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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76화 (76/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76화

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혼자 있었던 데다가, 또 이 에스테스 공작가에서 가장 어른이니만큼 자세가 편할 법도 했지만, 카밀라는 꼿꼿했다.

곧게 세운 허리에서 그녀의 성격을 또 한 번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기에, 로제타는 마른침을 삼켰다.

인사는 테런이 먼저 건넸다.

“할머님. 저희 왔습니다.”

카밀라는 여전히 시선 한 자락 그들에게 주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살짝 가라뜨고 있었다.

우아한 동작으로 찻잔을 들어 올린 그녀가 소리 없이 찻물을 들이켰다.

카밀라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으나, 의식하고 있음은 안다.

로제타는 드레스 치맛자락을 넓게 펼치며 허리를 30도쯤 숙이며 인사를 했다.

“에스테스의 어른이신 대부인을 뵙습니다. 로제타 클리프라고 합니다.”

“…….”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지만 로제타는 괜찮았다.

이 정도는 예상했던 바였다.

그녀는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자세를 유지했다.

그녀는 충실히 윌셔스 왕국의 예법을 지켰다.

아랫사람이 먼저 인사할 것.

윗사람이 답인사를 하거나, 그만 몸을 일으켜도 좋다는 말을 건네기 전까지 그 인사를 유지할 것.

테런의 약혼녀였지만, 약혼식 전까진 그녀의 정식 신분은 에스테스 공작가의 가신인 클리프 남작의 딸이다.

그러니 예법상 준왕족 대접을 받는 공작 대부인의 허락 없이는 인사를 멈출 수 없었다.

제법 오래 버틸 각오까지 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테런이 곧바로 언짢은 티를 고스란히 내며, 재촉하듯 카밀라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할머님.”

그러자 그녀의 입에서 들으라는 듯 거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어쩜 그 잠깐을 못 참고 이리 재촉하는지.”

들릴 듯 말 듯 짧게 혀를 찬 카밀라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둘 다 자리에 앉게.”

그제야 로제타가 허리를 들어 올렸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드레스의 매무새를 짧게 정리하고, 테런의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흘깃 맞은편의 카밀라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감정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했다.

카밀라는 딱딱한 얼굴로 빈 찻잔을 끌어와 그 위에 티팟을 기울이며 직접 두 사람 몫의 차를 따랐다.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이니만큼 다과를 미리 준비해 놓고 사용인은 아무도 들이지 않은 듯했다.

‘그래도 차 한잔은 내어 주시는구나.’

로제타는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듯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들게.”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로제타가 감사 인사를 전하며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오른손으론 찻잔 다리를 잡고, 왼손으론 받침대를 들어 올렸다.

그 동작은 무척이나 우아했다.

다 로제타가 평소보다 다도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는 덕분이었다.

카밀라가 제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듯 뜯어보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하였다.

그래서 그에 따른 각오도 이미 마쳤지만 티 테이블의 폭이 생각보다 작아 가까운 거리가 적잖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로제타는 가만히 숨을 죽인 채,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입 안에 퍼지는 화한 맛의 정체는 박하 차였다.

자신도 모르게 힐끗 시선을 들어 카밀라의 안색을 살피는 순간, 눈이 마주쳐 버렸다.

하지만 카밀라는 시침을 떼고 있었다.

이 박하 차는 며칠 전, 자신이 인편을 통해 카밀라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었다.

때때로 정원을 산책하다가 카밀라를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카밀라의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답답하다는 듯 주먹을 쥔 상태로 제 가슴을 내려치기도 했고, 머리가 아프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마를 짚기도 했었다.

「대부인. 괜찮으세요? 의사를 부를까요?」

「……되었으니 그냥 가게.」

하지만 로제타는 계속 그녀의 상태가 마음에 남았고, 고민 끝에 소화 불량과 두통에 효과가 좋다는 박하 찻잎을 구매해 짧은 카드와 함께 레나의 편으로 선물했었다.

