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86화
마커스가 진절머리 난다는 듯 그녀를 노려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재킷을 뒤져 다시 금화를 찾아냈다.
그는 혀를 차며 그녀의 앞으로 금화를 집어 던졌다.
동전은 데굴데굴 굴러 젤다의 발치에 멈춰 섰고, 그녀는 그것을 줍기 위해 상체를 숙였다.
뼈가 앙상히 드러나는 그녀의 몸 위로 마커스의 사나운 목소리가 내려 앉았다.
“말해. 어서.”
금화를 다 주운 후에야 젤다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에스테스 공작이 있었어요.”
“……뭐?”
믿기 힘들다는 듯 눈매를 구기는 마커스를 위해, 젤다는 친절하게 다시 한번 더 말해 주었다.
“에스테스 공작이 그 아이의 옆에 있었다고요.”
“잠깐…… 잠깐만, 젤다.”
마커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손을 들어 올려, 젤다의 말을 잠시 막았다.
그리고 방금까지 자신이 들은 말을 정리했다.
“방금 당신, 뭐라고 했지? 그 아이가 에스테스 공작의 옆에 있다고?”
젤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말에 신빙성을 더하기라도 하듯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힘주어 발음하기까지 했다.
“네, 붉은 머리카락의 그 아이. 에스테스 공작 옆에 있었어요.”
“허어……!”
마커스가 거칠게 숨을 토해 냈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왼손으론 허리를 짚고 오른손으로는 이마를 덮은 채, 다소 정신 사납게 중얼거렸다.
“그럼 오늘 공작이 약혼녀라고 데리고 온 그 남작 영애가 그러면 사생아가 아니라…….”
그가 중얼거리던 말을 들은 젤다가 되물었다.
“마커스. 당신 지금 남작 영애라고 했죠?”
“그래. 뭐 짚이는 것 있나?”
젤다가 그것 보라는 듯 으스대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 아이를 버리고 온 곳이 바로 클리프 남작가였어요.”
“……뭐?”
마커스가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애를 죽이지 못하고 버릴 거였으면, 아무도 찾지 못하는 빈민굴 같은 곳에 버리든지 했어야지!”
젤다는 마커스의 고성에 잠시 놀랐지만 이내 표독스럽게 대거리를 했다.
“내가 당신 같은 줄 알아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모질어요?”
“안 모질었으면? 내가 당신에게 손을 보태었을 것 같나? 지금 감히 누가 누구를 탓하는 거야?”
젤다는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마커스는 그녀에게 무르다고 했지만, 당시의 젤다로서는 아이를 남의 집에 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차마 버리지 못한 양심의 조각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아이를 사생아로 만드는 것이 가장 비참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젤다가 평생을 숨겨 온 진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가 사생아라는 사실이었다.
친모인 줄 알았던 어머니로부터 구박받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자신이 아버지의 불륜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사는 내내 그녀를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와 같은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을 물려받았기에, 아무도 그녀가 밖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는 걸 몰랐다.
젤다는 그렇게 자랐던 제 삶이 너무도 고통스러웠으므로, 빼돌린 그 아이를 사생아로 만든 것이었다.
거센 불길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 버린 제 남편과 아들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다.
그것이, 마커스의 눈에는 안일해 보일지라도 젤다가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방법이었다.
그렇게 클리프 남작가에 그녀를 버리고 난 뒤, 젤다는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다 잊고 살려고 했다.
얼마 전 다 큰 로제의 모습만 우연히 보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다 잊은 채 죽을 때까지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얼마 전 수변 공원 근처에서 본 그 아이가 웃고 있었다.
그것도 두 번 다시 엮이지 말아야 할, 원래 제짝인 에스테스 공작의 옆에서!
제 남편과 아들을 잡아먹고 산 주제에, 감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이가 갈렸고 분노로 눈앞이 어두워졌다.
사실 젤다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버렸던 로제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 아이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제 손으로 제 아들과 남편마저 사지로 밀어 넣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기에, 젤다는 애꿎은 아이에게 모든 탓을 돌리며 증오를 퍼부었다.
어두워진 그녀의 표정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마커스는 중얼거림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에스테스 공작은 제 옆에 있는 그 영애가 자신의 전 약혼녀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는 듯한데.”
마커스는 다소 초조한 듯한 기색으로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불현듯 올리비아에게서 들은 말이 기억났다.
「불의 정령석에 손을 대었을 때 이상한 행동을 보였어요.」
그때는 흘려들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다시 생각해 보니, 왜 그런 행동을 보였는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그는 바론이 했던 말도 떠올렸다.
그녀가 골라낸 수석을 감정해 보니 사실 오팔이었다고 했지 않나.
마커스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차곡차곡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커스는 일순간 불안에 휩싸였다.
“게다가 오늘 있었던 그 지진…….”
연회장에 있었을 때만 해도 그도 테런처럼 랭우드 후작가의 힘이 다해 왕궁의 지반이 약해져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랭우드의 후계자가 조만간 각성하리라는 전조 증상이었다면?
“빌어먹을.”
그 말인즉슨, 그동안 시장을 교란해 불법적으로 이득을 취해 온 일도 드러날 것이라는 소리와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젤다의 말마따나 랭우드의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만천하에 공개된다면, 자신이 가진 그들의 모는 땅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줘야만 했다.
지난 15년간 광물의 생산량이 아무리 줄었다고 한들, 리스턴 후작가의 입장에선 큰 소득이었다.
