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74화
슬픔은 마음 깊숙한 곳에 닻을 내린 듯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눈물은 점점 말라 갔다.
때때로 웃고, 때때로 농담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가 아픔을 잊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고통에 무뎌졌을 뿐이었다.
언제나, 모든 순간 테런의 마음 한 곳엔 로제가 있었다.
첫사랑은 그렇게 계속 남아 그를 갉아먹었다.
까맣게 죽어 가는 그의 마음을 보여 주기라도 하는 듯, 테런의 꿈이 새카매졌다.
그러다 잠시 후, 어두운 방 안을 밝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야 한가운데가 천천히 밝아진다.
붉은빛의 머리카락.
자신을 등지고 서 있는 로제의 뒷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테런은 아픈 마음을 꾹 참고 그녀를 불렀다.
‘로제.’
보고픈 얼굴을 한 번 더 불러 보았다.
‘로제. 얼굴을 보여 줘. 제발.’
그러자 천천히 앞에 있는 이가 몸을 돌리기 시작한다.
‘제발 나를 보고, 다시 웃어 줘.’
조금씩 돌 때마다 아이는 빠르게 자랐고, 이내 그를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요청대로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로제가 아니었다. ……로제타 클리프였지.
「공작님!」
자신을 눈에 담은 초록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그 환한 웃음에, 그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삽시간에 걷히며 주위가 환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테런의 눈이 번쩍 뜨였다.
“……헉!”
그가 숨을 거칠게 터트린 뒤 잠시 호흡을 멈췄다.
언제나 선명하던 피콕블루색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그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을 눈꺼풀도 깜빡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을까.
몸을 울리는 심작 박동에 그제야 테런은 느릿하게 호흡을 재개했다.
그는 불 꺼진 서재 안, 긴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 너머로 빛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밤, 혹은 아침이 먼 새벽인 것 같았다.
테런은 소파 등받이를 집고 몸을 일으켰다.
자세를 바르게 한 그가 무릎에 양 팔꿈치를 괴고는 손바닥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깊은 한숨이 입술을 가르고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잔뜩 묻어 있었다.
자신이 왜, 하필이면 오늘 이런 꿈을 꿨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수변 공원에서 본 토끼풀.
그리고 로제타와의 첫 입맞춤.
그 모든 것이 방아쇠였다.
그것들은 테런이 애써 외면하려던 마음속, 로제의 기억을 건드렸고 결국 이렇게 꿈으로 터트려 버렸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이 머저리 같은 놈아.”
그는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 목소리가 지독하게도 아팠다.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로제타에게 로제를 대입해서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녀가 제게서 그 아이의 기억을 점점 지워 내고 있는 것인지.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둘 중 그 무엇도 그가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테런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질끈 눈을 감고 로제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오랜만에 꿈속에서 보았던 그 아이의 얼굴이 벌써 흐릿해졌다.
로제를 떠올리려 할수록 선명해지는 것은 반갑다는 듯 ‘공작님!’ 하고 부르며 저를 향해 웃던 로제타의 환한 얼굴뿐이었다.
테런은 침음을 삼켰다.
당신이 로제였으면.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목구멍을 할퀴듯 긁으며 간신히 흘러나온 목소리는 상처 입은 짐승의 것마냥 음울했다.
이기적인 욕심에.
무겁기 짝이 없는 질척거리는 미련에.
스스로에게 넌더리가 났다.
로제타를 보며 웃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자꾸만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에게 향하는 마음을 애써 무시하며 외면하는 겁쟁이 주제에.
* * *
“좋은 아침이군.”
“좋은 아침입니다, 각하.”
짤막한 아침 인사를 나눈 뒤 테런은 아무런 투정의 말도 없이 제 자리에 가 앉았다.
그는 와튼이 가져다 놓은 홍차를 가볍게 한 모금 머금고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곧바로 일에 몰두하기 위해 서류를 펼쳐 드는 제 상관의 모습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긱스가 불쑥 말을 꺼냈다.
“각하. 요즘 좀 뜸하십니다?”
“뭐가 말인가?”
테런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최근 툭하면 클리프 영애를 만나러 가지 않으셨습니까?”
그 순간 테런의 행동이 아주 미세하게 멈칫거렸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은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답했다.
“내가 언제.”
“설마 지금 시침 떼시는 겁니까?”
테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하자고, 긱스. 자네 입버릇이지 않나. 일.”
긱스는 테런이 로제타와 관련한 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눈치챘다.
“그래도 내일 일정은 잊지 마십시오. 대부인께 책잡히실 겁니다.”
“……기억하고 있네.”
테런의 짤막한 대답을 들은 긱스가 제 책상에서 무엇인가를 주섬주섬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 좀 먼저 살펴봐 주십시오. 지난번에 지시하신 것을 알아본 일입니다.”
그는 조금 전과는 다른 표정으로 처리한 보고서를 들고 와 테런에게 공손하게 내밀었다.