[에스테스의 지붕께서 편안하셔야, 집이 비에 젖지 않습니다. 모쪼록 건강 유의하시길.]

하지만 카밀라에게서 잘 받았다 어쨌다 하는 말이 딱히 돌아오지 않아, 어쩌면 자신이 선물한 것을 버렸을 수도 있겠다고 여기고 있었다.

‘물론 찻잎 하나로 점수를 딸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찻잎을 버리진 않으셨구나.

로제타는 어딘지 모르게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이내 목구멍으로 찻물을 흘려보냈다.

차를 마시길 기다렸다는 듯 카밀라가 입을 열었다.

“날 찾아오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두 사람 다 말이네.”

딱딱한 말에 로제타는 다시 긴장했다.

카밀라는 건조한 눈빛으로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대쪽 손으로 덮어 가릴까 하던 로제타가 멈칫했다.

굳이, 자신이 이것을 덮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반지를 가리는 대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어깨를 반듯하게 폈다.

로제타의 옆에서 테런이 불퉁하게 말했다.

“그 전에 미리 허락해 주셨으면 좋았을 일입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 없었기에, 로제타는 잠깐 놀랐다.

“결국 내 탓이라는 게로군.”

카밀라가 작게 혀를 찼다.

그사이 숨을 고른 로제타가 차분하게 입술을 떼었다.

“대부인.”

무시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이번엔 카밀라가 대답을 해 주었다.

“말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쌀쌀맞은 목소리에도 로제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곧 에스테스의 새사람이 됩니다.”

잠깐 숨을 고른 그녀가 이내 결연한 눈빛으로 카밀라의 시선을 마주하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제 조건이 많이 부족하다 보니, 대부인께서 만족스럽지 않으시리라는 것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좋은 마음으로 반겨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간결한 로제타의 말에 카밀라의 눈빛에 살짝 호기심이 어렸다.

로제타가 제게 보이는 태도가 여러모로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로제타는 자신이 더 잘할 테니 받아들여 주면 안 되겠냐 비굴하게 굴지 않았으며, 이미 결정된 사안이니 그냥 자신을 받아들여라 건방지게 굴지도 않았다.

그녀는 객관적으로 자신의 상황과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스스로 가여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테런과의 결혼을 행운이라 여기며 취해 있지도 않았다.

카밀라는 그 담담함과 침착함을 높이 샀다.

‘일전에 예상치 못하게 자리를 함께 했을 때도 강단이 있다고는 느꼈지…….’

카밀라는 로제타를 한번 떠보기로 했다.

그래서 일부러 사나운 말을 뱉었다.

“영애는 제 주제는 잘 알고 있으나, 염치를 모르는군.”

“할머님!”

모욕적인 말에 테런이 목소리를 높였다.

“부탁드렸습니다. 할머님께서 수십 년간 명예로 생각하시던 신조를, 부디 오늘도 관철해 주십사 하고요. 하지만 자꾸 이런 식으로 이 사람을 대하신다면, 더는 나눌 말씀이 없는 것 같습니다.”

테런의 음성에는 은근한 분노가 어려 있었다.

그는 카밀라가 로제타를 시험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미리 경고도 했고, 그 부분에 대해서 미안함을 일찍부터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도를 넘었다.

자신의 마음도 이렇게 참담한데, 당사자인 로제타는 오죽할까.

테런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제 할머니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제타 양. 일어나십시오. 썬룸에 들어오기 전, 내가 그대에게 한 말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공작님. 진정하세요.”

로제타는 앉은 상태로 테런의 소매를 조심스럽게 잡아끌었다.

테런이 자신을 바라보자 그에게 작게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가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 거칠게 숨을 들이켠 뒤 못마땅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로제타가 다시 카밀라 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대부인, 제게 염치를 모른다고 하셨지요.”

“그러하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씀이니까요. 그러나…… 제겐 그것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로제타의 음성은 차분했다.

“왜 그것이 자네에 필요하지 않은가?”

