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71화
“……네?”
“이곳에서 십 분 정도만 걸으면 평민 지구의 수변 공원이 나옵니다. 오늘 그곳에 장이 서죠.”
“아.”
“쓸 만한 물건은 몇 없더라도 기분 전환 삼아 걷기는 좋을 겁니다.”
그가 넌지시 산책을 청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로제타가 말끝을 흐리며 하늘을 힐끗 쳐다봤다.
그 시선 속에 어떤 걱정이 감춰져 있는지 읽어 낸 테런은 로제타의 근심을 덜어 줄 요량으로 유쾌하게 말했다.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으니까요.”
“그럼, 그럴까요?”
그녀의 대답은 곧 허락이 되었고, 두 사람은 천천히 제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테런과 로제타는 잠시 말 없이 걸었다.
앞만 보는 그녀와 달리, 테런은 자꾸만 옆을 돌아보았다.
햇빛이 닿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오늘 유독 더 선명해 보이는 기분이었다.
로제타는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왜 자꾸 자신을 쳐다보느냐고 묻지 않은 건, 그 시선이 싫지 않아서였다.
* * *
크라이슨 상회 밖으로 나왔을 때부터 로제타와 테런의 뒤를 밟는 한 그림자가 있었다.
여자의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막 밖으로 나오던 로제타의 얼굴을 보고 살짝 눈매를 찌푸렸었다.
“붉은 머리? 설마…….”
여자는 계속해서 긴가민가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면 좋으련만, 이상하리만치 계속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계속 로제타를 훔쳐보고 있었다.
노안 때문인지 좀처럼 초점이 맞지 않는 시야 탓에, 흉한 주름이 생길 때까지 미간을 마구 좁혔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점점 더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깨닫고 경악했다.
“말도 안 돼. 저 아이가 왜……!”
로제타가 자신이 선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하자, 희끗한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서둘러 근처에 있는 건 물 뒤로 모습을 숨겼다.
그녀는 계속해서 벽 뒤에 모습을 숨긴 채, 테런을 향해 밝게 웃고 있는 로제타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클리프 남작가에 있어야 할 저 아이가 어떻게 에스테스 공작의 옆에 있는 거지?”
눈을 가늘게 뜨며 멀어지는 두 사람을 쫓아가려고 했다.
허둥지둥, 꼭 홀린 사람처럼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며 그들을 따라가려 할 그때.
“멈춰라.”
어디선가 튀어나온 나직한 목소리와 서늘한 날붙이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멈춰 세웠다.
“신분을 밝혀라.”
에스테스 공작가의 기사들이었다.
로제타만 눈치채지 못했을 뿐, 그들은 저택에서부터 따라 나와 비밀리에 두 사람을 호위하고 있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기사의 존재에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겁먹은 눈빛으로 제 턱 아래 들이밀어진 예리한 검날을 훔쳐보았다.
마른침을 삼키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무슨 목적으로 각하께 접근하려는 거지? 대답하라. 불응할 시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를 것이다.”
또 한 번 으름장을 놓는 기사의 말에 여자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자는 낭패라는 듯이 입술을 세게 깨물다가 이내 변명을 이었다.
“길눈이 어두워 그저 가야 할 방향을 잠시 헷갈렸을 뿐이에요, 기사님들. 검을 내려 주시면 원래 제가 가려던 길로 가겠습니다.”
여자의 앞을 막아 선 기사들은 그녀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뒷걸음질 치는 그녀를 도로 막아 세우지도 않았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그렇게 검으로부터 멀어진 여자는 기사들을 향해 눈꼬리를 내리며 비굴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러다 이내 홱 등을 돌려 테런과 로제타가 간 방향과는 정반대로 걷기 시작했다.
기사들에게서 몸을 돌려세우기가 무섭게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부릅뜬 눈이 제법 무서웠다.
* * *
그렇게 얼마 걷지 않아 멀지 않은 곳에서 여러 가지 소리가 하나로 뒤섞여 들려왔다.
상인들이 손님을 호객하는 소리와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뛰어다니는 소리 같은 것들이었다.
“저긴가 봐요.”
수변 공원의 입구에 들어선 로제타는 둑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넓은 길 한편에 노점이 주르륵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강변이라 그런지 바람이 유독 거세, 쓰고 있는 모자가 날아갈 것만 같았다.
로제타는 한 손으로 모자 위를 꾹 누르며, 조르듯 테런에게 재촉했다.
“어서 내려가 봐요.”
“대신 조심하십시오. 경사가 가파르니까.”
평민 지구니만큼 길과 계단은 귀족 지구에 있는 것만 못했다.
로제타는 테런의 인도에 따라 둑 아래로 내려갔고, 이내 흥미진진한 얼굴로 노점 구경을 시작했다.
둑 아래로 내려서니 악기 연주 소리가 더욱 잘 들렸다.
“저건 무슨 악기인가요?”
현대로 따지자면 기타같이 생긴 모양새였다.
“류트라고 합니다. 손톱으로 줄을 튕기죠.”
멜로디는 흥겨웠으나, 구간이 제법 반복되고 있었다.
조금 더 듣자 이내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라 로제타는 허밍을 하듯 멜로디에 살짝 제 목소리를 얹기도 했다.
