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75화
“그게 누군가?”
테런이 솔깃해하며 되묻자 긱스가 짧게 헛기침하며 목을 고른 뒤 답했다.
“각하께서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바로 클리프 영애지요.”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튀어나온 로제타의 이름에 테런이 살짝 눈매를 찌푸렸다.
“……여기서 그녀의 이름이 왜 나오는 거지?”
긱스가 여상한 투로 대꾸했다.
“보석의 주 소비층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귀부인이죠. 사교 모임에서 보석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분이 어디에 있다고 그러십니까?”
테런의 푸른빛 눈동자에 잠시 그늘이 졌다.
긱스는 제 상사의 등을 살짝 떠밀어 줄 요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 얼른 화해하십시오, 각하.”
테런이 피식 웃었다. 자조하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화해는 무슨. 그런 거 아니네.”
그는 짧게 답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자신이 로제타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면 모를까, 화해라는 단어는 참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씁쓸함과 쓸쓸함, 그 경계 어딘가에 걸쳐 있는 듯한 테런의 얼굴을 내려 다보던 긱스가 안경을 검지로 살짝 추켜올리며 생각했다.
‘뭐가 저렇게 어려우신지.’
그냥 마음을 완전히 여시면 좋을 텐데.
차마 입 밖으로 꺼내 놓을 수 없는 말을 한숨과 함께 속으로 삼키며 긱스는 묵례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 * *
로제타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 묻어 있었다.
“괜찮나……?”
가장 점잖고, 또 화사해 보이는 드레스를 골라 입었으나 영 자신이 없었다.
그러자 한 발자국 뒤에 서 있던 레나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름다우세요.”
대놓고 칭찬을 듣는 건 언제나 쑥스러운 일이라 로제타는 잠시 볼을 붉혔다.
바로 오늘, 그녀는 테런과 함께 카밀라에게 인사를 가기로 했다.
에스테스 하우스 내에서 움직이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상견례를 하는 것이니만큼 제대로 갖춰 입는 것이 좋을 듯해 오전부터 부지런히 준비했었다.
그녀의 데뷔탕트이자 테런과의 약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랬기에 카밀라와의 만남을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카밀라 역시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테런의 제의를 수락했다.
하지만 서로가 피차 불편한 사이인 것은 변하지 않을 터이니, 석찬을 드는 것보다 오후 티 타임에 잠깐 보는 것으로 대신하자는 조건이 따라왔다.
「공작님께서 무척이나 죄송해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말 역시 테런이 직접 전한 것이 아니라 집사인 와튼을 통해서였다.
로제타는 와튼과 레나의 앞에선 괜찮다는 듯이 웃었지만, 마음의 씁쓸함은 지워 내지 못했다.
테런이 바쁜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아쉽고 서운한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 하면 안 되는데.’
로제타가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최근 테런의 태도가 한몫했다.
정확하게는 함께 외출했던 날 이후부터 묘하게 그와 거리감이 생겼다.
크라이슨 상회에서 함께 쇼핑을 하고, 수변 공원에 들어선 시장 구경을 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둘 사이는 훈훈했다.
‘아무래도 그…… 일 때문이겠지?’
그와의 입맞춤이 다시 떠올랐다.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오른손을 올려, 제 아랫입술을 손끝으로 만졌다.
벌써 며칠이나 지난 일이지만 방금 있었던 일처럼 기억이 생생했다.
그녀가 멍하니 입술을 만지작댈 때였다.
레나가 가볍게 질책하는 투로 로제타를 만류했다.
“영애. 그러면 입술을 다시 발라야 해요.”
“아! 미안해요, 레나.”
화들짝 놀라며, 로제타가 서둘러 손가락을 떼어 냈다.
검지와 중지의 지문이 있는 부분에 붉은 유분기가 묻어 있었다.
낭패라는 생각에 그녀가 서둘러 다시 거울을 바라봤다.
하지만 입술은 생각만큼 많이 지워져 있지 않았다.
옆에서 레나가 조언을 해 주었다.
“빰, 빰 해 보세요. 뭉개지듯 번지면 괜찮을 것 같은데.”
레나는 직접 흉내까지 냈다.
로제타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입술을 오므렸다가 펴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러자 색깔이 다시 고르게 퍼졌다.
그녀는 새끼손가락을 펴 뭉쳐진 질감을 톡톡 두드리며 조금 더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입이 말랐다.
거울 속 제 얼굴 중, 붉은 입술에만 시선이 갔기 때문이다.
다시, 그녀의 머릿속에 테런의 존재가 차기 시작했다.
‘공작님은…… 내가 많이 불편하신 걸까?’
그가 자신을 피하는 이유가 그것 말고는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그날의 입맞춤이 많이 불편했던 걸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난…… 그렇게 나쁘지 않았는데. 오히려 반대였는데…….’
로제타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진 걸 눈치챈 레나가 주위를 환기시키듯 손뼉을 마주쳤다.
