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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81화 (81/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81화

그러고 나서 그것들을 구덩이 쪽으로 툭툭, 무성의하게 밀듯이 넣었다.

혹시라도 드레스에 흙이 묻을까 발목이 드러날 정도로 치맛단을 들어 올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시 테런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힘들진 않으세요?”

“전혀요.”

테런이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대단하세요.”

순수한 감탄이기도 했지만, 목소리에는 살짝 부러운 감정이 묻어 있었다.

‘나랑 실프는 이런 거 못 하는데…….’

하급 정령인 실프의 힘은 고작 물건 떨어트리기나 시원한 바람을 불러 오는 게 전부였다.

물체를 중력에 반하여 들어 올리는 일은 그만큼 큰 힘이 있어야 했다.

머리로는 일찍이 알고 있었으나, 명백한 힘의 차이를 직접 보게 되자 그녀는 왠지 조금 주눅이 들었다.

“빨리 마무리되어 늦진 않겠군요.”

“다행이에요.”

두 사람이 다시 마차에 오르자, 호위 기사들도 본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마부의 호령에 사륜마차는 이내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이 조금씩 멀어지던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푹 꺼져 있던 땅이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마치 살아서 숨 쉬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몇 번의 들썩거림 끝에, 움푹 파여 있던 구덩이에서 조금씩 흙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거품이 일어나듯 땅속에서 솟아오른 흙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구덩이를 메꾸었다.

길은 다시 매끄러워졌다.

누구도 이곳에 구덩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보수였다.

* * *

로제타와 테런은 다행스럽게도 늦지 않게 왕궁에 도착했다.

하지만 초대객들은 얼추 다 모인 모양인지, 연회장과 대기실을 잇는 두껍고 웅장한 문 너머로 제법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로제타는 긴장했다.

오늘을 위해 부단히 준비를 해 왔지만, 많은 사람의 앞에 나설 생각을 하니 마음이 적잖이 떨렸다.

그녀는 심호흡을 반복했다.

‘왜 이 세계엔 청심환이 없는 거지?’

불쑥 든 생각은 이내 원망으로 이어졌다.

윌셔스 왕국의 귀족들은 모든 증상을 차(茶)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불면증에 좋은 차, 긴장을 풀어 줄 때 마시는 차, 피임 차…….

‘그놈의 차, 차, 차!’

무엇으로 빚는 건지 그 재료만 알았더라도 약사들을 시켜 배합해 보기라도 할 텐데.

게다가 윌셔스의 국왕이 이미 연회장에 와 있다는 사실은 그녀가 부담을 느끼는 데 한몫했다.

평범한 연회 같았으면, 당연히 고귀한 왕족이 맨 마지막에 등장한다.

하지만 데뷔탕트의 경우, 이제 막 성인이 된 영식과 영애를 왕실의 어른에게 첫선을 보인다는 의미를 품은 파티였다.

하여 이에 한해서만 예외적으로 왕과 왕비가 연회장에 미리 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로제타가 계속 진정을 하지 못하자, 테런이 흘깃 그녀의 옆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는 자신의 팔짱을 끼고 있는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공작님, 왜 그러세요?”

그 신호에 로제타가 그를 돌아보자, 테런이 툭 하고 물었다.

“그렇게 긴장됩니까?”

“아, 네…….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서요.”

“따라 해 봐요.”

테런이 크게 숨을 들이켜고 길게 내뱉으며 심호흡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네?”

“얼른.”

그가 가볍게 재촉하자, 로제타가 얼떨결에 그 호흡법을 반복해 따라 했다.

테런이 잘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옆에 있으니까요.”

테런의 그 한마디에 로제타는 마치 든든한 산이라도 옆에 낀 것처럼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어떻게 보면 뻔하디뻔한 말일 뿐인 것을.

그런데 이상하게도 테런의 말에는 무한한 신뢰의 감정이 생겼다.

그녀의 얼굴색이 한결 나아지고 평정심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자, 그제야 테런이 시종에게 짧게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 사인에, 시종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한쪽씩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힘껏 밀며 문을 열자 눈부신 샹들리에의 빛이 로제타와 테런에게로 쏟아졌다.

연회장은 황금이 가득 들어차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로제타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으나, 테런의 에스코트에 따라 착실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잠시 멈추자, 시종이 외치는 우렁찬 소개 멘트가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테런 아셔 에스테스 공작님과 로제타 클리프 남작 영애 입장하십니다!”

분명 조금 전까지도 두꺼운 문 너머로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었는데…….

이 드넓은 연회장에 소음이 일시에 뚝 그쳤다.

입이 절로 바싹 말랐고,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 들었다.

로제타는 오직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모여 있는 것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머리카락 색, 외모, 그리고 걸음걸이, 행동 하나하나까지.

해부라도 할 생각인지 매섭게 뜯어보는 시선에 얼굴이 다 따가울 정도였다.

“가죠.”

테런의 에스코트에 로제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자신의 옆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한결 마음이 놓였다.

연회장에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고 있는 그녀의 구둣발 소리와 프로 정신을 발휘하고 있는 악사들의 연주 소리만 울려 퍼졌다.

