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72화
한가운데 그어진 금에서 자꾸만 청량한 기운이 느껴졌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이 돌이 예사 돌이 아니라는 어떠한 확신 같은 게 자꾸 마음에 번졌다.
그 감정은 마치 그녀에게 어서 말하라는 듯 등을 떠미는 것도 같았다.
입술이 자꾸만 간지러워 그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기까지 했다.
그러다 이내 상인에게 제가 생각한 걸 말해 주기로 결심했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게다가 그녀가 선의로 말해 준다고 한들 상인이 흘려들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결국 선택은 상인의 몫이었다.
이내 말을 해 주기로 마음먹은 로제타가 테런에게 질문했다.
“혹시 크라이슨 상회에서 보석도 가공하나요?”
“상회 말씀입니까? 아, 음…….”
테런이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살짝 눈매를 찌푸렸다.
“아마 제 기억으로는 전문 세공사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그쪽의 사람들은 믿을 만한가요?”
“제가 알기로 그렇습니다. 신의 있죠.”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로제타는 결심했다는 듯한 얼굴로 수석을 내려놓았다.
그런 뒤 상인인 중년의 여성에게 말했다.
“이보게, 주인장.”
“왜, 왜 그러슈.”
상인은 로제타의 옆에 서 있는, 누가 봐도 귀족인 테런을 힐끗 쳐다보 고는 불퉁스럽게 대답했다.
그녀는 조금 혼란스러워 보였다.
로제타가 입고 있는 옷을 보면 귀족이긴 한데, 머리카락 색깔은 야만인들처럼 붉어서 욕을 하며 내쫓아야 할지 존대를 하며 굽신거려야 할지 영 헷갈리는 것 같았다.
로제타는 그런 상인의 태도를 굳이 문제 삼지 않고 눈짓으로 방금 전 자신이 내려놓은 물건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것, 둑길 위에 있는 크라이슨 상회에 가져가 선을 보여 보게.”
“……예?”
“온종일 여기서 시간을 죽치고 있는 것보다는 아마 그편이 훨씬 소득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게 무슨…….”
로제타는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 켜 세웠다.
상인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차분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나는 전문가가 아니기에, 돌을 들고 가 봤자 헛수고일 수도 있네. 하지만 또 모를 일이지.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그대에게 깃들 수도.”
그녀가 다시 한번 수석에 시선을 주었다가 거두었다.
“그러니 선택은 자네의 몫이네. 숙고해서 결정하길 바라.”
말을 마친 그녀가 한 치의 미련도 없다는 듯이 먼저 몸을 돌렸다.
테런의 팔을 살짝 잡아당기자, 그가 순순히 따라 움직였다.
“이만 가요.”
그렇게 수석 판매 자리를 등지고 몇 걸음 옮겼을 때였다.
테런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돌에 대해 잘 압니까?”
“그건 아니고요.”
로제타가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그냥 그럴 가능성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요.”
로제타가 잠시 말을 고르듯 하다가 이내 민망한 사람처럼 웃었다.
“뭐라고 딱 짚어 설명하기 힘드네요. 답답하시죠?”
“아닙니다. 가끔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는 건, 저도 아니까요.”
테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믿고 믿지 않고는 이제 저이의 몫이군요.”
“그렇죠.”
“만약 당신의 직감대로 저게 값진 광물이라면 우리가 살 것을 그랬나 싶기도 하고.”
장난기가 담뿍 담긴 그의 말에 로제타가 고개를 저었다.
“무거운 건 들고 싶지 않아요.”
그러자 그가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살짝 과장되게 입을 열었다.
“그대가 무거운 걸 들 이유가 어딨다고요?”
그런 뒤 자신의 빈 팔을 들어 올려 보이며, 힘을 불끈 주며 장난치듯 말했다.
“여기 아주 튼튼하고 힘 좋은 몸종이 있는걸요.”
로제타가 황당하다는 듯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공작님도 참. 누가 들으면 절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누가 그대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에스테스 공작이 임자를 만났다. 고만 생각하겠죠.”
가벼운 타박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수변 공원을 잠시 더 산책하던 로제타가 무엇인가를 보고 알은체를 했다.
눈을 반짝이며 제자리에 주저앉은 그녀가 땅 쪽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꺾었다.
토끼 꼬리 같은 하얀 꽃이 복슬복슬하게 핀 토끼풀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로제타가 그것을 보란 듯 테런에게로 쭉 뻗어서 내밀었다.
그러자 테런이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팔을 뻗어 풀을 받아 들었다.