애초부터 쭉 없었으면 모를까.
견물생심이라고, 돌려줘야 한다고 상상만 했을 뿐인데도 죽기보다 더 싫었다.
머리를 굴리던 마커스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래! 그 방법을 쓰면 되겠군.”
건너편에 앉아 있던 젤다가 궁금함에 말을 붙였다.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떠오른 거예요?”
마커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계집을 빼돌려야겠어. 에스테스 공작가에서.”
“……납치한다는 소리예요?”
“그래. 그렇게 그 계집이 사라지면, 랭우드의 마지막 자손은 영원히 15년 전 그 불미스러운 사고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거지.”
그렇게 된다면 랭우드 후작가의 재건은 당연히 물 건너가게 되는 것이고, 그들의 땅과 재산 역시 지금까지처럼 리스턴이 계속해서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 계집이 곧 각성하게 될 거야. 그 전에 납치해야 해.”
4가문이 힘을 계승하는 방법은 각각 달랐다.
그중에서도 땅의 랭우드는 다음 대를 이을 어린 직계 중 한 명이 성인이 되면 신체의 한 부분에 반점이 나타난다.
선대의 랭우드는 손등에 그 모양이 나타났고, 선선대는 왼쪽 가슴에 나타났었다.
만약 직계가 없으면 방계로 넘어가는 식으로 그 힘을 계승해 왔다.
마커스는 아까 연회장에서 얼핏 그녀의 나이를 떠올렸다.
“나이가 올해로 스물하나라고 했지. 정말 곧 머지않았군.”
그는 이 상황이 전혀 마뜩잖다는 듯 거칠게 혀를 찼다.
그러고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짧은 사이에 세운 무서운 계획을 조금씩 구체화했다.
“땅의 힘을 각성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그 계집을 우리 쪽으로 데려와야겠어. 그래야 그 존재를 어둠 속에 숨겨 놓을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그러다가 그 계획이 썩 마음에 든 모양인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랭우드의 후계자를 감금해 놓으면 제게 떨어지는 것은 이득뿐이었다.
땅의 힘을 각성한다면 광물은 다시 늘어날 테고, 그렇게 되면 랭우드를 다스리는 리스턴은 지금보다 더 큰 부를 얻게 될 것이다.
음흉하고 간악한 꾀에 침식된 마커스가 기괴하게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우선 그 계집이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는지부터 확인을 해 봐야겠군.”
“……어떻게 말이죠?”
젤다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커스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당연히 젤다, 당신이 도와줘야겠지.”
“내가…… 요?”
젤다의 얼굴에 꺼리는 표정이 떠올랐다.
안일하다고 욕을 해도 할 수 없지만, 그녀는 마커스에게 랭우드의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까지가 자신의 일이라고 여겼다.
그 아이가 살아 있는 것을 마커스가 두고 보지만은 않을 테니 어떻게든 처리해 주리라 생각했기에, 그녀는 정보를 넘겨주고 돈을 받는 선에서 발을 뺄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커스가 이렇게 자신을 붙잡는 것에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마커스가 눈매는 굳히고, 입술만 끌어올린 채 음산한 목소리로 을렀다.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15년 전, 당신의 죄를 들키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그 협박에 젤다는 마른침을 삼켰다.
마커스는 어느새 소파 테이블을 돌아 그녀가 앉아 있는 자리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자, 소름이 돋기라도 한 것처럼 젤다가 몸을 움찔 떨었다.
불을 다루는 가문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마커스의 손이 너무도 차가웠다.
그는 천천히 상체를 수그려 젤다의 귓가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런 뒤, 마치 뱀이 속삭이는 것처럼 작게 이야기했다.
“그 아이 대신 화마에 삼켜졌던 네 자식의 복수를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내게 협력하도록 해. 당신 대신 내가, 그 아이에게 복수해 줄 테니까 말이야.”
간악한 꼬드김에 젤다는 입술을 짓씹어 물었다.
15년 전 그날 있었던 그 모든 헛된 죽음이, 자신의 헛된 욕심 때문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모조리 부정하고 싶었다.
“젤다. 내 말대로 할 거지?”
그래서였다. 마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만 것은.
* * *
에스테스 하우스.
작은 소란이 있긴 했으나, 데뷔당트 겸 약혼식이 무사히 끝났다.
쓰러지듯 잠이 든 로제타는 점심이 가까운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일어났다.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방 안에서 세안과 간단한 식사를 마쳤다.
메이드가 식기를 모두 내가고 난 뒤에야 비로소 혼자가 된 로제타는 작은 목소리로 실프를 불렀다.
“실프.”
지금까지는 데뷔당트 겸 약혼식 준비로 정신없이 바빴지만, 이제 모처럼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으니, 제 작은 친구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진득하게 불러 볼 생각이었다.
“실프. 좀 나와 봐. 응?”
하지만 몇 번을 불러도 실프가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정말 요즘 왜 이렇게 안 나오지?”
로제타가 답답함에 중얼거릴 때였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실프를 소환하는 일은 포기하기로 한 로제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답을 재촉하듯 또 한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로제타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근처에 놓인 의자에 털썩 몸을 주저앉혔다.
메이드나 레나가 왔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깜짝 놀라고 말았다.
노크와 함께 열린 방문 너머로 모습을 보인 이가 여러모로 의외였기 때문이었다.
로제타는 깜짝 놀라 방금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