“이제 준비하셔야죠. 슬슬 오실 시간이 되었어요.”
로제타가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화장대 위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 위엔 미리 꺼내 놓은 반지가 있었다.
테런이 정원에서 프러포즈하며 끼워 주었던 반지였다.
로제타는 실내에서도 영롱한 빛을 뽐내고 있는 다이아몬드를 손끝으로 살짝 만지다가 이내 들어 올렸다.
그런 뒤 자신의 왼손 약지에 밀어 넣었다.
금세 손가락이 묵직해졌다.
그게 마치 앞으로 자신이 견뎌 내야 할 무게인 것만 같아서 마음이 조금 비장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반지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방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께서 오셨나 봐요. 문 열어 드릴게요.”
로제타의 대답보다 레나의 행동이 더 빨랐다.
아직 테런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안 됐던 로제타가 또 무의식중에 입술을 한번 잘끈 씹어 물었다가 풀어 냈다.
그녀는 떨림을 숨기려는 듯 두 손을 꽉 쥐었다.
여린 손바닥 살 아래로 반지 알의 단단함이 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영애. 공작님께서 오셨어요.”
레나의 부름에, 그제야 로제타가 떨리는 숨을 들이켜며 문 쪽으로 돌아섰다.
바닥을 보고 있던 눈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자, 테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역시 로제타처럼 정장을 차려입고 온 터였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어딘지 묘하게 딱딱한 얼굴이라 로제타는 자꾸 긴장되었다.
“좋은 오후예요, 공작님.”
“좋은 오후입니다. 로제타 양.”
테런은 뒷짐을 진 상태로 로제타를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인사의 말을 건네고 난 뒤, 무엇인가 한마디 더 그녀에게 건네려는 듯 입술을 벌렸지만,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는 듯 도로 다물었다.
어딘가 벽을 치는 것 같은 그의 태도에 로제타는 조금 민망하고 뻘쭘해지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수줍게 말을 전했으나, 테런에게선 ‘그런가요.’ 하는 무심하고 무뚝뚝한 대답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보다 못한 레나가 살짝 테런을 타박했다.
“바쁘신 건 알지만, 영애를 너무 외롭게 하셨어요.”
로제타의 시선이 자꾸만 아래로 떨어졌다.
눈 둘 곳을 찾기 힘든 기분이었다.
“그럼…….”
테런이 말꼬리를 살짝 흐렸다가 이내 이었다.
“그럼 가시죠.”
“……네.”
로제타가 잔뜩 기합이 들어간 얼굴로 그에게로 다가왔다.
스쳐 지나갈 때, 레나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생각보단 괜찮을 거예요.’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고맙다는 듯 레나에게 살짝 웃어 준 뒤, 로제타는 테런의 팔짱을 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 붙어 있었지만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전혀 없었다.
카밀라를 만나러 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동안, 테런과 로제타가 목소리를 낼 때는 간간이 마주치는 사용인들이 건네오는 인사에 짧은 답을 돌려줄 때뿐이었다.
테런의 얼굴은 심각했고, 굳어 있었다.
그런 그를 곁눈질하며 훔쳐본 로제타는 덩달아 몸을 굳혔다.
이런 분위기에서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 그녀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테런이 다시 말을 붙여 온 것은 약속 장소인 썬룸의 문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는 문을 열기 직전, 손잡이를 가만히 쥔 채로 말했다.
“할머님께선 이 썬룸을 좋아하십니다.”
“아…… 그러시군요. 따뜻한 걸 좋아하시나 봐요.”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로제타가 작게 대답을 하자, 테런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입술에 힘을 주어 한 번 꾹 다물더니 이내 가볍게 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오늘 만나면, 할머님께서 당신에게 심한 말씀을 하실 수도 있다는 겁니다.”
로제타가 시선을 들어 올리자, 미안 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테런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제야 자신이 아는 그인 것만 같아, 그녀는 살짝 미소 지으며 턱을 몸 쪽으로 끌어당기며 답했다.
“각오하고 있어요.”
테런의 이맛살이 조금 더 찌푸려졌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 모진 말들을 감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로제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다 이내 빠른 속도로 깜빡였다.
테런은 차분하게, 당부하듯 그녀에게 한 번 더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무엇이 됐든 하세요. 뒷감당은 내가 할 테니까.”
이 순간, 로제타는 그 말이 그 무엇보다도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든든하네요.”
로제타는 고마움을 담아 그를 향해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작게 심호흡했다.
그녀의 가슴이 살짝 부풀었다가 꺼졌다.
로제타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테런이 썬룸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들어가죠.”
단지 한 발자국 안으로 들어섰을 뿐인데, 덥고 습한 기운이 확 느껴졌다.
로제타는 바닥에 깔린 납작한 돌을 밟으며 썬룸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넓은 야자수 잎 아래 설치되어 있는 하얀 티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카밀라가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