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70화
그런 뒤 곧 하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테런이 고른 빨간색 타이는 그저 구색을 맞추기 위해 진열해 놓은 물건이었다.
상회의 주 이용층은 남성 귀족들이다 보니, 상비해 놓은 물건은 대부분 그들이 선호하는 색깔이 많았다.
점잖아 보이는 검은색이나 흰색, 회색, 갈색 같은 것들.
모아 놓고 보면 조금 칙칙해 보이는 기분을 지울 수 없기에, 포인트를 주기 위해 가져다 놓은 타이였다.
물론 소재는 고급이었고.
‘아…….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점원은 울고만 싶었다.
상회에서 오래 근무한 만큼 테런이 어떤 소비를 해 왔는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평소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물건을 잘만 골라 샀으면서, 왜 오늘은 이런 것을 고르는 건지 살짝 원망이 들기도 했다.
도대체 자신이 뭐라고 대답을 해야 좋은가.
점원은 정답을 알 수 없었다.
가게의 큰손이 고른 물건에 대해서 별로다, 잘 안 팔린다, 유행이 오지도 않을 것 같다고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테런의 안목을 격하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점원이 직접적으로 대답할 필요는 없어졌다.
테런은 진열대 안쪽에서 잔뜩 경직된 표정으로 진땀을 흘리고 있는 점원에게 말했다.
“타이를 좀 꺼내 줘 보게.”
“예? 예. 알겠습니다!”
점원은 곧바로 유리 안에서 빨간색 타이를 꺼내 주었다.
가까이에서 봐도 로제타는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듯했다.
“음……. 너무 화려하지 않을까요?”
“그야 그렇긴 하죠.”
하지만 테런이 노린 게 바로 그 부분이었다.
매치하기 어려운 색깔로 선물해, 미스터 그로만이 로제타의 선물을 자주 이용할 수 없게끔 만드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유려한 언변으로 자신의 좁은 속을 포장했다.
“평상시에 매고 다니기엔 분명 부담스럽지만, 집에 하나 둔다면 기분 전환하고 싶을 때 아쉬울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럴까요?”
“그럼요. 보통 이런 색은 선물로 받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직접 사기 어려우니까요.”
듣고 보니 또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로제타가 아주 살짝 입술을 내밀며, 은쟁반 위에 놓인 끈 타이로 손을 뻗었다.
가볍게 그것을 집어 든 로제타는 테런의 쪽으로 홱, 몸을 틀었다.
“공작님. 잠깐만 저 좀 봐 주시겠어요?”
테런은 순순하게 그녀의 말을 따라 몸을 돌렸다.
“무슨 일입니까?”
그리고 그 순간, 그는 호흡을 멈췄다.
“잠깐 실례할게요.”
타이를 든 로제타의 손이 쭉 뻗어 나와 제 목 아래로 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검지로 타이를 길게 걸치듯 늘이고선 테런에게 가져다 대었다.
그런 뒤 색깔이 어떤지 가늠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쪽 눈을 지그시 감았다.
로제타는 오롯이 타이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테런은 아니었다.
그는 심장이 살짝 옥죄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가만히 숨을 죽인 채, 그녀의 손끝만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
닿지 않았는데도, 목구멍 안쪽이 간지러웠다.
만개한 봄날, 꽃가루가 흘러들어와 금방이라도 재채기를 터트릴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머리는 멈춰 있는데, 심장은 저 혼자 바빴다.
언제부턴가 계속 이런 상태였다.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이 순간이 깨어지기라도 할 것만 같아 테런은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래로 내려트린 그의 손이 가만히 주먹 쥐어졌고, 어느새 힘이 실렸다.
그렇게 얼마간 있었을까.
로제타가 쭉 뻗은 팔을 다시 거둬 들였다.
그녀는 미련 없다는 듯 테런에게서 몸을 돌렸으나, 그는 계속해서 로제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참기라도 하는 듯, 목울대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런 그의 상태를 모르고, 로제타는 웃는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대 보니까 공작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빨간색이 생각보다 남성분에게 잘 어울리는 색깔이었군요.”
그녀는 타이의 끝을 맞추고는 다시 은쟁반 위에 올려 두며 점원에게 말했다.
“이걸로 주세요.”
그런 뒤 그 얼굴 그대로 테런을 돌아보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법 마음에 들어 하시고, 또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까 이건 공작님께 선물할게요.”
그사이 정신을 차린 테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러다 이내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로제타에게 한 방 먹었다는 생각이 들어 새로운 기분에 휩싸였다.
심술을 부리다가 제 발등, 스스로 찍은 것만 같았으나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 * *
로제타가 크라이슨 상회에서 고른 물건은 두 개였다.
하나는 테런에게 줄 빨간 끈 타이, 그리고 미스터 그로만에게 줄 연초 갑.
“둘 다 포장해 주세요.”
“예, 레이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점원은 은쟁반에 두 개의 물건을 받치고 자리를 떴다.
로제타가 다시 테런을 돌아보았다.
“왜 입이 나오셨어요?”
“그럴 리가요. 성장기 청소년도 아니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선물도 받은 것을요.”
“그럼 제 눈이 잘못된 것이로군요.”
이 시답잖은 문답이 즐거운 건 왜일까.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상황을 즐기기만 해도 충분한 기분인 것 같기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로제타가 산 물건은 포장이 제법 빨리 되었다.
