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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85화 (85/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85화

“당신이 어떻게…….”

마침내 그가 자신을 알아봤다는 생각에 여자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자신을 끌어낼 듯, 팔꿈치를 잡은 문지기의 손을 거칠게 털어 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놓아라! 어디 감히.”

그녀는 행색과 어울리지 않게 고압적으로 굴었고, 이내 턱 끝을 꼿꼿하게 세웠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마커스가 내렸다.

이 상황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던 문지기와 마부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감히 제 봉급을 주는 주인이 하는 일에 끼어들어 말을 보탤 수는 없었다. 그저 잠자코 있을 수밖에.

마커스는 굳은 얼굴로 여자, 젤다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 서슬이 퍼런 기세에 조금 겁을 집어먹은 젤다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칠 정도였다.

마커스가 그렇게 사납게 다가와 그녀를 잡아먹을 것처럼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마커스. 여기서 이야기해도 괜찮겠어요? 정말로?”

여자의 말에 마커스가 뿌득 이를 갈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안광이 희번덕거리며 빛났다.

한동안 여자를 죽일 듯 노려보던 그가 먼저 시선을 떼고 돌아섰다.

“……따라와.”

잇새로 흐르는 말이 퍽 매서웠다.

* * *

집사에게 방해하지 말라는 으름장을 단단히 놓은 뒤, 마커스는 젤다를 데리고 서재로 들어왔다.

서재의 주인이 앉으라 권하지도 않았건만, 젤다는 응접용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의 맞은편에 마커스가 못마땅한 얼굴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차도 한 잔 내어 주지 않는군요.”

“차를 대접받고 싶었으면 그런 후줄근한 몰골로 찾아오지 말았어야지.”

마커스가 혀를 차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면박을 주는 말에도 젤다는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그녀의 몫까지 얼굴을 구긴 것만 같은 마커스가 신경질적으로 물음을 건넸다.

“이제 와서 날 찾은 이유가 뭐지? 두 번 다시 내 얼굴 따위 보고 싶지 않을 줄 알았더니.”

타박 어린 말에 젤다는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당신보다 더 꼴 보기 싫은 얼굴을 만났거든요.”

젤다는 마치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보다 더 꼴 보기 싫은 얼굴을 봐서, 그나마 덜 꼴 보기 싫은 날 찾아왔다는 건가?”

마커스가 비릿하게 웃었다.

“농담이나 하자고 그 긴 시간 소리 소문도 없이 살다가 이 밤중에 날 찾아온 건 아닐 테고.”

“그거야…… 그렇죠.”

불퉁한 마커스의 말에 젤다는 헛숨을 들이켰다.

잠시 주저하던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비장한 얼굴로 마커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팔 정보가 있어요.”

“……뭐? 정보?”

하지만 마커스는 그녀의 비장함을 비웃었다.

“오, 젤다. 차라리 구걸을 하지 그러나? 그편이 지금보다 덜 볼썽사나울 테니 말이야.”

그의 모욕에 젤다가 표독스럽게 눈을 홉뜨며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따위 것엔 조금도 겁나지 않는다는 듯, 마커스의 조롱은 계속되었다.

“15년 만에 얼굴을 비치더니, 뭐? 팔 정보가 있다고?”

그의 비웃음은 좀처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귀족 사회에 발끝 하나 디밀지도 못하는 신분으로 전락한 지 오래면서, 내게 팔 정보가 있다라…….”

그는 비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주먹으로 입가를 가리며 짧게 헛기침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쩜 이리도 구미가 조금도 당기지 않는 건지 모르겠군.”

그의 모욕을 감내하기라도 하듯 젤다는 허벅지 위에 올린 두 손을 가만히 주먹 쥐었다.

자존심이 상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그냥 나갈까 하다가 참았다.

배를 곯은 지 벌써 닷새가 넘었다.

마커스를 다시 찾을 계획은 없었다.

