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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83화 (83/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83화

사람들 모두 그에게 묵례하며 길을 내어 주었다.

로제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 남자가 바로, 원작의 남자 주인공인 바론이라는 것을.

방금의 이 소란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겪었을 텐데도, 그에게선 상황을 수습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여자 주인공인 제니스를 만나기 전까진 정말 책임감이라고는 조금도 없나 보구나.’

어느새 그들의 가까이 다가온 바론이 능글맞은 미소를 띠며 축하 인사를 건네 왔다.

“약혼을 축하하네, 테런.”

“전하.”

테런은 오른팔을 굽혀 가슴 앞에 대며 바론에게 인사했다.

로제타 역시 눈치껏 드레스 치마를 넓게 펼치며 예를 다했다.

“윌셔스에 광영을. 바론 왕세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바론이 반색하며 로제타 쪽으로 빙글 몸을 돌려세웠다.

“오!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레이디 클리프.”

바론은 말꼬리를 늘이며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오른쪽 손목을 느릿하게 돌려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기도 하였다.

‘왜 이러는 거지?’

그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얼굴로 로제타가 바론의 손바닥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바론이 피식 웃으며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손등에 키스하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클리프.”

바론의 눈빛은 버터를 바른 것처럼 느끼했고, 그래서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아…… 손등이요?”

그녀가 망설이듯 떨떠름하게 반문했다.

로제타는 바론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원작에서 그가 어떤 난봉꾼이었는지 이미 차고 넘칠 만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니스를 만나고 난 뒤에 순정남이 된다곤 하지만, 그 전에 바론이 아랫도리를 함부로 놀렸다는 건 변하지 않아.’

그건 로제타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돈 많고 잘생긴 남자라고 해도, 아랫도리 함부로 놀리는 저딴 놈에게 자신의 소중한 클라리사를 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식적인 자리였고, 테런의 얼굴을 생각해서 행동해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저 인사만 나누 자는 것일 뿐이고, 딱히 제게 어떠한 무례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기에 그의 인사를 거부할 어떠한 명분이 없었다.

심지어 왕족에게서 손등 키스를 받는 것은 더없는 영광이기도 했다.

그녀는 께름칙한 마음을 애써 참아 넘기며, 떨떠름한 얼굴로 왼손을 내밀었다.

바론이 웃는 낯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로제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손도 고우시군요.”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바론이 손끝으로 그녀의 손바닥과 손가락 아랫부분을 슬쩍 긁은 탓이었다.

고의인지 그저 스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한 움직임이었다.

‘소름 돋아!’

로제타는 저절로 찌푸려지려는 미간에 힘을 주고 버티느라 꽤나 애를 썼다.

바론은 자신이 허리를 굽히는 대신, 잡고 있는 로제타의 손을 제 입술까지 끌어 올렸다.

그리고 입술을 진득하게 눌렀다가 떼었다.

“모처럼의 약혼식이 이렇게 되어 버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실례되지 않을 정도로만, 손을 살짝 뒤로 물리자 의외로 순순히 그가 놓아주었다.

로제타는 한숨 고른 뒤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것이 더 중요하죠.”

“마음씨가 무척이나 고우시군요.”

그녀를 유혹하듯 싱긋 눈웃음 지은 바론이 돌연 테런을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공작. 약혼식이 이렇게 중간에 파투가 났는데. 이를 어떡하면 좋지? 두 사람의 약혼이 이대로 무효가 되는 건가? 하하핫!”

전혀 재밌지도 않은 농담을 뱉으며, 바론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를 추종하는 몇몇이 눈치를 보듯 작게 따라 웃었지만, 테런은 얼굴을 굳힐 뿐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짧은 대답과 함께, 테런은 긴 다리로 저벅저벅 이동했다.

그가 멈춰 선 곳은 로제타의 바로 옆이자, 바론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위치였다.

테런은 손을 내려트렸다.

그런 뒤 바론의 입술이 닿았던 로제타의 왼손을 꽉 잡고는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바론의 시선을 당당히 마주했다.

그런 테런의 행동이 예상외였는지 바론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이내 특유의 느끼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테런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농담일세. 기분 상했다면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전하.”

바론은 로제타를 돌아보며 또 싱긋 웃었다.

“내 오랜 친우를 잘 부탁합니다, 레이디 클리프. 그리고 언제 한번 공작가에 초대해 주십시오. 만사 제쳐 두고 기쁜 마음으로 응할 테니까요.”

“전하를 모실 수 있다면 더없는 영광일 거예요.”

“그 말, 곧 지키셔야 할 겁니다.”

그가 느끼한 멘트와 함께 눈 한쪽을 찡끗 감았다가 다시 뜨고는 손을 팔랑 흔들며 멀어졌다.

“공작님. 이런 말, 불순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꼭 여쭤봐야겠어요.”

로제타는 더는 참지 못하고 테런에게 작게 속삭였다.

“정말 저런 사람이랑 클라리사를 결혼시켜야 하나요?”

“사실…… 저도 그게 불만입니다.”

테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연회장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별다른 인명 피해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밤 시간대에 진행된 연회인지라 홀을 밝히던 가장 강한 샹들리에가 떨어진 만큼 연회장의 조도가 다소 어두워졌다.

“의자를 가져와 내빈들께 내어 드려라.”