“이 노랜 곡명이 뭘까요?”
“글쎄요? 저들이 직접 작곡한 것 같습니다만.”
공원의 노점에는 먹을거리도 잔뜩 팔고 있었지만, 크라이슨 상회에서 내어 준 핑거푸드를 몇 개 집어 먹고 나온 터라 군것질 생각은 따로 들지 않았다.
대부분 수레를 끌고 와 그 위에 물건을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음악을 들으며 평민들이 파는 물건을 눈으로 구경하던 로제타의 시선에 무엇인가 걸렸다.
지금까진 손수레가 연이어 쭉 붙어 있었는데 갑자기 한 구역이 비기라도 한 것처럼 뚝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저기는 왜 저럴까요?”
“글쎄요. 가까이 가 보죠.”
호기심이 동해 푹 꺼진 구역 쪽으로 다가갔다.
“아……!”
빈자리처럼 보이던 그곳에도 상인이 있었다.
다만 매대를 두고 장사를 하는 다른 상인들과 달리, 그곳은 허름한 동자리를 깔고 그 위에 물건을 올려 두고 있었다.
로제타는 그곳에서 팔고 있는 물건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수석이었네요.”
전생에서 그녀는 파출 인력 사무소에 등록해 가사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있었다.
그때 지원 나갔던 한 목수의 집에서 이와 같은 수석을 많이 봤었다.
집주인은 수석을 하나 주겠다고 했지만, 그녀가 거절한 적도 있었다.
‘옛날 생각 나네…….’
로제타는 돗자리 앞에 쭈그리고 앉아 늘어놓은 수석들을 살짝살짝 건드려 보기 시작했다.
수석을 진열해 놓은 피로한 낯을 한 중년 여성 역시, 딱히 로제타가 살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는지 굳이 말을 붙이며 영업하지 않았다.
돌들은 대개 투박했고, 그것을 담는 그릇 역시 완성도가 떨어졌다.
‘팔리지는 않겠다.’
로제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귀동냥으로 듣기로, 수석의 값어치는 모양과 재질이었다.
돌의 형태가 그 하나로 산수화(山水畵)가 될 것.
그리고 돌 자체가 값어치 있는 광물이어야 할 것.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수석들은 얼핏 보아도 그 생김새가 투박해 예술품으로는 가치가 없어 보였다.
값진 광물이 아닌 이상 일부러 쓸모없는 것을 사 갈 사람도 없어 보였다.
상인도 그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기에 돗자리 제일 앞자리에 놓아둔 가격표에 ‘동화 한 닢’이라고 써 놓은 것이리라.
‘이 세계에서도 수석이 있긴 하구나.’
귀족 중에서야 별난 취미로 구매하는 사람들이 있다곤 하나, 이곳은 평민 지구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취미는 정말 꿈같은 소리.
그러니 핥아먹을 수도, 깨서 먹을 수도, 삶아서 먹을 수도 없는 돌 따위를 사는 사람은 없었다.
수석을 하나씩 만져 보던 로제타가 순간 움찔했다.
‘……응?’
무심코 스쳐 지나가려던 그녀의 손이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로제타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가장 가운데 있는 수석을 눈여겨보았다.
그것은 전시된 수석 중에서도 가장 못생긴 돌이었다.
마치 가시가 돋친 듯 사방이 뾰족했고, 진흙물에 담갔다가 빼기라도 한 것처럼 전체적으로 흙색이었다.
이상한 점은 돌의 가운데에 아주 가는 실선이 나 있다는 점이었다.
그 미세한 균열이 로제타를 홀렸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천천히 수석으로 손을 뻗었고, 그 틈의 경계로 자신의 손끝을 가져다 대었다.
갈라진 부분이 피부에 닿는 순간, 그녀의 몸이 움찔 떨렸다.
목 뒤의 달 모양 반점이 있는 부위가 달아오르는 것처럼 홧홧해지기 시작했다.
견뎌 내자, 이내 딩- 하고 어디선가 종이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청량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그 시작은 바로 돌에 난 실선에서부터였다.
그 기운은 마치 속을 깨끗함으로 모조리 씻어 내 주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어?’
로제타는 속으로 놀랐다.
일전에 불의 정령석에 손을 대었을 때도 이랬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동을 느끼는 과정은 비슷해도 다가오는 느낌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몸이 아프지 않았고 되레 개운해졌다.
그렇게 그녀가 주저앉은 채, 돌만 쥐고 있자 테런이 걱정이 담긴 목소리를 내었다.
“로제타 양? 몸이 안 좋습니까?”
일전에 응접실에서 봤던 것처럼, 로제타가 또 빈혈이 인 것은 아닌지 염려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로제타가 곧바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테런은 안심할 수 있었다.
로제타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공작님. 여쭤볼 게 있어요.”
“무엇입니까? 편하게 물어보세요.”
그의 허락을 얻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로제타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입술만 달싹달싹. 속에서 치열하게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는 듯했다.
그녀가 그렇게 망설이는 동안, 테런은 재촉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말, 해도 되나? 정확하진 않은데…….’
그녀가 시선을 떨어트려 다시 수석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