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78화
바론은 잘생기긴 했으나, 다소 날티 나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평민 지구의 수변 공원에 오늘 장이 서더군.”
“그랬군요.”
평민들의 삶이야 어찌 되든, 그것은 마커스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충 건성으로 대답하며 바론이 어서 본론을 꺼내길 기다렸다.
“그런데 거기에 에스테스 공작이 있지 뭔가!”
“에스테스 공작이, 거길 말입니까? 대체 왜…….”
그 순간 마커스의 눈이 찌푸려지다가 가늘어졌다.
조금 불안해 보이는 그의 표정을 눈에 담은 바론이 걱정 말라는 듯 과장되게 허공에서 손사래를 쳤다.
“뭐, 그리 심각해질 필요는 없어. 나도 처음에는 그가 무슨 낌새를 알아차리고 온 건가 했는데 아니더라고.”
“그러면 대체 왜…….”
바론이 피식 웃었다.
그는 와인 잔의 다리를 잡고 크게 원을 그리듯 천천히 돌렸다.
그런 뒤, 잔 안에서 액체가 도는 속도에 맞추기라도 하듯 저 역시 느릿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옆에 그 소문의 약혼녀를 끼고 있더군.”
“약혼녀라면…… 그 야만인의 피가 섞였다는 여자를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바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테스 공작이 꽁꽁 싸매고 있길래 꼼짝없이 그들의 약혼식 때나 얼굴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운이 좋았지.”
그는 낮에 보았던 로제타의 외모를 다시 떠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내가 꽤 많은 여자를 만나 봤지만 그 여자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본 적이 없단 말이야.”
바론은 입맛까지 다시며 중얼거렸다.
“테런 그 자식의 취향이 나랑 이렇게 겹칠 줄은 몰랐는데.”
바론은 테런과 동갑이었다.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사이기도 해서, 때때로 그를 편하게 불렀다.
“복 받은 놈이야. 진심으로 부럽군. 후. 테런이 아버지께 약혼을 인가받기 전에 내가 먼저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그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투로 중얼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팔자는 더럽기도 하지. 테런은 그렇게 미인이랑 결혼을 하는데, 나는……. 어휴. 약혼녀라고 있는 게 그런 어린애니.”
클라리사가 예쁘장하게 생긴 것은 잘 알고 있다.
아이가 성인으로 성장하면 오늘 본 테런의 약혼녀만큼 아름다워지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은 됐다.
하지만 나이 차가 너무 났다.
자신이 아무리 여자를 밝혀도, 어린애는 대상 외였다.
그 점만은 아주 확고했기 때문에, 바론은 자신의 약혼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가문 간의 약속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어린 애를 내게 갖다 붙이지? 그렇지 않나, 패트릭?”
“예? 예, 그렇습니다.”
바론이 거칠게 혀를 찼다.
눈치를 보며 가만히 서 있던 패트릭은 바론이 제게 묻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차라리 체이스와 약혼을 시키지. 후우.”
바론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체이스는 그의 늦둥이 동생으로, 이제 막 열 살이 된 터였다.
소년은 바론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조용하고 소심하며, 활동적이기보단 정적이었고, 책을 좋아했다.
게다가 난봉꾼인 제 형과 달리 숫기가 없고 낯가림도 많이 했다.
바론은 계속해서 혀를 찼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이를 생각하자면 이 약혼은 자신이 아니라 제 동생 쪽과 맞는 것 같았다.
“하아. 노친네들 진짜…….”
바론의 할아버지와 테런의 할아버지가 에스테스 공녀가 태어난다면 왕비로 맞이한다는 혼약을 맺어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물론 그때는 아직 클라리사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다.
바론은 계속해서 투덜거렸고 패트릭은 어색하게 맞장구쳤다.
하지만 마커스의 관심사는 다른 데 있었다.
이 서재에 오로지 그들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행여 누군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엿들을까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물었다.
“전하. 혹 공작에게 오늘 외출하신 일을…….”
“아. 그 점은 걱정 말게. 공작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다행이군요.”
마커스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제야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진 수석의 존재가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전하. 그런데 저것은 무엇입니까?”
마커스가 눈으로 수석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바론이 아는 척을 했다.
그의 시선이 마커스를 따라 수석 쪽으로 돌아갔다.
“좋은 걸 짚었군, 후작. 까딱했다간 말 꺼내는 것도 잊고 그냥 돌아갈 뻔했으니까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뒤, 바론은 손에 들고 있던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마커스는 수석을 잠깐 눈에 담았다가 이내 흥미가 사라졌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얼핏 보기에도 광물이든, 예술품이든 그 어느 쪽으로도 가치가 없어 보였다.
마커스는 별 기대가 되지 않는다는 듯 바로 관심을 거두었지만, 바론은 달랐다.
“후작. 자네 눈엔 이것이 무엇으로 보이는가?”
뭐 그런 질문이 다 있냐는 듯 마커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시시껄렁한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는 게 살짝 귀찮아 보이기도 했다.
