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82화
로제타는 사교댄스를 가르쳐 주었던 미스터 그로만에게 들은 말을 반추했다.
「사교계는 물 위에 뜬 백조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 위에선 한가로이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물속에서는 다리를 빠르게 놀리고 있는 그 모습이 사교계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고상해 보이는 세계지만, 실상은 다르다.
그 어떤 곳보다 소문이 빨리 퍼지고 평판에 민감하게 구는 곳.
미스터 그로만이 설명한 사교계는 바로 그런 곳이었다.
무엇이든 꼬투리를 잡을 수 있고, 비약도 가능한 세계.
신분 사회이기 때문에 계층 간의 이동이 쉽지 않은 만큼 보수적인 윌셔스 왕국에서 가장 폐쇄적인 집단이 바로 사교계이리라.
모든 이들이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느라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다 보니 이슈 거리가 많이 없을 것이다.
그런 심심한 가운데 나타난 로제타라는 존재는 그들에게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었다.
로제타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첫 춤이 더욱 신경 쓰이고 긴장되었다.
두 사람이 파티 홀 중앙에 자리를 잡고 서자, 기다렸다는 듯 국왕이 왕좌에서 일어섰다.
악사들이 일제히 연주를 잠깐 멈추었다.
고요한 가운데 국왕이 입을 열었다.
덕담을 건네던 아까와 달리, 권위와 위엄에 찬 목소리였다.
“아름다운 한 쌍이 가약을 맺었으니, 이 어찌 축하하지 않으리오? 에스테스 공작과 그의 약혼녀인 클리프 영애는 첫 춤으로 모두에게 인사를 대신하고 파티의 시작을 알리게.”
테런과 로제타가 다시 한번 그 자리에서 왕좌 쪽으로 허리를 굽히며 예를 다했다.
그런 뒤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테런이 로제타의 손을 가볍게 그러쥐고 허리에 손을 얹은 뒤 살짝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두 사람이 준비 동작을 마치자, 악사들이 다시금 현에 활을 가져다 대었다.
이내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곡명은, 왈츠였다.
테런의 리드에 따라 첫 스텝을 밟으며, 그녀가 속삭였다.
“미리 배워 두길 잘했네요.”
딱 한 번 그것도 음악 없이 춰 본 것이 전부였으나, 두 사람의 호흡은 너무도 잘 맞았다.
유려한 선을 그리며 턴을 하자, 로제타가 입고 있는 새하얀 드레스가 부드럽게 휘날렸다.
마치 봄 개울에 흐르는 물결 같았다.
그들의 춤이 계속될수록 연회장 곳곳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서로가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서였다.
마침내 춤곡이 끝나고, 로제타가 조금 상기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아, 조금 들뜬 기분이 표정에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테런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오직 로제타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잘했어요.”
“모두 공작님 덕분이에요.”
그의 격려에 그녀 역시 속삭이듯 대답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함께 춤을 춘 파트너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가는 눈빛 속엔 서로를 향한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내내 숨죽이고 있던 연회장은 누군가 먼저 용기 있게 치기 시작한 손뼉 덕에, 곧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테런이 다시 로제타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고생했어요.”
“이제 정령 신상으로 가야 하는 거죠?”
테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 신상에 굳이 인사하는 이유는 가호를 받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정령이 축복을 내려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종의 관례였다.
윌셔스라는 국가 자체가 네 정령의 힘으로 존속이 되는 나라이니만큼, 왕국민 모두가 그 힘에 대한 존경심과 감사함을 그런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들이 중앙에서 벗어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수많은 귀족이 홀 가운데로 모이며 대열을 만들었다.
얼추 대형이 만들어지자, 악사들의 손끝에서 경쾌한 미뉴에트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이쪽입니다.”
그 음악 소리를 등지며, 로제타는 테런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들어온 출입문과는 정반대 쪽에 있는 작은 문을 통해 연회장을 벗어나자 긴 회랑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랑은 중정을 감싸듯 정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었고,
“어느새 달이 떴네요.”
달빛을 받은 회랑의 기둥은 긴 그림자를 만들어 내었다. 마치 피아노 건반 같았다.
테런을 따라 조용히 걸음을 옮기던 로제타는 잠시 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딘가의 별실로 들어가지 않을까, 그렇게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테런이 갑자기 방향을 돌려 중정으로 나갔기 때문이었다.
로제타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착실히 그를 따라 나갔다.
그리고 곧 그가 왜 이곳으로 걸음을 돌렸는지 알 수 있었다.
물소리가 들리는 작은 샘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 정령 신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위엄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을 거란 생각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샘의 한가운데 세워진 물의 정령상을 중심으로 다른 세 조각상이 빙 둘러싸듯 자리를 잡고 있었다.
테런은 시계 방향으로 차례차례 설명했다.
“가운데가 물의 엘라임, 그 뒤가 불의 이프리트입니다. 왼쪽은 바람의 실피드고…….”
“실피드요? 피르가 아니라?”
“둘 다 혼용해서 사용합니다만, 공식적인 명칭은 실피드입니다. 사람들은 피르라고 더 많이 부르지만요.”
