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79화
그녀의 손에는 새하얀 꽃 두 송이가 들려 있었다.
“자, 영애. 이것까지 귀에 꽂으시면 준비는 끝이에요.”
“무슨 꽃이에요?”
“샤프란이랍니다. 윌셔스의 오랜 전통이죠.”
로제타가 신기하다는 듯한 얼굴로 꽃을 바라보았다.
생전 이런 쪽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전부 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데뷔탕트를 치르는 영애들은 모두 이 꽃을 귀나 머리에 꽂아요. 영식들은 행커치프와 함께 꽂거나 부토니아로 만들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샤프란의 꽃말 때문이랍니다.”
레나는 친절한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꽃말이야 붙이기 나름이라, 같은 꽃이라 하더라도 그 의미가 다 다를 순 있어요. 하지만 윌셔스 왕국에서 사프란은 보통 이런 의미로 사용한답니다. ‘후회 없는 청춘’.”
“아…….”
“데뷔탕트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죠?”
“그렇네요.”
로제타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레나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조금 늦었지만 성인이 된 걸 축하 드려요, 영애.”
그녀는 로제타의 왼쪽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그 부근에 준비해 온 샤프란 꽃을 차례로 꽂았다.
레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꽃을 꽂은 로제타를 잠시 바라봤다.
그러다 바로 만족스럽다는 듯이 두 눈을 휘고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역시. 생각한 것만큼 잘 어울리세요.”
“……고마워요.”
“숲의 요정 같아요!”
옆에 서 있던 클라리사 역시 밝은 톤으로 칭찬 한마디를 보탰다.
로제타가 클라리사를 돌아보며 따뜻한 눈길로 웃었다.
“고마워, 클라리사.”
그녀가 아이에게로 팔을 뻗자, 몇 걸음 물러서 있던 클라리사가 재빨리 다가와 손을 잡았다.
클라리사의 작은 손을 힘껏 잡으며, 로제타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없더라도 약은 잘 챙겨 먹고. 알았지?”
클라리사가 ‘피-.’ 소리를 내며 볼을 부풀렸다가 바람을 빼내었다.
“오늘은 제 걱정 그만하세요. 언니가 주인공인 날이잖아요.”
“그래도. 걱정돼서 그래.”
옆에서 레나가 그런 둘을 보며 웃었다.
“걱정 마세요, 영애. 공녀님 약은 제가 직접 챙길 테니까요.”
“레나가 그렇게 말해 주면 안심이에요.”
로제타가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으로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죠?”
“이제 내려가 보셔야 해요.”
그녀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클라리사를 돌아보았다.
“그럼 클라리사. 언니 갔다 올게.”
“언니, 잠깐만요!”
나가려던 그때, 클라리사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무엇인가 비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듯 입 옆에 손바닥을 세워 가림막을 만들고 있었다.
“왜 그러니?”
로제타가 웃는 얼굴을 하고서 아이의 키에 맞춰 상체를 살짝 굽혔다.
머리를 땋아 올리지 않았기에 긴 머리카락이 중력에 따라 살짝 앞으로 쏟아졌다.
로제타가 손가락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걷어 귀 뒤로 살짝 넘기자 홍조가 피어오른 하얀 뺨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때, 여린 피부 위로 말캉한 감촉이 닿았다가 순식간에 떨어졌다.
쪽!
로제타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고개를 천천히 돌리자 클라리사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클라리사……?”
“응원이에요, 언니.”
클라리사는 수줍은 얼굴로 눈을 살짝 아래로 떨어트린 뒤, 로제타의 오른손을 자신의 양손으로 꼭 잡아 턱 끝까지 끌어 올렸다.
마치 로제타의 손을 쥐고 기도하는 모양새였다.
“오늘이 언니한테 가장 좋은 날 중 하나였으면 좋겠어요.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로제타의 눈빛에 감동이 차올랐다.
물기까지 살짝 어리려는 듯 촉촉해지자 클라리사가 얼른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앗, 언니! 울면 안 돼요! 화장 지워진단 말이에요!”
그 귀여운 타박에 로제타가 눈을 둥글게 휘었다.
“정말 너무 귀여워. 널 어떡하면 좋니?”
로제타는 드레스가 구겨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주저앉아 클라리사의 몸을 힘껏 안았다.
“언니가 제 가족이 되어 줘서 너무 기뻐요.”
작은 손이 조심조심 팔을 뻗어 그녀의 몸을 같이 끌어안으며 작게 속삭였다.
* * *
테런을 만나러 이동하며, 로제타는 그에게서 들은 데뷔탕트 순서를 복기했다.
‘입장하고, 국왕 부처에게 인사하고, 4대 정령의 신상에 인사하고, 그리고 첫 춤을 추고…….’