출입문에서부터 직선으로 곧게 깔린 붉은 카펫의 끝에, 윌셔스의 국왕 부처가 앉아 있었다.

바닥보다 세 계단 정도 높은 단 위에 마련된 의자에는 파란 머리의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가 관을 쓴 채 인자한 미소를 띠고 테런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씩 국왕 부처와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마침내 두 사람의 걸음이 단 아래에 멈춰 섰다.

그녀와 테런은 약속한 것처럼 국왕 부처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테런은 단 아래 부복했으며, 로제타는 무릎을 살짝 접어서 허리를 굽혔

“윌셔스에게 광영을. 영원히 찬란하고 존귀하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그대가 에스테스 공작의 약혼녀로군.”

“클리프 남작의 여식, 로제타 클리프입니다.”

“인사는 되었으니, 이제 두 사람 다 자세를 바르게 하라.”

국왕의 말에 로제타와 테런이 몸을 곧게 일으켰다.

국왕은 차분한 표정으로 제 아래 서 있는 로제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외모가 그러하듯 목소리에서도 나이를 숨길 수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붉은 머리군.”

그 순간 로제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녀의 머리카락 색을 지적하는 것은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것과도 같았다.

아무리 성인의 의식을 가지고 아이의 몸에 빙의했다고 한들, 자그마치 15년이다.

그 긴 시간을 배척받아 오면 멀쩡하던 사람도 움츠러들기 마련이었다.

오히려 성인의 의식이었기에, 자신이 무엇 때문에 차별받는지 그 이유를 상대적으로 빨리 파악할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

사생아이자, 야만인의 피가 섞였다는 증거.

그랬기에 로제타는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지적하면 잔뜩 긴장하고 마음을 닫은 채로 상대하곤 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국왕의 얼굴로 향해 있던 로제타의 초록빛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의 시선은 금세 왕이 신고 있는 신발까지 내려가 버렸다.

무슨 말을 할까. 불쾌해하려나.

또 야만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걸까?

오만 가지 걱정이 앞다투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로제타의 걱정과 달리, 머리카락 색에 대한 국왕의 언급은 그것이 다였다.

국왕은 인자하게 입을 열었다.

“에스테스 공작이 오랫동안 혼사에 뜻이 없어 걱정이 많았거늘, 이리 아름다운 짝을 만나려 그랬나 보오. 그렇지 않소, 왕비?”

“그러게나 말입니다, 폐하. 두 사람 다 외모가 출중하며 무척이나 잘 어울립니다.”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로제타의 눈이 다시 슬그머니 위로 들렸다.

그리고 이내 자신을 향한 칭찬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수줍음에 얼굴을 살짝 붉혔다.

“……과찬이십니다, 폐하. 그리고 왕비님.”

“부끄러움이 많은 약혼녀를 두었군, 공작.”

그 모습이 어여뻐 보였는지 짧게 너털웃음을 터트린 국왕이 재차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클리프 영애. 그대의 성년을 축하하오. 그리고 약혼도. 앞으로 내 특별히 아끼는 에스테스 공작을 옆에서 잘 내조해 주오.”

“내리신 말씀, 가슴에 깊이 새겨 받들겠습니다.”

로제타는 왕비에게서도 짧은 덕담을 받았다.

통치자라고는 하나, 국왕과 왕비는 위엄보다는 인자함이 더 많이 느껴지는 부부였다.

물론 그들의 호의는 에스테스 공작인 테런과의 깊은 유대에서 빚어진 것이기도 했다.

그 덕에 로제타의 긴장이 잠시나마 옅어졌다.

왕은 살짝 목소리를 낮추고는 친근하게 테런에게 이야기했다.

“테런. 좋은 짝을 만나서 다행이로구나.”

“분에 넘칠 정도로 좋은 여성입니다.”

“원, 녀석. 벌써부터 싸고도는구나.”

국왕과 왕비가 시선을 교환하며 짧게 웃었다.

“자, 그럼 이제 두 사람. 첫 춤을 추러 가 보게. 한담은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나눌 수도 있으니.”

“예, 폐하.”

두 사람은 국왕과 왕비에게 묵례한 뒤 천천히 돌아섰다.

로제타는 한껏 낮춘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생각보다 절 꺼리지 않으신 것 같아요.”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않았습니까.”

테런이 웃음기 묻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의 머리카락 색이…… 파스트라인의 상징이긴 합니다.”

테런은 배려심 있게 야만인이 아니라 파스트라인이라고 이야기했고, 로제타는 그 점이 좋았다.

“하지만 보다 높은 고위 귀족일수록, 그리고 연배가 있으신 분일수록 붉은 머리에 대한 배척이 심하지 않을 겁니다.”

“정말요?”

로제타는 추가적인 설명을 위해 그리 물은 것이었지만, 테런은 그저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어느덧 연회장의 한가운데 다다랐다.

곧 다가올 다음 순서를 상기한 로제타의 얼굴이 다시 빠르게 굳어졌다.

오늘 하루 제대로 먹은 것도 없지만, 왠지 얹힌 것만 같은 기분이라 그녀는 야트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왕족에게 인사를 하는 것보다 더 떨리는 일이었다.

이곳에 모인 귀족 모두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매의 눈으로 지켜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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