“그렇군요…….”
로제타가 생각에 잠긴 듯 말꼬리를 흐리며 대답하자, 테런은 남은 설명을 이었다.
“그리고 오른쪽이 땅의 노아스를 형상화하여 만든 신상입니다.”
로제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더 신상들을 눈에 담았다.
엘라임은 인간 여성의 몸을 하고 있었고, 이프리트는 꼬리가 긴 도마뱀 모양이었다.
실피드는 피르와 똑같이 생겼으며, 땅의 노아스는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엘라임, 이프리트, 피르.”
그녀가 머릿속에 꼭꼭 새겨 두기라도 하려는 듯이 눈길이 이동할 때마 다 보이는 신상의 이름을 하나씩 입에 담았다.
“그리고…… 노아스.”
맨 마지막으로 땅의 정령의 이름을 입에 담은 그 순간.
“……아얏.”
목 뒤에서 찌릿함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목덜미를 감싸자 테런이 물었다.
“왜 그럽니까?”
“아. 날벌레에 물렸나 봐요.”
언제나 그랬듯 잠시 아프다 말겠지, 싶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통증은 심해지지는 않았지만, 꽤 긴 시간 지속되었다.
이상하다 싶은 그 순간…….
샘의 수면 위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물결이 조금씩 빠른 속도로 철썩이고 있었다.
쿠구구궁.
그럴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서 있는 지반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근처에 심긴 초목 역시 그 영향을 받아, 나뭇잎이 파르르 떨리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왔다.
높은 구두를 신고 있던 로제타는 그만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런 그녀의 팔을 테런이 황급하게 잡아 지탱해 주었다.
“장식물들이 많아 회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천장이 없는 여기에 있는 편이 나을 겁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테런이 한층 더 예리해진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조용히 말했다.
“지진인가 봅니다.”
“지진이요?”
테런이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퍼석하게 마른 입술을 다시 열었다.
“랭우드 후작가에 후계자가 없으니까요. 윌셔스 왕국의 모든 땅에서, 노아스의 힘이 점점 사라지는 거죠.”
“혹시 이전에도 아렌트에 이런 지진이 난 적 있었나요? 그러니까…… 랭우드 후작가가 그리되고 난 뒤에 말이에요.”
테런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지진이 일어났던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랭우드 후작가의 대가 끊긴 지 15년째라…… 그동안 남아 있던 가호마저 슬슬 다해 가는 모양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 전국적으로 그런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는 보고가 많이 들어왔다.
지반이 약해져 땅이 푹 꺼지는, 아까 마차를 타고 왔을 때 벌어진 상황처럼 말이다.
이대로라면 산을 하나 깎아 내려, 그 흙을 퍼와 길에 깔며 다져야 할지도 몰랐다.
마치 수백 마리의 말이 동시에 달리는 것처럼 땅이 흔들리자, 로제타는 불안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테런을 꽉 잡았다.
목덜미의 반점 부분이 슬그머니 뜨거워지기 시작했지만, 행여나 테런을 놓치면 넘어질까 봐 그 부분을 감쌀 여력까지는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내 그들이 빠져나온 연회장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콰쾅!
두꺼운 문을 뚫고 나올 정도의 큰 비명도 그 뒤를 이었다.
그사이 거짓말처럼 땅의 흔들림이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목 뒤에서 느껴지던 통증 역시 진정되었다.
금방이라도 넘칠 듯 출렁이던 샘 역시 어느새 잠잠해져, 수면에는 넓은 간격의 파문만 느릿하게 퍼져 나갔다.
서로 눈길을 교환한 테런과 로제타가 다급하게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 *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을 때, 홀은 엉망진창이었다.
악사들의 수준 높은 연주는 뚝 끊겨 있었고, 국왕과 왕비는 근위대의 경호를 받았다.
그들의 안색은 무척이나 새파래져 있었다.
몇몇 심약한 귀부인들 역시 놀란 마음을 도무지 진정시키지 못해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댔다.
전체적으로 소란하고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조금 전까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춤을 추었던 사람들은 파티 홀 한가운데를 빙 두르듯 감싸고 서 있었다.
테런과 로제타는 그들을 헤치며, 정중앙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내 눈에 들어온 광경에 로제타는 헛숨을 들이켜며 두 손으로 벌어진 입술 위를 가렸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연회장에서 가장 화려하고 거대했던 샹들리에가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무게와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대리석 바닥이 깨진 것은 물론, 샹들리에 역시 아랫부분이 완전히 찌그러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조금 전 지진으로 인한 충격으로 샹들리에가 흔들리다가 떨어진 듯 보였다.
테런은 곧바로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그는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물었다.
“다친 사람이 있습니까?”
“다행히 아무도 없네.”
돌아오는 대답은 반말이었다.
공작인 테런에게 말을 놓다니.
그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만 가능한 일인데, 이 나라에선 그마저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로제타가 의문을 품고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국왕과 똑같은 푸른 머리의 젊은 미남자가 느긋한 걸음으로 그들을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