“뭐…… 그냥 평범한 돌 아니겠습니까? 평민들이 어디서 귀족의 취미 생활을 보고 흉내라도 낼 셈으로 길에 굴러다니는 돌을 주워 따라 만든 것이겠지요.”
마커스의 대답에 바론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군.”
“아닙니까?”
“이건 말일세.”
바론이 살짝 말꼬리를 끌다가 이내 눈을 가늘게 휘며 대답했다.
“오팔이네.”
“……예?”
마커스의 얼굴이 다소 얼빠진 것처럼 변했다.
그만큼 바론의 말을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커스는 조금 멍한 눈빛으로 수석을 건너다보았다.
“저게 어떻게 오팔…….”
황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근처에 서 있던 패트릭이 개미가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바론의 말을 보탰다.
“정말입니다, 아버지. 감정사에게 이미 감정도 마쳤습니다. 오팔 중에서도 최상급인 블랙 오팔이라고 합니다.”
“허어. 이게, 어떻게…….”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그런 마커스를 이해시키기 위해, 바론은 직접 수석의 윗부분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런 뒤 내내 나무 받침대에 받쳐 있던 아랫부분을 마커스를 향해 보여 주었다.
“세상에.”
마커스가 헛숨을 들이켜며 잠시 말을 잃었다.
“참고로 이 부분은 구매한 뒤에 감정을 받으며 갈아 낸 것이네. 원랜 그냥 돌이었어.”
바론이 제게 보여 준 돌의 아랫부분이 갈려 있었는데, 연마된 그쪽에서 보이는 색깔이 표면과 달랐다.
검은색 바탕에 무지개처럼 오색찬란한 빛이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작. 그냥 못생긴 돌덩이구나, 하고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이 수석을, 내가 어떻게 알고 사 왔는지 궁금하지 않나?”
마커스가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이제야 흥미가 동한다는 듯 상체를 조금 앞으로 기울이기까지 한 상태였다.
“진심으로 궁금합니다. 전하, 대체 어떻게 이게 오팔 원석이라는 것을 아셨습니까?”
대부분의 보석이 그러하겠지만, 오팔 역시 돌의 단면에 드러난 유색 부분을 통해 발견된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수석은 아까의 상태로만 판단하자면, 그냥 돌덩어리 그 자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굳이 특이점을 하나 찾자면 한가운데 실처럼 아주 얇게 금이 갔다는 것 말고는 없었다.
마커스는 대답을 기다리듯 바론의 입을 빤히 쳐다보았다.
다행히도 바론은 이번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입을 열었다.
“테런의 약혼녀가 발견했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여자가 대체 어떻게……?”
바론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물론 그 여자도 확신은 없었던 것 같아. 긴가민가하더라고. 옆에서 그 말을 몰래 훔쳐 듣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 봤는데 빙고. 당첨이 된 것이지.”
바론은 다시 받침대에 돌을 꽂아 넣었다.
그런 뒤 눈을 휘며 제 앞의 수석을 천천히 만지기 시작하며 중얼거렸다.
“그 여자, 아주 재밌는 것 같더라고.”
세 남자의 시선이 모두 수석에 모였다.
그중, 마커스의 눈빛이 가장 가라앉아 있었다.
* * *
데뷔탕트 당일.
연회의 시작은 저녁이었다.
내빈들이 왕궁의 연회장에 먼저 들어 음악을 반주 삼아 가볍게 담소를 나눈다.
그들이 얼추 다 모였으면, 주빈이 가장 늦게 입장한다고 했다.
“그럼 난 먼저 가 있으마.”
준비를 마친 카밀라는 먼저 왕궁으로 떠났다.
“언니. 진짜 아름다우세요!”
로제타가 성장을 마치자 방 한편에 얌전히 앉아 있던 클라리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손뼉을 마주쳤다가, 이내 로제타를 향해 엄지를 척! 들어 올려 보였다.
“언니가 최고예요!”
저녁 연회에 미성년은 참석할 수 없으므로 클라리사는 함께 갈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점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그래서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마담 유리가 오기 전부터 로제타의 방으로 건너와 있었다.
“클라리사, 칭찬은 너무 고맙지만…… 계속 그렇게 띄워 주면 내가 너무 부끄러워.”
“하지만 정말인걸요?”
답답하다는 듯 잠깐 얼굴을 찡그렸던 클라리사가 냉큼 로제타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이는 그녀의 드레스를 밟지 않으려 바닥을 세심하게 살피고는, 로제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런 뒤 그녀를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다.
“이것 보세요! 진짜 예쁘죠?”
로제타가 시선을 들어 거울을 쳐다봤다.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하얀 드레스에, 옅은 화장.
마담 유리가 혼신을 다해 만든 드레스는 가벼웠고 아름다웠으며, 귀에서 차랑거리는 귀걸이는 왠지 느낌이 좋았다.
왠지 모를 들뜸으로 로제타의 가슴이 살짝 부풀었다.
그때, 거울 너머로 제게 다가오는 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공녀님, 잠시만요.”
클라리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레나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왜 그래요, 레나?”
로제타가 천천히 몸을 레나 쪽으로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