그의 눈에 띈다면 자신 역시 제 남편과 아들처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 죽음을 각오하고서 이렇게 리스턴 후작가를 찾은 이유는 하나였다.

‘그 아이만 잘살게 내버려 둘 순 없어.’

지금의 자신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 그 애에게 아무런 해코지를 할 수 없겠지만 권력을 가진 이라면 다르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누가 자신을 대신해 움직여 줄 수 있을까.

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랭우드’의 복권을 바라지 않는 단 한 사람. 바로 마커스였다.

젤다는 랭우드의 후계자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줌과 동시에 그에게서 겸사겸사 돈도 요구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번에도 방값을 내지 못하면 그 허름한 방에서조차 쫓겨날 것이고, 그러면 이제는 정말 부랑자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살아왔던 젤다에게 하층민의 삶은 생지옥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심호흡하며 울컥거리는 마음을 다스렸다.

지금은 비웃으나, 마커스는 기꺼이 자신이 내밀 정보를 살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 역시, 그날의 공범이니까.

젤다가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마커스는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금화 하나였다.

그는 그 돈을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손끝으로 짚어 젤다의 쪽으로 쭉 밀었다.

“정보는 되었으니, 적선이라고 생각하고 받게.”

그는 거만하게 말을 이었다.

“옛정을 생각해서 주는 것이니 챙기게, 젤다. 그리고 두 번 다신 이런 일로 날 찾아오지 말고.”

말을 마친 마커스가 미련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가 끝났다는 뜻이었지만, 젤다는 일어서지 않았다.

그녀는 제 눈앞의 금화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양하기엔 자신은 지금 너무도 빈곤한 상태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뻗어 마커스가 준 금화를 빠르게 챙겨 들었다.

그에겐 그것이 푼돈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지금의 자신에게는 너무도 큰돈이라 혹시라도 마커스가 다시 뺏어 갈까 봐 꼭 말아 쥐기까지 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값을 먼저 받았으니, 그 값은 해야겠죠.”

그녀는 애써 도도한 척 입을 열었다.

마커스는 흥미가 없다는 듯 여전히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상태였다.

젤다는 재킷을 벗기 시작하는 그의 뒤에다 대고 말을 이었다.

“마커스. 그 아이가 살아 있어요. 얼마 전에 수변 공원에서 직접 내 눈으로 봤어요.”

“그 아이라니?”

그제야 그가 다시 젤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젤다가 하는 말을 단박에 알아듣지 못해서였다.

그 모습에 젤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조마조마해하던 자신만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조금 경멸하는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당신에게 죄책감이라곤 조금도 없군요. ‘그 아이’라고 했을 때 바로 기억이 나는 게 없는 걸 보면 말이에요.”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하라고.”

젤다가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길게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15년 전, 당신이 죽이려고 했던 그 아이를 말하는 거잖아요. 정말 기억나지 않는 건가요?”

그 순간 마커스의 얼굴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지금 어디서, 얼렁뚱땅 내게만 죄를 덮어씌우려는 거지?”

그가 사나운 목소리로 을렀다.

“먼저 그 아이를 없애고 싶다고 날 찾아온 건 당신이었어.”

젤다도 지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그 아이만 없애 달랬지, 내 남편과 내 아들까지 죽이라고 하지 않았잖아!”

그녀의 눈에 독이 올라 있었다.

“내가 그 아이를 데리고 나오겠다고 했잖아! 당신 앞으로 데리고 온다고 했는데, 어째서 그 짧은 새를 기다리지 못하고 불부터 싸지른 거야!”

“목소리 안 낮춰?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마커스가 눈을 부릅뜨며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15년 전, 마커스는 젤다와 결탁했다.

호시탐탐 랭우드 후작가의 재산을 노려 왔던 그였기에, 언제나 적당한 기회를 물색 중이었고 그러던 차에 연이 닿은 젤다와 손을 잡았었다.

다만 두 사람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달랐다.

