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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77화 (77/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77화

로제타는 스스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듯 멋쩍게 미소 지어 보였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카밀라에게 손자인 테런의 안목을 믿어 보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저는 자신이 있어요. 제가 그리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공작님의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드릴 자신이요.”

그녀가 곧은 시선으로 카밀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진심 어린 부탁을 마지막 한마디로 전했다.

“그러니 대부인께서도 공작님과 제가 한 선택이 틀린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시면 안 될까요?”

말을 마친 그녀가 카밀라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속 모를 눈빛으로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카밀라는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카밀라는 묵직한 숨을 삼켰다가 도로 길게 뱉은 뒤, 로제타를 향해 물음을 건넸다.

“하고 싶은 말은 끝났나?”

“……예.”

“흠. 그래, 좋아. 영애가 무슨 말을 내게 전하고 싶었던 건지는 충분히 알아들었네. 그럼 이제 내가 그에 대한 답을 돌려주어야 할 때로군.”

로제타가 긴장하며 허리에 더욱 힘을 주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아이가 성장코자 하는데, 그것을 기꺼워하지 않을 부모는 없네.”

방금 그 말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카밀라에게 제대로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로제타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두 사람을 허락하지. 다만 명심해 두게, 영애.”

카밀라는 어떻게 들으면 무뚝뚝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꽤 많은 의무들이 영애를 짓누를 걸세. 지금까지 내가 그대를 대했던 것보다 더 혹독한 시선과 말이 따라올 것이고.”

“그것 역시 제가 선택함으로써 따라오는 것이라면 기꺼이 짊어야죠.”

카밀라는 로제타를 다시 눈여겨보았다.

자신이 선입견에 가리어 제대로 사람을 살피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카밀라가 제 손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테런. 당돌한 사람을 골랐구나.”

“당돌함이 아니라, 강단이 있는 사람이죠.”

카밀라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혀를 찼다.

“원. 한마디도 지질 않는구나. 그래. 네 말이 맞다.”

첫 만남에서 느낄 수 있었던 배척의 감정이 더 이상 엿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순 없었기에, 로제타는 어깨를 굳히고 가만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카밀라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나이가 들어도 고운 손으로 제 눈썹 근처에 차양을 만들듯이 살짝 덮으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금세 다시 뜬 눈은 생각보다 화기가 엿보이지 않았다.

“대화를 나눠 보면 생각이 바뀔 거라는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카밀라의 시선이 다시 로제타에게로 향했다.

“거침없이 솔직한 게 매력적인 아가씨야.”

“……후한 평이십니다.”

“에스테스 공작가를 이끌기엔 이런 성격도 나쁘진 않겠지.”

카밀라는 조금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제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대부인.”

로제타의 말에 카밀라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할머님.”

“……네?”

“호칭을 바로 하자꾸나. 영애는 더 이상 에스테스 공작가의 손님이 아니니.”

로제타가 슬그머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테런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제야 그녀가 수줍게 볼을 붉히며 작게 대답했다.

“네, 할머님.”

* * *

방으로 돌아온 카밀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하녀장 엠마 부인은 깨끗한 타월을 뜨거운 물에 담근 뒤 물기를 꽉 짜내었다.

그런 뒤 각을 맞춰 길게 접은 뒤 카밀라에게 가져다주었다.

“고맙네, 엠마.”

카밀라는 스팀 타월을 받아서 제 눈두덩에 덮었다.

재차 한숨이 입술을 가르고 튀어나왔지만, 표정은 그리 썩 나빠 보이지 않았다.

“만나 보신 분은 어떠셨습니까?”

엠마 부인은 특유의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아이더군.”

후한 평가였다.

“출신이 비천하여 선입견을 가졌었는데, 꽤나 심지 굳은 성격으로 자란 모양이야.”

“만나 보신 뒤에 생각이 바뀌신 것 같습니다.”

“부정하진 않겠네.”

카밀라가 슬쩍 웃었다.

“늙으니 눈도 어두워졌던 모양이야. 한미한 가문과 그 붉은 머리카락만 빼면 제법 괜찮은 아이였네.”

얼추 뜨거운 김이 가시자, 카밀라는 미련 없이 수건을 걷어 내었다.

“미리 말해 두는데 찻잎 하나 받았다고 마음이 돌아선 건 아니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찻잎이야, 노마님께서 마음만 먹으신다면 일 년 치의 양을 구매하실 수도 있는 것을요.”

카밀라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나는 그저 그 아이의 마음 씀씀이가 곱다고 생각했네. 내가 자신을 환대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를 걱정해 주는 그 착한 마음이, 마음에 들었어.”

자신을 반기지 않는 사람을 진심으로 걱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카밀라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사이, 엠마 부인이 조심스레 질문 했다.

“그거야 클리프 영애가 허락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니, 노마님께 잘 보이려고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자네 말도 맞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카밀라가 조용히 웃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찻잎과 함께 보낸 카드에서 그런 아부는 느껴지지 않았네. 게다가 나더러 지붕이라고 하더군.”

