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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69화 (69/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69화

그가 하고자 한 말의 뜻을 알아들은 로제타는 아주 조금,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그에게 팔짱을 꼈다.

테런은 그녀의 손을 힐끗 바라보았으나, 더는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출입구에 다다르자, 안에 서 있던 종업원 두 명이 양쪽으로 문을 열어 주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곧 매장 안쪽에서 이 가게의 주인으로 보이는 노년의 남성이 다가왔다.

카밀라의 또래로 보이는 연배였다.

그는 테런을 향해 깍듯하게 허리를 굽히며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각하.”

“잘 있었나, 크라이슨?”

“저희야 언제나 공작님 덕분에 근근이 버티고 있지요.”

“겸손은.”

두 남자가 간단하게 안부를 주고받았다.

크라이슨 상회의 주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사무적인 미소를 띠며 로제타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쪽의 레이디께서는……?”

주인의 질문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테런이 왼팔을 뻗어 그녀의 옆구리를 살짝 안았다.

그런 뒤 슬며시 제 쪽으로 당겼다.

크라이슨의 눈동자에 놀람의 빛이 어렸다.

한편 그의 힘에 반걸음 옆으로 몸을 옮기게 된 로제타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숨을 들이마셨다.

고작 반걸음.

짧은 거리일 뿐인데, 어째서 실제보다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드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테런이 로제타 쪽으로 살짝 고개를 틀었다.

마치 그녀에게 귓속말하듯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댄 그가 작게 속삭였다.

“웃어요.”

그가 내쉬는 바람결이 로제타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로제타는 귀가 한껏 예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테런이 로제타의 관자놀이에 사랑스럽다는 듯 입을 맞춘 모습으로 보일 터였다.

로제타에게 작은 속삭임을 건넨 뒤, 테런이 다시 고개를 돌려 상회 주인을 향해 대답했다.

“내 약혼녀일세.”

나직한 목소리였음에도 그 말이 지닌 파급력은 셌다.

실내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동시에 두 사람에게로 쏟아졌다.

그 시선들이 조금 부담스러워, 로제타는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는 입꼬리에 경련이 이는 것만 같았다.

“아……!”

주인은 나직한 탄성을 터트리며 그제야 알은체를 했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소문이 자자한 그 레이디시로군요.”

장사하는 사람답게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한 주인이 로제타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크라이슨 상회의 주인인 폴 크라이슨이라고 합니다.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레이디.”

“감사해요. 로제타 클리프라고 해요.”

카밀라의 지인이라는 생각에 자꾸만 긴장이 되었다.

로제타는 혹시라도 자신의 웃음이 어색해 보이진 않을까 걱정을 하며 크라이슨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그는 수십 년 동안 귀족들을 상대로 장사해 온 노회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사업이 번창하고 성업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성격이 철두철미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건지 파악하기 힘들어.’

크라이슨은 예의 그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테런과 로제타에게 조금 더 안쪽으로 향하는 길을 가리켰다.

귀족을 상대로 영업하는 모든 가게엔 이렇게 내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선 개별실로 자리를 옮기시지요. 앉아서 차를 들고 계시면 카탈로그와 함께 필요하신 물건들을 선보이겠습니다.”

“그러지.”

테런이 크라이슨을 따라 한 걸음 내디디려 할 때였다.

“아아…….”

쇼룸에 들릴 듯 말 듯 한 아쉬움의 탄식이 낮게 깔렸다.

같은 공간에 있던 다른 귀족들이었다.

그때 로제타가 테런의 소매를 가볍게 잡아당겼다.

그 작은 신호를 무시하지 않고, 테런은 다정스레 눈을 맞춰 왔다.

“왜 그래요?”

로제타가 아쉬운 티를 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괜찮다면 직접 둘러볼 수 있을까요?”

하지만 곧바로 긍정적인 대답이 들리진 않았다.

테런 같은 고위 귀족인 경우, 가게에 직접 찾아온다고 한들 다른 사람들처럼 매장을 둘러보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그가 원하는 물건이 눈앞까지 배달되어 오기 때문이다.

현대의 프라이빗 쇼퍼룸 같은 시스템이었다.

물론 귀족이라고 해서 크라이슨 상회에 찾아오는 고객 모두가 개인실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작위가 낮은 귀족들은 쇼룸에서 직접 물건을 보고 구매한다.

그런데 만약 자신과 같은 공간에 에스테스 공작 같은 유력한 인사가 함께 있다면?

우선 그들은 가만히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눈치를 보며 인사를 건넬 것이다.

그런 뒤 친분을 쌓기 위해 슬그머니 말을 붙여 오리라.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었다.

테런 같은 거물은 그들의 입장에선 쉽게 만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렇다 보니 그들은 우연히 마주친 테런을 쉽게 놓치려 하지 않았고,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기 일쑤였다.

그런 일은 테런의 쇼핑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의 하루 일정도 어그러트리는 데 일조했다.

