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73화
그가 무어라 입을 떼려고 할 그때였다.
로제타가 테런의 말을 가로채듯 목소리를 높였다.
“사, 사고잖아요!”
테런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얼굴과 목이 그녀의 머리카락 색깔만큼이나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이들 때문이니까…….”
기세는 처음에만 좋았다.
그녀는 갈수록 횡설수설했고 목소리도 작아졌다.
“그러니까……. 어, 어쩔 수 없었죠.”
“로제타 양. 나는…….”
“괜찮아요, 공작님. 무슨 말씀하시려는지 알아요.”
로제타는 거의 울 듯했다.
뭐라고 한마디만 더 꺼내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아 테런의 입술이 저절로 다물렸다.
대신 그의 주먹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가 손등 위로 하얗게 뼈가 도드라졌다.
로제타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해가 곧 지겠어요. 긱스 경에게 야단, 맞으실 거예요.”
그녀는 테런의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빙글 몸을 돌렸다.
테런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묵묵히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가 자신의 뒤를 따르는 자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로제타는 떨리는 맘을 추스르듯 가슴 한가운데에서 두 손을 꽉 잡다가, 얼굴을 감쌌다.
‘어떡하면 좋아?’
차가운 손바닥으로 얼굴의 온기를 덜어내 보려 했으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의 손은 이내 천천히 내려가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분명 제 몸인데, 제 것 같지가 않았다.
너무나 이상하게도.
* * *
테런과 로제타가 자리를 뜬 그때, 그들이 서 있던 곳 위로 두 남자가 다가왔다.
그중 하나는 리스턴 후작의 사생아인 패트릭이었다.
두 남자는 모두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패트릭보다 키가 조금 더 큰 남자가 과장되게 손뼉을 마주치며, 감탄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을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야! 뜨겁네. 뜨거워. 우리 에스테스 공작도 남자였어. 어? 그렇지 않은가, 패트릭?”
하지만 키가 작은 쪽에선 그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키가 큰 남자 역시 딱히 대꾸를 바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계속해서 혼잣말을 이었다.
“하기는. 저 외모를 보면 에스테스 공작이 저렇게 애지중지하는 것도 이해는 되고.”
두 사람이 계단을 올라 둑 위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키가 큰 남자는 아쉽다는 듯 혀를 한번 찬 뒤 뒤돌아섰다.
그가 먼저 걸음을 옮기자 패트릭이 뒤를 따랐다.
남자의 걸음이 멈춘 곳은 바로 수석을 파는 돗자리 매대였다.
상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사과를 베어 먹고 있었다.
로제타의 말은 흘려 버리기로 한 듯 그녀가 가리켰던 수석 역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남자가 유쾌한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하대했다.
“아까 여기에 왔다 간 영애가 가리킨 것이 무엇이었지?”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묘하게 위압적인 태도에 상인은 곧바로 사과를 내려놓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 이겁니다요.”
그녀가 가운데 있는 수석을 하나 가리키자 남자가 곧바로 그것을 들어 올렸다.
“이거, 사겠네. 패트릭. 넉넉하게 셈을 쳐주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패트릭은 허리에 찬 주머니를 열어 돈을 꺼냈다.
그는 금화 한 닢을 꺼내 상인에게 훅 던져 주었다.
그 동전이 그녀의 앞에 떨어지자, 행여라도 잃어버릴까 싶었던 상인이 서둘러 엎드리듯 상체를 숙였다.
“이, 이렇게나 많이.”
말과는 달리 눈이 욕심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상인이 동전을 쥔 것을 확인한 뒤, 남자와 패트릭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저만치 앞서 걷는 남자에게 바싹 다가서며 패트릭이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전하. 고작 돌덩이를 이렇게 비싸게 주고 사시다니요.”
“아랫것들에게나 비싸지, 내겐 푼돈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남자는 제 팔뚝만 한 수석을 한 번 더 추켜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혹시 또 아나? 아까 그 영애의 말대로 이것이 금화 한 닢보다 더 값어치 있을지 없을지 말이야.”
후드 속에 감춰진 그의 눈동자가 재밌다는 듯 반짝였다.
하지만 이내 돌덩이가 무겁고 거추장스럽다는 듯, 제 뒤를 졸졸 따라오던 패트릭에게 떠맡겨 버렸다.
5. 부정과 인정
테런은 아주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 묵혀 두었던 꿈이었다.
그리운 꿈인 것과 동시에, 지독한 악몽.
너무 아파서 다시는 기억해 내고 싶지 않았던 추억.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이, 하필이면 이 밤, 그에게 꿈으로 찾아왔다.
「오라바니.」
자신을 보며 곱게 휘어지는 소녀의 눈웃음은 마치 초여름날의 햇빛 같았다.
조금 더 자세히 얼굴을 보고 싶은데 여의치가 않았다.
피르가 빛 가루를 흩뿌리고 있기라도 하듯이 커다란 반짝임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와 소녀의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다.
‘아. 이때는 피르가 아닌가.’
시기상 정령의 힘을 다루는 법을 배우던 때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당시, 아직 어렸던 테런은 힘이 불안정했다.
그래서 가장 하급 정령인 실프를 소환하는 것에도 종종 애를 먹었다.
그가 아무리 육성으로 불러도 실프는 인간계로 나오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았다.
그의 목소리가 실프에게 닿지 않았다면 인간계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고, 만약 목소리만이라도 닿았다면 지금처럼 눈 같은 반짝임이 내렸다.
그날, 테런은 마음이 조금 들떴었다.
최근 며칠 계속 연습한 결과, 소환할 때마다 실프가 연달아 인간계로 나왔었다.