젤다는 로제만 없으면 자연히 제 아들에게 작위가 돌아올 것이라고 여겨 아이만 없애기를 원했던 반면, 마커스는 랭우드 후작가의 몰살을 기획했다.

“약속했던 시간까지 아이를 데리고 오지 않은 건 분명 당신의 잘못이라고! 그리고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당신이 그 못된 마음을 품지 않았다면 적어도 당신 남편과 아들은 목숨을 잃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걸 말이야.”

엄연히 따지자면 먼저 로제를 없애 달라고 부탁한 것은 그녀 쪽이었다.

물론 마커스는 이전부터 랭우드를 처단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혼자서도 언젠가는 제 뜻을 이뤘겠지만, 젤다의 제안을 굳이 거절하여 흘려보내지 않았다.

내부 공모자가 있으면 조금 더 일을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단 생각에서였다.

마커스가 그 사실을 상기시켜 주자, 젤다는 눈물이 고인 얼굴로 마커스를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그렇게 마커스가 잠시간 입을 틀어 막고 있자, 거칠게 씨근덕거리던 젤다가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가슴을 들썩였다.

잠시 후 그녀가 진정한 듯 보이자 마커스가 입을 막았던 손을 떼 내었다.

부족했던 숨을 한 번에 채우려는 듯 크게 심호흡한 그녀가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커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당신 내 말, 제대로 들은 거 맞아요?”

그제야 마커스는 젤다가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얼굴을 종잇장처럼 구겨 버렸다.

“아니. 잠깐만. 뭐라고……? 그 아이가 살아 있다고?”

“네. 맞게 들었어요.”

마커스의 얼굴이 분노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아이가 왜 살아 있나? 어?”

그가 이마에 핏대까지 세우며 큰소리로 고함을 쳤다.

제법 위협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젤다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에 마커스는 더욱 분노했다.

그는 젤다의 멱살을 잡아채고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내가 그때 분명히 죽이라고 했잖아!”

그녀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마커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람을 죽이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요? 당신이나 그렇게 손쉽지, 보통 사람은 다른 이를 그리 쉽게 못 죽인단 말이에요.”

“네 손으로 해결하지 못할 것 같았으면 강에서 떠밀리기라도 했어야지!”

“그랬다가요? 죽은 그 아이가 물에 떠오르면 당신도 곤란해지지 않았겠어요?”

“젠장! 빌어먹을!”

당장 이대로 그녀의 목을 분질러 버릴 수 있다는 듯, 멱살을 쥔 마커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렇게 힘을 주어 그녀의 숨통을 조이던 마커스가 거칠게 혀를 차며 멱살을 풀었다.

“으윽.”

젤다는 그 거친 힘에 떠밀리듯 옆으로 엎어졌다.

그녀가 소파를 팔꿈치로 짚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마커스는 치밀어 오른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씨근덕거리며 거칠게 심호흡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은 제법 위태롭게 오르내렸다.

한참 만에야 그가 꽉 조인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말 살아 있는 게 맞아? 야만인을 잘못 본 게 아니고? 붉은 머리는 평민 지구 외곽에도 종종 보이잖아. 많지는 않아도.”

“절대 아니에요.”

젤다는 싸늘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답했다.

“분명 그 아이가 맞았어요.”

그 대답에 마커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그 아이를 죽이러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있다는 듯 흉흉한 기세를 사정없이 내뿜었다.

“어디에서 봤는데? 어디에 있느냔 말이다!”

“아렌트에서요. 그 아이는 수도에 있어요.”

“……뭐? 그게 정말인가?”

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마커스를 비웃듯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린 채 비아냥대듯 말을 이었다.

“지금 이 반응을 보니, 다음에 내가 할 말을 들으면 놀라서 까무러치겠군요.”

“또 내 신경을 긁을 말이 남았나?”

젤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궁금하면 추가금을 내요. 금화 두 개 값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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