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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84화 (84/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84화

로제타의 초록빛 눈동자에 삐딱함이 어렸다.

‘사고 치면…… 공작님이 처리해 준다고 했잖아.’

그녀가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으며 손잡이를 더욱 힘껏 쥐고 문을 확 열어젖혔다.

로제타의 등장에 휴게실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실례합니다.”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 한쪽 벽면에 설치된 거울로 다가간 로제타가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사실 아픈 건 뒤꿈치 쪽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구두를 벗고 확인하기가 참 뭣했다.

잠시 후 뒤에서 경계하는 기색이 잔뜩 묻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혹시…… 들으셨어요?”

그 순간 로제타가 한숨을 삼키며 천천히 그녀들 쪽으로 돌아섰다.

로제타의 붉은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으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네, 들었습니다. 혹시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였던가요?”

한 영애가 신경질적으로 부채를 펴 들며 입가를 가렸다.

그러곤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타인의 대화를 훔쳐 듣다니. 교양 없어라.”

그 말에 로제타는 살짝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뒤 보란 듯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어머. 윌셔스 왕가에 제가 모르는 공주님의 존재가 있었군요.”

“그게 지금 무슨 말이죠?”

조곤조곤, 말로 폭행하는 것은 로제타의 특기였다.

그녀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일부러 고개를 갸웃했다.

“왕궁 연회에서 개인 휴게실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왕족뿐이라고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한마디로,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개방된 장소에서 왜 네가 입을 함부로 놀렸느냐는 반박이었다.

고상한 그녀의 받아침에 비아냥거렸던 영애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워낙 크게 말씀하시기에, 전 또 제 앞에서도 하실 줄 알았죠.”

로제타는 그녀들의 면면을 확인하듯 둘러보며, 느릿하게 그러나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그 외엔 아무런 행동도,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얼굴만 살핀 것일 뿐인데도 영애들은 저마다 시선을 피했다.

“왜…… 왜 그렇게 보시는 거죠? 지금 저희를 겁박하시는 건가요?”

로제타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잠시 지었다.

“그저 얼굴만 봤을 뿐인데 사고가 어떻게 그리 비약되는지 모르겠네요. 아니면 영애의 얼굴을 한번 볼 때마다 돈이라도 내야 하는 건가요?”

그녀의 말에 방금까지 말을 섞었던 갈색 머리 영애가 발끈하며 외쳤다.

“무례하세요!”

“영애가 내게 무례를 논할 처지가 되던가요, 지금?”

이쯤 되면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겠다 싶었던 로제타는 벽에 기대며 팔짱을 꼈다.

“물론 영애들은 내가 듣고 있다는 걸 모른 채 이야기를 나눴을 거예요. 없는 자리에선 나라님도 욕한다는데……. 그래요. 기분은 나빠도 이해는 해요. 하지만.”

로제타가 잠시 말을 끊고 호흡을 골랐다.

그러다 이내 딱딱한 얼굴과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었다.

“내게 들켰잖아요. 그런데 영애 중 누구 한 명 내게 사과했던가요?”

아주 기본적인 예절 문제를 지적하자 영애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뭐, 지금 영애들이 짓고 있는 얼굴 들을 보니, 자신이 한 행동은 창피하지만 내게 사과할 생각은 없다는 걸 잘 알겠어요.”

이쯤 하면 알아들었겠지.

자신이 받은 모욕을 되받아치기는 했으나, 전혀 생산성 없는 논쟁은 심신이 지치므로 그만할 생각이었다.

“야, 야만인 주제에!”

로제타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그녀의 싸늘한 시선이 제게 비난을 퍼부은 쪽으로 향했다.

“당신이 정말 공작님과 결혼까지 갈 줄 알아요?”

“하아.”

로제타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저쪽에서 먼저 유치하게 구니 저 역시 동급으로 구는 편이 타격이 크리라 생각되었다.

“그럼 못할 리가 있겠어요?”

“다, 당연하죠! 에스테스 대부인께서 허락하실 리가…….”

“있으니, 제가 오늘 왕궁에서 데뷔당트와 약혼식을 같이 치른 거겠죠?”

로제타의 반박에 비난을 퍼부었던 영애의 입술이 조개처럼 다물렸다.

분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기도 했다.

로제타는 벽에 기대고 서 있던 몸을 꼿꼿이 일으켰다.

소파에 앉아 있는 영애들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제법 차가웠다.

그녀는 자신과 언쟁을 벌인 갈색 머리 영애를 콕 집어 질문을 건넸다.

“이름이?”