점원 대신 상회의 주인이 두 개의 봉투를 가지고 나와 그녀에게 건넸다.
“오른쪽이 연초 갑, 왼쪽이 타이입니다.”
“덕분에 기억하기 쉽겠네요. 그럼 두 개 다 해서 얼마죠?”
크라이슨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언제나 그랬듯 월말에 공작가로 청구서를 보내겠습니다.”
“아, 아뇨. 잠시만요.”
그녀가 황급히 대답하며, 저택에서부터 들고나온 클러치 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꺼내듯 그 안을 뒤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 결제할게요. 에스테스 공작가엔 청구하지 말아 주세요.”
그 순간 테런이 클러치 백 안을 뒤적이는 로제타의 손등을 가볍게 잡아 제지했다.
“왜 그러세요, 공작님?”
“왜 제가 준 가문 패는 사용하지 않습니까?”
“아. 이건 개인적인 감사함을 담아 선물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따로 계산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뜻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미스터 그로만의 선물은 에스테스의 이름으로 결제함이 어떠실지, 조심스럽게 말해 봅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지, 이유를 설명 들을 수 있을까요?”
테런이 짧게 턱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미스터 그로만이 이번 일을 수락한 것은 미래의 공작 부인이 될 영애의 데뷔탕트를 돕기 위해섭니다. 그러니 그동안 그가 한 노고를 위로하고 치하하는 대상의 주체 역시, ‘에스테스 공작 부인’이면 좋을 테죠.”
테런의 말투는 특유의 음률이 있었다.
느릿하지만 발음이 정확했고, 또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그래서 로제타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 기울였다.
“그에게도 이번 일은 자신의 경력을 쌓는 것에 매우 유의미한 기회가 되었을 테죠.”
“그러니 미스터 그로만의 면을 세워 주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은 에스테스 공작가의 이름으로 감사 선물을 전하는 일이겠군요.”
로제타는 테런의 뒷말을 스스로 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세를 부리는 것은 퍽 곤란한 일이지만, 위용을 드러내는 일은 조금 필요하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로제타는 순순히 테런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테런은 그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한마디를 덧붙였다.
“미스터 그로만은 당신이 직접 선물을 골랐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기뻐할 겁니다.”
“그러면 좋을 텐데요.”
로제타가 살짝 미소 지으며, 오른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각각 한 손씩 옮겨 들었다.
“그렇다면 이쪽의 연초 갑은 와튼에게 맡기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집사라면 분명 잘 전달해 줄 겁니다.”
그녀가 그의 충고를 그다지 기분 나쁘게 들은 것 같지는 않은 듯해, 테런은 한시름 놓았다.
그런데 그때, 로제타가 싱긋 웃으며 한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 선물은 제가 직접 해도 되겠죠?”
테런에게 주고자 산 빨간 끈 타이가 들어 있는 봉투였다.
“기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그가 웃는 얼굴로 손을 뻗어 정중하게 로제타의 선물을 받아 들었다.
“아껴 쓰지요.”
로제타는 곧바로 ‘어딜!’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진 마시고요. 조만간 착용하시는 걸 보고 싶네요.”
“음.”
테런이 짧게 말끝을 흐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드리죠.”
테런은 크라이슨을 돌아보며 말했다.
“타이의 몫만 결제하게.”
“예, 알겠습니다. 각하.”
크라이슨이 로제타 쪽으로 몸을 틀며 정중하게 말했다.
“계산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레이디.”
“가격이 궁금하군요.”
“금화 한 개입니다.”
가격을 들은 로제타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생각보다 높은 가격에 내심 놀란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육성으로 ‘헉’ 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걸까.
‘촌스럽게 굴 뻔했어.’
한숨을 삼키며, 그녀는 클러치 백 안을 서둘러 뒤졌다.
에스테스 파크에서 환전해 온 금화를 하나 꺼내자, 크라이슨이 타이밍 좋게 손바닥만 한 은쟁반을 턱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쟁반에는 붉은 벨벳 천이 깔려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윌셔스 왕국은 돈을 직접적으로 주고받지 않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귀족들은 가문 패를 사용하고, 어쩌다 현금으로 계산할 때는 트레이를 이용하고 있었다.
로제타는 자연스럽게 그 위에 돈을 올려 두었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모쪼록 즐거운 쇼핑이셨길 바랍니다.”
“주인장 덕분에 아주 편안한 시간이었어요.”
짧은 덕담으로 대화를 마무리하자, 테런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가죠.”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테런은 이미 팔을 살짝 몸에서 띄워 벌리고 있었다.
마치 그녀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것처럼 말이다.
로제타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그의 팔 틈 사이로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었다.
‘휴. 십년감수했네. 까딱했다간 돈이 모자랄 뻔했겠어.’
그녀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테런과 보폭을 맞춰 걸었다.
두 사람은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건물을 나섰다.
곧장 가게 앞에 주차해 놓은 공작 가의 마차로 향했지만, 테런은 그 위에 오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차 문을 열고 그 안에 로제타가 산 물건들을 집어넣은 뒤, 그는 곧바로 다시 문을 닫았다.
“공작님?”
로제타가 그의 행동에 놀라 부르자, 그가 뒷짐을 진 채 주위를 쓱 둘러보며 말했다.
“조금 아쉽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