국왕의 명령으로 시종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연회장에 티 테이블을 세팅한 뒤, 안락한 의자들을 가지고 왔다.

파티 홀은 금세 살롱의 분위기를 갖추었다.

악사들도 눈치껏 잔잔하고 분위기 있는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까와 달리 한결 편안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연회장에 감돌았다.

이런 데뷔당트도 나쁘지는 않다고, 로제타는 생각했다.

어차피 첫 춤은 추었기에 이목은 충분히 끈 상태였다.

오히려 이 약혼식에서 춤을 마무리한 것이 오로지 테런과 로제타, 단 둘뿐이라 더 특별한 느낌을 심어 준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주빈이니만큼 테이블을 오가며 인사를 했다.

몇몇 테이블을 돌아다녀 본 결과, 테런의 말대로 나이가 지긋하고, 가문의 지위가 높을수록 그녀에 대한 배척이 심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로제타, 테런. 이쪽으로 와 보렴.”

자신들을 부르는 카밀라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다정한 모습으로 팔짱을 낀 채, 그쪽으로 다가갔다.

카밀라는 동년배로 보이는 한 노부인과 로제타보다 서너 살 위로 보이는 젊은 귀부인과 함께 앉아 있었다.

테런이 귀띔했다.

“할머님의 호적수이신 베일런 후작 대부인과 손자며느리인 자작 부인입니다.”

“아.”

로제타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이, 테런이 결혼을 종용받은 이유에 그 가문의 경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자신이 카밀라의 체면을 잘 살려 주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할머님.”

무심코 대부인이라고 부르려던 로제타는 서둘러 그녀에 대한 호칭을 정정했다.

카밀라가 만족했는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까닥였다.

“인사들 하렴. 이쪽은 내 절친한 친우인 에일리 베일런 후작 대부인이고, 그 옆은 손자며느리인 다퍼스 자작 부인이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두 분 모두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로제타 클리프예요.”

기다렸다는 듯이 에일리 후작 대부인이 웃는 낯으로 그녀를 맞았다.

“어머. 목소리도 고와라. 반가워요. 에일리랍니다. 카밀라와 에스테스 공작이 복이 많군요. 이렇게 어여쁜 사람이 새 가족이 되니 말이에요.”

말을 건네 오는 목소리가 퍽 살가웠다.

척 보기에도 카밀라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것 같았다.

그 옆에 앉아 있던 그녀의 손자며느리가 차분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할머님들을 따라 앞으로 저희도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좋은 인연이 되어 주신다면 저야 감사할 일이죠.”

카밀라는 다퍼스 자작 부인을 응대하는 로제타의 모습을 보며 남몰래 흐뭇해했다.

이런 사교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처음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침착한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촌스럽게 호들갑 떨지도 않았고, 사람을 상대하는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어 쉽게 얕보이지도 않았다.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카밀라의 기색을 알아차린 것은, 그녀를 오랜 시간 봐 왔던 에밀리밖에 없었다.

“좋으시겠어, 정말.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손자며느리가 이제 들었으니 당신도 한시름 놓겠네.”

“워낙 스스로 잘하는 아이라. 배움이 빠르기도 하고.”

무뚝뚝한 카밀라의 말에 로제타가 놀라서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비록 짧은 말에 불과했지만, 그 속에 자신을 인정하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춤 연습 열심히 한 보람이 있다.’

로제타는 자신도 모르게 위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단속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후 몇 마디 더 가벼운 한담이 오갔다.

잠시 대화가 끊어질 타이밍에, 로제타가 웃는 낯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잠시 실례할게요.”

뒤꿈치가 쓸려서 잠시 살펴보는 게 좋을 듯했다.

양해를 구한 뒤, 로제타는 휴게실로 이동했다.

여성 휴게실은 총 네 개로 나눠진다.

왕족이 사용하는 개인실과 노부인들이 사용하는 휴게실, 그리고 기혼인 귀부인들이 사용하는 휴게실과 미혼 영애들이 사용하는 휴게실.

로제타가 사용할 수 있는 휴게실은 미혼인 영애들에게 내어 준 곳이었다.

그녀가 손잡이를 쥐고 살짝 잡아당겼다.

문은 손가락 한 마디만큼 열렸고, 그 좁은 틈 사이로 많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보셨어요? 그 붉은 머리카락이요.”

누군가가 꺼낸 말을 시작으로, 동조하듯이 한마디씩 덧붙였다.

“공작님께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야만인의 피를 물려받은 그 여자를 공작 부인으로 들이시는 건지.”

“얼굴이 반반하잖아요.”

“그 여자가 에스테스 공작 부인이 되는 거라면, 우리는 야만인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건가요?”

그 목소리들은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려 하던 로제타의 발목을 잡아 무겁게 만들었다.

연회장에선 겉으로나마 모두 제게 친절하고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었기에, 살짝 마음을 놓았는데…….

역시나 자신의 머리카락 색을 조롱하는 이들이 있구나 싶은 생각에 입 안이 썼다.

‘그냥 다시 회장으로 돌아갈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저도 머리에 붉은색 가발이라도 써 볼까요? 그럼 공작님께서 좋아해 주실 것도 같은데.”

안에서 까르르 웃음보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가 나서 안 되겠어.’

자신이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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