향수를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종류를 선물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테런이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
로제타가 고른 향수를 다른 남자가 주야장천 뿌리고 다니는 걸 아주 잠깐 상상했을 뿐인데도 속이 은근히 끓는 기분이었다.
그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로제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별로일까요? 그동안 사용하신 향을 떠올려 보면 묵직한 향을 선호하시는 것 같았거든요.”
그 순간, 테런의 비상한 머리는 이런 데서 아주 쓸모 있는 변명들을 마구 만들어 냈다.
“깊이 고민하신 것 같아 의사를 전하기가 좀 조심스럽습니다만, 아무래도 향수는 좀 적절치 못한 것 같습니다”
“어머. 정말요?”
토끼처럼 동그란 눈으로 되묻는 그녀의 얼굴에 테런은 마음이 살짝 뜨끔하였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라 모른 체했다.
테런은 얼굴에 철판을 깐 뒤, 그녀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향수라는 게 본디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애물단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준 사람은 서운해할 테고, 받은 사람은 곤혹스러울 테고요.”
“확실히 그렇겠네요. 맞는 말씀이세요.”
로제타가 턱 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잡은 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공작님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요.”
다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무한한 신뢰가 어려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뭘 사야 좋을까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테런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생각해 두신 차순위 후보가 없다면 제가 자주 들르는 곳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남성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한군데 모아 둔 곳이라 이것저것 구경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어머. 그런 곳이 있나요?”
로제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테런이 제 등 뒤로 난 마부석으로 통하는 작은 창을 두드렸다.
마부가 뒤돌아보자 테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크라이슨 상회로 가 주게.”
“예, 주인님.”
말 머리의 방향을 튼 모양인지 잠시 후 마차가 좌측으로 돌았다.
* * *
커다란 2층짜리 건물은 제 색깔이 확실했다.
남성의 연미복을 상징하기라도 한 것처럼, 건물의 외관은 검은색과 흰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런 곳도 있군요.”
마차에서 내린 로제타가 신기하다는 듯 두리번거렸다.
“귀족들은 대부분 저택으로 사람을 불러 구매하는 줄 알았어요.”
“보통은 그렇죠.”
테런은 쉽게 그녀의 말을 수긍했다.
귀족 대다수가 자신의 편의를 위하여, 상대의 불편을 좌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매장도 꽤 그럴듯하게 꾸며 놓아야 실제 매출로 이어지는 편입니다. 자신이 구매할 물건을 창고에서 가지고 왔다고 하면, 아무도 사지 않으려고 들 테니까요.”
테런의 설명이 제법 그럴듯하게 들려 설득되었다.
당장 자신이 가깝게 보고 자란 클리프 남작가의 일원들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집의 살림은 애초에 곤궁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지만, 남들에게 그 사실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매장에 가 구매하는 것보다 출장의 비용이 더 비쌈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을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있어 보이는 것.
꽤 많은 귀족이 소비의 기준과 가치를 그 부분에 두었다.
자신이 사용하는 물건을 만드는 이가 평민이라 할지라도, 무엇인가 가치가 하나 더해져야 구매를 한다.
이를테면 평민이 만들었지만, 수도에서 제일가는 고급 부티크에서 판매하는 물건, 이런 식으로.
테런은 짤막하게 크라이슨 상회에 대한 설명을 마쳤다.
“구매자의 편의를 위해 다양한 제품들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이 가게, 저 가게 굳이 돌아다니지 않게 말이죠.”
“실용적인 공간이네요.”
로제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테런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하지만 얼마 걷지 않아 테런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냐는 듯 로제타가 옆을 돌아보자 그가 작게 속삭였다.
“이곳의 주인은 할머님과도 안면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대부터, 이용한 곳이거든요.”
말인즉, 이곳에서 두 사람이 어색한 행동을 보이면 카밀라의 귀에 흘러들어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