그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로제타가 재잘거리듯 말을 이었다.
“어릴 때, 이것 가지고 반지나 팔찌를 만들어 노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보석이 아이들에게 허락될 리 없으니, 꽃줄기를 엮어 장신구를 만들어 착용하며 노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로제타가 설명을 이어 가는 사이, 테런은 줄기를 동그랗게 말고는 매듭을 묶었다.
그리고 스스로 만든 꽃반지를 가라앉은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15년이나 지난 일임에도, 손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테런은 쓰게 웃었다.
“여겠습니다.”
로제타에게 토끼풀을 돌려주자, 그녀가 받아 들고는 이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작아서 저는 못 끼겠네요.”
클라리사에겐 맞으려나.
‘가져다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외출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즐거워서 벌써 돌아가는 게 퍽 아쉬웠으나, 약속은 약속이니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그녀가 꽃반지를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테런을 마주 보고 서서 물었다.
“이만 돌아갈까요?”
해가 저물 때는 아니었으나, 그림자의 길이가 꽤 많이 길어진 터였다.
테런은 그녀의 제안에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편이 좋겠죠. 긱스의 잔소리를 생각하면요.”
짧은 새 감정을 바로 추스른 모양인지, 로제타를 대하는 그의 음성과 표정이 제법 자연스러웠다.
“그럼 이만 마차로 돌아가요.”
테런이 로제타를 에스코트하려고 팔을 내밀던 순간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무슨 일인가 싶었던 로제타가 테런의 몸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
“야! 너 거기 서! 내 사탕 내놓으라고!”
“억울하면 따라와서 가져가 보시든가!”
클라리사의 또래로 보이는 소년과 소녀가 뛰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로제타가 테런에게 경고하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공작님, 조심…… 읍!”
입술이 뭉개졌다.
그에게 전하려던 주의하라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그랬던가.
사람의 피부 중에 가장 여리고 민감한 부위 중 하나가 바로 입술이라고.
로제타는 제 입술 위로 내려와 닿은 뜨거운 감각을 고스란히 느꼈다.
생각지도 못한 일에 로제타의 초록빛 눈동자가 커졌다.
자신과 똑같이 놀란 듯한 피콕블루색 눈동자가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앞도 안 보고 달려오던 한 소년은 테런의 등을 들이박듯이 부딪쳤고,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던 테런은 반동에 몸의 중심을 잃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제 앞에 서 있던 로제타의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그 타이밍에 그녀가 고개를 살짝 위로 들었고, 본의 아니게 로제타의 입술을 덮쳐 버리고 만 것이었다.
‘어, 어떡해?’
로제타의 속눈썹이 빠르게 깜빡였다.
‘어떡해야 해?’
누구도 답을 줄 수 없는 물음이 계속 머릿속에 둥둥 물음표와 함께 떠 올랐다.
테런이 입술을 떼지 않으니, 그녀 역시 먼저 고개를 돌리기가 어색했다.
어깨를 잡고 있는 그의 손바닥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로제타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고, 이 공간 속에 테런과 자신, 단둘만 갇혀 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맞닿은 입술의 체온은 이제 누구의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로제타의 눈꺼풀이 살짝 가라앉으며 초록빛 눈동자를 가리려 할 때였다.
“어? 어……. 아…….”
목이 졸린 듯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반쯤 잠기려던 그녀의 눈이 다시 번쩍 뜨였다.
헛숨을 들이켜자, 그제야 테런도 제 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로제타에게서 제 입술을 떼어 내었다.
“저기, 저…….”
테런에게 와 부딪친 소년이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달달 떨면서 두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비싼 옷을 입은 귀족 나리들.
붙잡혔다간 치도곤을 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소년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어…….”
그러다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며, 이내 바락 소리를 지르고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어? 야! 같이 가!”
소년을 뒤쫓아 달렸던 소녀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치며 그를 따라 도망가기 시작했다.
로제타와 테런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듯 상대를 흘깃댔다.
“아.”
“흠.”
그런데 하필이면 그게 또 동시라 둘을 화들짝 놀라 하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더, 덥네요.”
로제타가 기어 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며 손을 얼굴 쪽에 대고 팔랑거렸다.
그사이 로제타의 어깨에서 손을 뗀 테런은 허공에서 주먹을 한번 꽉 쥐었다가 무겁게 떨어뜨렸다.
얼핏, 얼굴은 담담해 보였지만 그 역시 귓바퀴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몇 번의 헛기침 끝에, 테런이 헛숨을 들이켜며 로제타를 불렀다.
“저기. 로제타 양. 이번 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