그렇기에 크라이슨은 테런 같은 거물급 인사는 되도록 고급스럽게 꾸민 내실로 곧장 인도했다.

가게 입장에서도 고위 귀족을 놓치면 매출에 손해가 극심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로제타는 기저의 상황을 알지 못했기에 그렇게 물었던 것이었다.

크라이슨이 곤란한 미소를 입가에 지으며 로제타를 설득하려고 막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테런이 손을 들어 그를 조용히 만류했다.

“피곤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실내를 돌아보는 것뿐인데요, 뭘. 무엇이 있는지 다양하게 둘러보고 싶어요.”

“그렇군요.”

로제타의 대답에 테런은 재고의 여지가 없다는 듯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죠.”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결정이 끝났다.

테런은 크라이슨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말했다.

“크라이슨. 오늘 치 매상은 우리 쪽에서 결제하도록 하지.”

뒤에 생략된 말은 이곳을 대절할 테니 다른 손님들은 내보내라는 것이었다.

크라이슨은 곧장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이번 일로 가게 안에 있던 고객이 크라이슨 상회와의 거래를 끊을 수도 있었지만, 에스테스 공작가와의 인연이 더욱더 중요한 그는 자신이 감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크라이슨이 심란한 속을 감추고 대답하려던 때였다.

“예, 알겠습니…….”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제타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뇨. 그렇게 하지 마시고.”

두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모였다.

살짝 목을 가다듬은 뒤, 로제타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저분들을 개별실로 안내해 드리면 어떨까요?”

크라이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제타가 제시한 방법이 실로 그럴 듯했기 때문이다.

“그편이 낫지 않을까요? 우리도, 저분들도, 그리고 주인장에게도 말이에요.”

로제타의 제안에 크라이슨은 내심 놀랐다.

세 그룹 중 어느 누구도 마음 상할 일이 없는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 안에서 로제타에 대한 평가가 조금 더 높아진 모양인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 놀람이 어려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로제타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어렵게 갈 필욘 없잖아.’

전생에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던 경험이 이런 데서 드러나는 것 같았다.

상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굳이 고객과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물론, 이곳의 주인장이 괜찮다고 한다면 말이에요. 어디까지나 제안일 뿐이랍니다.”

차분한 그녀의 말투에서는 어떤 기품마저 느껴졌다.

로제타는 물론 자신이 의견을 접고 애당초 권유대로 내실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테런이 크라이슨에게 내린 명을 번복하게 되는 꼴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자칫 에스테스 공작인 그의 체면을 상하게 만드는 일일 수도 있었다.

크라이슨은 로제타가 낸 방안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서 넌지시 테런의 의중을 물었다.

“각하께서도 괜찮으시다면, 빠르게 조치하겠습니다.”

다행히도 테런은 쉽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편이 낫겠군. 그럼 크라이슨. 그녀의 말에 따라 주면 고맙겠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각하.”

손님이었던 네 명의 귀족들은 조금 아쉬웠지만, 이내 점원들을 따라 내실로 걸음을 옮겼다.

가게 측에서 보다 더 나은 대접을 해 주겠다는데 굳이 자신이 쇼룸에 머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 또한 말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쇼룸이 금세 비었다.

크라이슨은 로제타와 테런을 향해 말했다.

겉으로 보기엔 처음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았지만, 로제타는 그의 음성이 미묘하게 바뀌어 있음을 깨달았다.

조금 더 자신에게 호의를 품은 쪽으로 말이다.

“그럼 편히 둘러보십시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편하게 말씀해 주시고요.”

“고맙네.”

테런은 로제타를 에스코트하며 오른쪽 매대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유리 덮개를 얹은 매대 위엔 흑단 나무로 만든 고급 파이프 여러 개와 손수건, 그리고 회중시계와 지갑, 타이 같은 것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하나의 종류만 파는 전문 매장이 아니다 보니 어울릴 만한 것을 한자리에 놓고 선보이는 형식인 듯했다.

“이쪽의 시계는 어떨까요?”

로제타의 눈에 뚜껑에 양각으로 포도 덩굴의 무늬가 새겨진 고급스러운 회중시계가 들어왔다.

그녀가 그것을 손가락으로 콕 가리키며 테런에게 의견을 구하듯이 바라보았다.

“그보다는 타이 쪽이 어떻겠습니까?”

“타이요?”

테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물건들을 살폈다.

그때, 딱 마침 그의 눈에 띄는 것이 보였다.

“이런 건 어떻습니까? 저기 오른쪽 구석에 있는 것 말입니다.”

테런이 추천한 것은 새빨간 색깔의 끈 타이였다.

로제타가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좁아진 미간에서부터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으음.”

하지만 그녀는 차마 선뜻 별로라고 말하지 못하고 낮게 앓는 소리만 내었다.

그런 뒤 점원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런 게 정말 신사분들에게 인기가 있나요?”

“……예?”

점원은 힐끗, 눈을 돌려 테런의 눈치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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