“염치와 수치가 밥 먹여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차분하지만 직접적이고, 또 염세적인 로제타의 대답에 카밀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로제타는 박하 차를 한 모금 더 마셔 입을 축인 뒤, 다시 천천히 제 할 말을 이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염치까지 차리면 결국 불행해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저는 줄곧 그런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녀라고 어찌 창피함을 모르겠는가.

자신에게 쏟아질 불친절한 시선과 쑥덕거림의 내용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그동안 헛된 꿈을 꾸지 않았기에 더더욱.

하지만 애석하게도 가난한 자가 염치를 차리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는 것이 로제타의 지론이었다.

‘잘’ 살아남기 위해선 뻔뻔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나 전생에서나 똑같은 일이었다.

그녀는 헛숨을 들이켜며, 마지막 진심을 솔직하게 내보였다.

“대부인.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남의 시선이 두려워, 혹은 신경이 쓰여서…… 제 스스로 행복할 수도 있는 길에 들어서는 걸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표정은 결연했고,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짧은 말에 모든 각오와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이 세계에서 의식을 차리고 난 이후 쭉, 로제타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 중에 제 의지로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녀에게 주어진 상황은 언제나 최악에 가까운 수였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중 무엇도 그녀의 바람으로 이뤄진 게 없었다.

그래서 로제타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 언제나 최선을 다해 숙고하였다.

그리고 클리프 남작가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 이후로, 그녀가 내리는 모든 결정은 철저히 ‘자신’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남을 신경 쓰고, 배려하고, 눈치 보기보다는 자신을 먼저 챙길 것.

그것이 이번 생에서 그녀가 제 삶을 찾는 방법이었다.

테런과의 계약 결혼을 결심한 이유도 클리프가에서 벗어나 ‘자신답게 살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로제타의 대답을 들으며 미지근하게 식은 찻물을 들이켠 카밀라는 생각했다.

제 눈앞의 이 어린 영애는 선택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라고.

그사이 로제타가 긴장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행복해지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하자고 그리 마음먹었어요.”

이용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마음에 스미는 미안한 감정은 외면할 수 없었다.

단어 자체가 가진 뜻은 나쁘지 않았지만, 현재 용례가 적당치 않게 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제타는 곁눈질로 테런의 안색을 살폈다.

그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뜨끔했던 마음은 이내 괜찮아졌다.

테런이 괜찮다는 듯, 자신을 보며 눈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무엇이 됐든 하세요. 뒷감당은 내가 할 테니까.」

그저 빈말로 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의 로제타를 이해하고 있었고, 그녀는 그것에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생판 남인 로제타를 위해, 그 누구보다 가까운 혈육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안다.

그런데 테런은 거의 무조건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녀의 편에 서 주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용기를 얻은 로제타는 짧게 숨을 들이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 저보다 나은 혼처가 여럿일 겁니다. 그러니 대부인께서 굳이 제가 아니어도 된다고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는 바예요.”

로제타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테런은 에스테스 공작가의 가주이지만, 카밀라의 눈에는 아직도 서투르고 치기 어려 보일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테런과 로제타보다 더 오래 삶을 살아왔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로제타는 카밀라가 엄격하긴 하지만 테런을 아낀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혼을 반대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그것에 닿아 있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 사랑하는 손자가 보다 더 나은 조건의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것을 희망하는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번 일은 카밀라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에, 테런이 선택한 로제타가 들어맞지 않음으로 잡음이 일게 된 것이다.

표면적으로 카밀라는 테런을 가주로 대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카밀라는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쭉 보아 왔으니, 심리 기저에 계속해서 그를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로제타는 바로 그런 부분을 파악해 냈다.

모든 아이는 반드시 어른으로 자란다는 말을 어떻게 카밀라에게 전하면 좋을까.

며칠을 고민하던 로제타는 마침내 적당한 말을 찾아내었다.

그녀는 찻잔을 쥐고 있는 양손을 오므리며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대부인. 저도 나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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