카드의 내용을 곱씹어 보는 카밀라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가 건강해야, 테런과 클라리사가 슬프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지. 내가 결정적으로 마음을 돌린 건 그 카드 때문이었어. 내 새끼들을 그리 생각하고 아껴 주는데, 할미가 되어서 그만 져 주어야지. 아니 그런가?”

카밀라는 식은 수건을 엠마 부인에게 건넸다.

그런 뒤 하녀장을 바라보며 대뜸 질문을 건넸다.

“엠마.”

“예, 노마님.”

“자네가 보기엔 클리프 영애가 테런에게서 그 아이를 지워 낼 수 있을 것 같은가?”

엠마 부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의견을 보태기가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밀라는 그녀의 대답을 원하듯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었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하녀장은 조심스럽게 제 의견을 꺼내었다.

“글쎄요……. 지워질 기억이었으면 공작님께서 그리 오랜 시간 고통받으셨겠습니까.”

딱히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었으나, 카밀라가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네 생각도 그렇구만.”

그녀의 목소리가 제법 씁쓸했다.

카밀라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중얼거렸다.

“흠. 아무래도 반대를 조금 더 할 것을 그랬나?”

“어찌 또 그러십니까. 이왕 허락해 주신 것, 좋은 마음으로 응원해 주셔야지요.”

카밀라가 피식 웃었다.

“원래 사랑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장애가 있어야 더 불타오르고 그러지.”

카밀라는 로제타를 바라보던 제 손자의 눈빛을 떠올렸다.

분명 그녀를 이성으로 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읽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하필이면 왜 또 붉은 머리인지.”

카밀라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자신의 손자를 안다.

테런은 분명 로제타가 랭우드의 아이와 같은 머리 색을 가지고 있기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걸 테다.

“간 아이는 안타깝지만, 난 그래도 살아 있는 내 손자가 더 소중하다네, 엠마.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테런의 마음속에서 그 아이가 자리를 좀 비워 내 줬으면 싶어.”

하지만 어려운 일이겠지…….

재차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카밀라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욕실로 걸음을 옮기자 뒤따라온 엠마 부인이 보석함을 내밀었다.

일전에 리스턴 후작가에서 받은 선물이었다.

보석함의 뚜껑을 연 그녀가 상자 속에서 불의 정령석을 꺼내었다.

그것을 들고 욕실로 걸음을 옮긴 뒤 퐁당 빠트렸다.

욕조에 담긴 물속으로 가라앉는 정령석을 빤히 바라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로제타가 테런의 메마른 가슴에 씨를 뿌리고 그 싹을 움트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쌍한 제 손자를 이제 그만 슬픔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려 주었으면 좋겠다고.

* * *

리스턴 후작가.

바론은 내내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거칠게 벗어 던졌다.

“여긴 참, 언제 봐도 칙칙하단 말이야.”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마커스의 서재를 품평한 뒤, 그는 그곳이 마치 제 방이라도 되는 듯 아무렇게나 소파에 드러누웠다.

“패트릭. 와인 한 잔만 갖다주겠나? 목이 좀 마른데.”

“예, 전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의 뒤를 따라 서재 안으로 들어 왔던 패트릭이 곧장 대답했다.

그는 소파 테이블 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들고 왔던 수석을 서둘러 내려놓았다.

그런 뒤 로브를 채 벗지도 못하고 서재 한쪽 벽면에 장식되어 있는 와인 셀러로 다가가 포도주 한 병을 꺼냈다.

패트릭이 코르크를 따고 있는 사이, 마커스가 바론의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살갑게 인사했다.

“나들이는 즐거우셨습니까, 전하. 패트릭이 전하를 잘 수행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음. 아주 즐거웠지. 신기한 것도 보았고 말이야.”

“신기한 것이요?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신도 궁금해지는군요. 무엇을 보고 오셨는지 귀띔해 주실 순 없으십니까?”

바론은 소파 팔걸이에 꼬아 놓은 발목을 걸어 놓고 까닥이고 있었다.

마커스가 그런 바론의 자세를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능숙히 표정을 지워 냈다.

그사이, 패트릭이 검붉은 포도주가 담긴 와인 잔을 바로 가까이의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런 뒤 긴장된 목소리로 어떤 술을 가져왔는지 짧게 설명을 덧붙였다.

“케이노턴 지방의 포도로 만든 29년산 와인입니다.”

“오! 좋은 것이로군.”

바론이 금세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단숨에 와인을 반이나 비워 내었다.

“크으.”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바론이 콧잔등을 심하게 한번 찌푸렸다.

그런 후 마치 노래를 부르는 듯 마커스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게, 후작.”

“예, 전하. 말씀하십시오.”

“내가 오늘 패트릭 영식과 평민 지구에 나갔다가 뭘 봤는지 아나?”

“글쎄요.”

바론은 바로 대답해 주지 않고 혼자 재미있다는 듯 킬킬거렸다.

리스턴 후작은 원래 그리 인내심이 긴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니만큼 지금은 자신이 참으며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람 좋은 척 웃으며 물었다.

“무엇을 보셨길래 이리 뜸을 들이십니까?”

바론이 킬킬거리며 머리카락을 걷어 냈다.

물을 다스리는 왕가의 자손이라는 증거인 푸른 머리카락이 마치 물결이 갈라지듯 그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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