저녁 연회는 보통 새벽녘까지 이뤄 지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기에 로제타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나선형 계단에 다다랐다.
반쯤 내려가자 테런이 계단 아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변 공원에서 아찔한 입맞춤 사고가 있었던 이후, 그와 조금 어색해진 기분이었다.
‘그래. 공작님도 날 보기 민망하셔서 그런 걸 거야.’
로제타는 소란한 속마음을 달래며 애써 웃는 낯을 만들어 계단을 내려갔다.
그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테런이 고개를 돌려 위를 쳐다봤다.
한 걸음씩 계단을 밟아 내려오는 로제타를 바라보던 그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테런의 눈빛은 마치 폭풍우 치는 밤바다의 파도처럼 심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뜨거운 무엇인가가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기분이 느껴졌다.
어느덧 로제타가 마지막 계단을 밟아 아래로 내려왔다.
“많이 기다리셨나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테런의 앞에 선 그녀가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그를 올려다보는 로제타의 눈빛이 살짝 들떠 있었다.
이렇게까지 제대로 차려입은 것은 거의 처음이라, 테런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테런은 어딘가 깊이 가라앉은 푸른 눈빛으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로제타를 내려보다가 퍼석하게 마른 입술을 열었다.
“아름다우십니다.”
어딘가 꽉 졸린 목소리에다가 짧은 칭찬 한마디였지만, 테런에게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로제타의 얼굴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빛을 끌어모으기라도 한 것처럼 환해졌다.
꽃이 만개하듯 얼굴 전체로 퍼져 나가는 그녀의 웃음에 테런은 입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요? 감사해요, 공작님.”
로제타는 이내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살짝 내리고는, 계단을 내려올 때부터 눈에 띄었던 것을 입에 담았다.
쑥스러움이 가득 묻은 목소리였다.
“그 타이, 하셨네요.”
“……약속했으니까요.”
그는 일전에 로제타가 선물한 붉은 타이를 매고 있었다.
로제타의 양 볼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붉은 타이는 테런에게 잘 어울렸으며, 포인트 착장이 되었다.
심지어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과 맞추기라도 한 듯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과하지 않고, 잘 어울려요.”
“선물 주신 분의 안목이 뛰어나서 그렇죠.”
간단한 말을 주고받은 뒤, 로제타는 테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로 향했다.
어느샌가 이미 해가 서녘으로 저물어, 하늘은 어두운 핑크빛과 파란빛이 조화롭게 뒤섞여 있었다.
마차에 올라 문을 닫자 바퀴가 곧 구르기 시작했다.
에스테스 하우스를 떠나 왕궁으로 가는 마차를 향해, 집사 와튼을 비롯한 사용인 모두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로제타는 창밖의 풍경을 잠시 내다보았다.
흥분과 떨림으로 마음이 조금 들썩였는데, 다행히도 마차 내부가 조금 어두운 편이라 진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테런을 향해 질문했다.
“폐하와 왕비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제가 특별히 조심하면 좋은 게 있는지 궁금해요.”
“두 분은 모두 무난하신 분입니다.”
여상한 투로 대답하던 테런이 이내 미간을 살짝 좁히고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만, 왕세자 전하는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
로제타가 짧은 탄성을 터트리며 느릿하게 눈꺼풀을 감았다가 떴다.
“바론 전하 말씀이시죠?”
테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음 말을 고르느라 상당히 고심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현재 그의 자질이 어떻든, 바론은 에스테스 공작가가 충성을 바친 왕가의 일원이며, 미래에는 주군이 될 사람이었다.
또 가깝게는 클라리사의 약혼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난봉꾼인 것도 사실이긴 했다.
국왕이 다소 늦은 나이에 바론을 얻어서 그런지 첫아들을 다소 오냐오냐 키운 탓이 있었다.
바론은 여색을 탐했으며, 자신의 마음에 든 여성이라면 그녀에게 약혼자나 남편이 있는 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미인인 로제타에게, 그가 치근덕거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약혼식 내내 옆에 붙어 있는 게 아무래도 좋겠군.’
테런은 로제타 몰래 속으로 다짐을 거듭했다.
그는 로제타에게 바론의 기질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난감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말을 한 테런에게 굳이 그 이유를 되묻지 않았다.
이 세계의 원작이 되는 소설을 이미 알고 있기에, 원작 주인공인 바론이 어떤 인물인지 넘칠 정도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아마 이 세계에서 자신보다 바론을 경계하는 인물도 없을 거였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선뜻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건너다보며, 테런이 되레 물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안 물어보는 겁니까?”
“네, 묻지 않을래요.”
로제타가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지었다.
“충분한 이유가 있으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