그 순간 갈색 머리 영애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기인지, 자존심인지 턱을 꼿꼿하게 들어 올리며 제 가문과 이름을 밝혔다.

“나크로이 백작가의 코, 코델리아예요.”

“나크로이 코델리아 백작 영애. 잊지 않고 기억해 둘게요.”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들은 이름을 곱씹듯 입에 담았다.

이름보다 성을 먼저 댄 것은 일부러였다.

“이만 실례하겠어요.”

그런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휴게실을 나왔다.

등으로 문을 닫듯이 하고 나서야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렇게 문에 기대어 긴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괘, 괜찮으세요?”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 소심한 목소리가 건네 오는 걱정에, 로제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소심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듯 잔뜩 움츠린 어깨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올리비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리스턴 영애시군요.”

로제타가 힘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민망한 듯 웃으며 물었다.

“혹시 안에서 있었던 작은 소란을 들으셨나요?”

눈치를 보듯 눈동자를 굴리던 올리비아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들은 그저…… 영애가 부러워서 그러는 것일 거예요. 공작님께서…… 인기가 많으셔서…….”

“알아요.”

로제타가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답했다.

테런이 수도에서 제일가는 신랑감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방금 만난 영애들은 그런 고귀하고 좋은 자리를,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로제타가 꿰찼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적대적으로 구는 것일 테고.

이 시대상으로 볼 때, 여자의 지위는 곧 남편의 지위에 따라 결정이 된다.

하지만 좋은 배우자감은 한정적이었다.

그 가운데서 누군가 자신이 눈독을 들였던 이의 옆자리를 꿰차게 되면, 그 사람을 빼앗긴 것만 같은 감정이 들 것이었다.

머리로는 일련의 사고 과정이 충분히 이해가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그녀가 그 모진 말들을 감내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올리비아는 걱정하는 듯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의 옆을 지키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영애…….”

로제타는 연거푸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듯 숨을 들이켰다.

마음을 추슬러 보려고 노력했으나, 쉽지가 않았다.

「빨간 머리 가발이라도 써 볼까요?」

이때껏 살며 들었던 말 중에서 그 말이 가장 로제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내내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던 차별이, 어떻게 이리 쉬운 농담 한마디로 회자되는 것인지.

“불행을 동경하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을까요…….”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녀의 눈이 이내 슬픔으로 물들며 깊게 가라앉았다.

* * *

자정이 넘어가는 시각, 리스턴 후작 일가는 왕궁에서 빠져나와 귀가했다.

그들이 막 후작 저택에 도착했을 그때, 대문 앞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어서 문을 열어라! 리스턴 후작을 만나러 왔으니까!”

행패를 부리고 있는 것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이 여편네가 미쳤나. 어디 감히 후작님을 존칭도 없이 함부로 불러?”

평소라면 문지기 선에서 쫓겨났을 테지만, 여자는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그 결과 계속해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막 왕궁에서 돌아오던 리스턴 후작가의 마차가 문 앞에 도착했다.

저택 문 앞에서 일어난 소란을 눈치챈 마커스가 마부를 시켜 속도를 늦추게 했다.

“무슨 일이더냐?”

마커스는 직접 마차 창의 커튼을 걷고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의 음성을 단박에 알아들은 여자가 반색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리스턴 후작! 내 얼굴을 기억하오?”

행여라도 마커스를 태운 마차가 그대로 자신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 버릴까 봐, 여자는 조급함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문지기가 마커스의 눈치를 보며 해쓱해진 얼굴로 여자를 다그쳤다.

“이 정신 나간 여편네가! 감히 후작님에게!”

“잠깐만……. 조용히 좀 해 보게.”

마커스가 창문 밖으로 손을 뻗어 문지기를 말렸다.

흐려지는 말꼬리만큼 가늘어진 눈빛으로 그는 마차 밖을 내다보았다.

여자의 얼굴엔 땟국인지 그을음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자국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군데군데 해져서 넝마를 걸치고 있다고 표현해도 좋을 법했다.

언뜻 보아도 삶의 무게에 찌들어 버린 하층민이었다.

이렇게 계급이 낮은 자를 내가 알던가?

선뜻 기억나지 않았으나, 왠지 모를 낯익음에 마커스는 계속 긴가민가했다.

그가 자신을 떠올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여자가 초조하게 입을 열었다.

“마커스! 나예요, 젤다. 설마 그사이에 날 잊은 건 아니겠죠?”

그 순간, 마커스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여자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제야 그녀의 이목구비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빈곤함과 세월에 가려져 있던 현재의 여자 얼굴 위로, 젊은 날의 그녀가 덧그려지듯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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