그래서 로제에게 자신이 처음으로 불러낸 정령을 자랑하고 싶었다.
어린 마음이었다.
물론 하급 정령은 일반인들이 볼 수 없다.
하지만 볼 수 있는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하나는 바람의 기운이 모여 있는 에스테스 영지나 수도의 저택이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또 하나는 정령을 보고자 하는 이가 감이 좋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로제는 랭우드의 후계자로, 정령에 대한 감이 매우 좋은 편이기에 필요한 조건이 모두 갖춰진 셈이었다.
하나 테런은 당시 실프를 소환하는 것에 실패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정령계에 가닿았는지 정원에 반짝이는 빛 가루가 포슬포슬 내렸다.
「이거 너무 예뻐! 반짝여!」
함께 놀던 로제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꺄아’ 외치며 두 팔을 벌리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수없이 떨어지는 반짝임 사이로 얼핏 얼핏 보이는 로제를 보기 위해, 테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머쓱함에 그가 코를 쓱 훔치자 뭉개진 풀잎에서 나는 짙은 싱그러운 향이 코끝으로 밀려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비록 오늘은 실패했지만, 저렇게 좋아하는데 뭐 어떠냐 싶었다.
「오라바니. 로제랑 결혼할 거지!」
「당연하지.」
「그럼 지금 하쟈!」
어린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로제타에게 다가갔다.
그런 뒤 소녀의 손을 꼭 잡으며 진지하게 입을 떼었다.
「나, 테런 아셔 에스테스는 로제 안나 랭우드를 아내로 맞아 한평생 그녀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어린 날의 맹세였다.
순수했고, 더없이 진실 되었다.
「저도요! 오라바니뿐이야!」
긴 문장을 말하기가 쉽지 않았던 로제는 그냥 팔을 번쩍 들고 외쳤다.
그렇게 서약을 마친 어린 로제와 테런이 마주 보며 헤헤 웃었다.
「로제. 손 좀 줘 봐.」
「웅. 여깄어.」
자신을 향해 쭉 뻗은 로제의 왼손을 잡은 테런이 진지한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끼웠다.
그것은 그의 손톱 끝에 푸른 풀물이 들 때까지 꼼지락거리며 만들었던 토끼풀 반지였다.
그는 그것을 로제의 작은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자, 됐다. 이걸로 로제는 내 신부야.」
「응! 오라바니도 내 꺼야!」
혀짧은 그 목소리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로제는 약지에 낀 작은 풀꽃반지가 마음에 드는지 왼손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곤 계속 바라봤었다.
하지만 그 사랑스러운 표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근데 오라바니. 로제는 오라버니 한테 줄 게 없어. 어떡하지?」
테런은 심각한 표정으로 울상을 짓는 로제에게 손을 뻗었다.
그런 뒤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차분히 정리해 주며 입을 열었다.
「왜 나한테 줄 게 없어.」
테런의 목소리는 사뭇 어른스러웠다.
「언제나 웃어 주잖아. 계속 웃어 주면 돼.」
그 말 한마디에, 자신은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고 축 처져 있던 아이의 눈이 사르르 접혔다.
그 웃는 얼굴을 보며 테런은 가슴 가득 충족감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응 그렇게. 언제나 날 보고 행복하게 웃어 주면 그걸로 돼.」
테런은 이를 악물었다.
로제를 평생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날, 로제가 랭우드로 돌아간 뒤 홀로 남아 아쉬운 마음에 그는 실프를 또 한 번 불러 보았다.
「실프. 만약 듣고 있으면…… 내 소원을 들어줘.」
이번에도 목소리만 가닿았는지, 테런의 주위로 빛 가루만 포슬거렸다.
테런은 아이답지 않게, 의젓하게 말을 이었다.
「로제는 너무 어려서 아직 혼자 못 하는 일이 많잖아. 나보다도 도움이 필요해.」
자신의 이 목소리가 부디 실프에게 닿길.
「아직은 로제와 내가 계속 같이 있을 수 없어. 그러니까 실프, 네가 그 아이의 곁에 있어 줬으면 해. 내가 로제의 곁에 계속 있을 수 있을 때까지 말이야.」
그래서 이 간지러운 마음이 언젠간 로제에게도 가닿길.
테런은 간절히 바라며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말을 이었다.
「그때까지 네가 그 아이가 기뻐할 만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줘. 그래서 로제가 항상 웃을 수 있게 해 줘. 부탁이야.」
실프는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테런의 말을 모두 듣고 있다는 듯, 주위엔 계속해서 빛 가루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로제를 만날 수 있었던 날은.
그날 밤, 랭우드 후작가는 전소되었으며 가문의 일원은 모두 죽었다.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사용인들뿐이었다.
조사가 시작되고, 생존자 중 한 명이 한밤중에 부엌에 내려갔다가 기름 솥을 엎었다는 증언을 했다.
그는 깜짝 놀라 그만 실수로 들고 있던 촛불을 떨어트렸다는 추가 진술까지 했다.
랭우드가를 덮친 불운한 사고는 사용인의 실수로 최종 결론이 났다.
테런은 그날 미친 듯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실프를 소환했다.
「실프! 나와! 나오라고!」
테런은 악에 받쳤었다.
그의 부모도, 카밀라도 미쳐 날뛰는 것 같은 테런을 말리지 못했다.
「내가 부탁했잖아!」
하급 정령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테런은 실프를 탓했다.
용서할 수 없었다는 말이 더 제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렇게 부탁했는데, 어째서.
「어째서!」
하지만 수백 번을 목이 터져라 불러도 실프는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테런의 목소리가 정령계로 가닿지도 않는지 더 이상 주변에 빛 가루도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