테런은 첫 장을 넘기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종이에 적힌 글자와 숫자들을 읽어 내려가는 눈길이 바빴다.
예상대로 최근 광물의 가격은 변동 폭이 없었다.
“정말 누군가 의도적으로 물량을 푸는 것 같군.”
테런이 혀를 찼다.
목소리에는 언짢음이 가득 묻어 있었다.
랭우드의 몰락 이후, 더 이상 광물이 생산되지 않고 있었다.
그 말인즉, 당시에는 이미 발견된 광산에서 채굴하여 시장에 유통하는 것이니 가격에 큰 변동이 없을 수 있다고 쳐도 현재는 그러면 안 된다는 소리였다.
랭우드가 건재했다면 모를까, 그 힘이 끊긴 지금은 자원은 유한했다.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면 가격은 필시 상승하는데 오히려 넉넉하다는 듯 풀리고 있으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테런이 거칠게 혀를 찼다.
“누가 장난질을 하고 있어.”
긱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일거리가 하나 더 늘겠군요.”
테런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시중에 유통되는 보석 중 상당수가 가짜일 확률이 높았다.
“귀족들을 상대로 한 사기일 확률이 높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긱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맞장구를 쳤다.
광물 중 가장 돈이 되는 것은 보석류이며, 그것을 장신구로 가공해서 착용할 만한 재력을 가진 것은 윌셔스 왕국에서 귀족과 일부 부유한 상인층 말고는 없기 때문이었다.
긱스는 테런의 책상 앞에 서서 설명을 보충했다.
“보고서 뒷장을 보면 아시겠지만, 철과 구리의 가격이 많이 뛰었고 최상급 보석인 다이아몬드나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의 가격도 세 배 이상으로 올랐습니다.”
테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보고서를 머릿속에서 분석했다.
“하지만 유색 보석은 종전과 같은 수준을 유지하는군.”
“특히 제이드와 진주가 그렇습니다.”
긱스에게 듣기로 현재 사교계에는 제이드(jade, 비취)와 진주를 소재로 한 장신구가 몇 년째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공통점은 모두 불투명한 보석이라는 점이다.
사교계의 유행이야 시시각각 변해 예측하기 어렵다지만 이렇게 꽤 장기간 같은 종류의 보석이 인기를 끈다.는 것은 분명 조작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나마 땅의 광물에 의존하지 않는 보석은 진주가 유일한데…….”
테런이 말꼬리를 흐리며 조금 더 생각에 잠겼다.
윌셔스 왕국에서 소비하는 진주는 전량 타국에서 수입해 오고 있었다.
에스테스 영지의 항구를 통해 들어오기 때문에, 입항 시 관세사에 정확한 개수와 가격에 대해 신고를 하지 않으면 내륙으로 들어올 수가 없다.
테런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항구에 신고된 물품 중 진주의 수입 비율이 유의 미하게 늘어났다는 보고를 받지 못했다.
게다가 만약 그런 이상 증세가 있었다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리도 없었다.
“아무래도 누군가 보석을 위조해서 불법적으로 이득을 편취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는 거의 확신에 차 있었다.
다른 보석도 아니고 진주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진주는 다른 광물에 비해 가짜를 만들기가 비교적 쉬웠기 때문이다.
동그랗게 모양을 빚어 유막을 씌운 뒤 광택을 내면,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일반인들은 대부분 속았다.
그러니 이 일엔 분명 대규모의 사기 조직이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제작자, 감정사, 유통자.
그리고 그들의 뒤를 봐 주는 사람까지.
테런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각하. 공론화에 신중하셔야 합니다.”
“물론이다마다. 조금 더 증거를 모아야지.”
테런이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머리가 아프다는 듯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잠깐 짚었다가 떼어 냈다.
“그나저나 보석 위조라니. 정말이지 간도 크군.”
긱스가 안경 너머 눈매를 조금 더 구기며,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남는 게 정말 있을까요? 원석을 가공하는 것보다 품이 더 많이 들지 않습니까? 인건비며 재료비며, 영 수지가 맞지 않을 것 같은데요.”
“모르는 소리.”
테런은 긱스의 의문을 짧게 일축했다.
“보석류는 오히려 위조하는 편이 훨씬 이윤이 많이 남을 거야. 인건비와 제작비를 제하더라도 말이지.”
그의 눈매가 한층 더 예리해졌다.
“아무래도 제이드와 진주로 가장 이득을 보고 있는 상단을 전수 조사 하는 게 좋겠군.”
테런은 마지막 장까지 후루룩 훑어본 뒤, 보고서를 던지듯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긱스. 현재 귀부인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보석상이 어디인지 알아보도록 하게.”
하지만 긱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부하에게서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이상함에 테런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고개를 들어 제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제야 긱스가 느릿하게, 능청을 떨며 입을 열었다.
“제가 조사해 오는 것보다 더 빠르게 알아 오실 분을 한 분 아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