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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87화 (87/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87화

“대부인……!”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카밀라였다.

“또 호칭이 그 모양으로 돌아갔구나.”

가벼운 질책에 로제타가 곧바로 호칭을 정정했다.

“아, 죄송합니다. 할머님. 아직 입에 붙지 않아서요.”

“잠깐 괜찮으면 차 한잔 내주겠니?”

“네. 이쪽으로 오세요.”

로제타는 서둘러 카밀라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설렁줄을 당겨 메이드에게 차를 내 오라 시킨 뒤,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자리에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카밀라가 입을 열었다.

“전부 네게 온 초대장이란다. 오늘 아침에 말이야.”

그녀는 방 안에 들어올 때부터 가지고 있던 꾸러미를 테이블 위에 조용히 올려 두었다.

여러 통의 편지를 하나로 합친 것이었는데 높이가 무려 검지만 해서 로제타는 조금 아연한 얼굴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무척이나 부지런하시네요.”

그 말에 카밀라가 퍽 재미난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원래는 레나가 네게 가지고 오려고 한 것이었는데 내가 중간에 받았단다. 네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물론 읽지는 않았으니 그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돼.”

“네…….”

그사이 차가 준비되었고, 카밀라는 잠시 입을 축였다.

“약혼식도 치렀고, 슬슬 사교 활동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니?”

로제타가 숨을 들이켰다.

나름 감춘다고 감췄는데, 내켜 하지 않는 기색이 그래도 조금 티가 났던 모양인지 카밀라가 곧장 다음 말을 이었다.

“뭐 물론 테런, 그 아이야 네게 참석하지 않고 싶다면 그래도 된다고 이야기해 주겠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단다.”

“네, 말씀해 주세요. 경청하겠습니다.”

카밀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분한 톤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사내들이 바깥에서 사업을 하고 정치를 하는 것처럼, 우리 여성들에게도 나름의 정치가 있어.”

로제타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정치는 남편이 가진 작위와 재력과는 상관이 없단다.”

내용인즉, 아무리 로제타가 공작 부인이라고 하더라도 사교 모임에서 중심이 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유구한 역사 속에서, 사교계의 꽃이라고 불렸던 여성들의 지위는 때론 왕비, 때론 자작 부인, 때론 백작 부인이었을 정도로 매우 다양했다.

“그러니 나는 네가 사교 활동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이 들어. 이 초대장을 직접 들고 온 것은 그걸 말해 주기 위함이란다.”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밀라의 말대로 사교 활동을 하는 게 내키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테런과의 계약 결혼을 결심하면서부터 이런 부분은 자신이 피할 수 없는 의무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각오가 되어 있다는 듯한 로제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카밀라가 그녀의 앞으로 들고 온 초대장들을 조금 더 밀며 입을 열었다.

“그럼 한번 살펴보겠니? 간단하게 어느 가문에서 네게 초대장을 보냈는지만이라도.”

로제타가 팔을 뻗어 초대장 꾸러미를 끌고 왔다.

그런 뒤 가장 맨 위에 올려진 봉투부터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약혼식을 준비하기 위해서 매일 공부했었다.

암기 과목 공부하듯 달달 외운 덕에 지난밤 테이블마다 인사를 다닐 때 실수하지 않을 수 있었다.

로제타가 손을 뻗어 편지 봉투 겉면에 쓰인 가문의 이름들을 훑어보았다.

그렇게 마지막 초대장까지 꼼꼼하게 읽은 뒤 봉투를 내려놓자, 기다렸다는 듯이 카밀라가 질문을 던졌다.

“다 읽었니?”

“네, 할머님.”

“그래. 그럼 이제 네 감상을 들어 보고 싶구나. 어떤 가문들이 네게 초대장을 보냈다고 생각하니?”

로제타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본능적으로, 이것이 카밀라 나름대로 로제타가 ‘에스테스 공작 부인’이 되었을 때 어떻게 처신하는 게 좋은지 알려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느낀 것은…….”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말해 보렴.”

용기를 얻은 듯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숨을 골랐다.

“정말 다양한 가문에서 초대장을 보내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로제타는 행여라도 자신이 잘못 대답한 것인가 싶어, 조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카밀라를 훔쳐보았다.

하지만 표정 감추기에 능한 카밀라의 얼굴에서 그녀의 속마음을 읽을 수는 없었다. 되레 다음 질문을 받았을 뿐이었다.

“어느 가문의 초대에 가장 먼저 응할래?”

“글쎄요.”

생각이 없어서 그렇게 대답한 것이 아니라, 신중함을 기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여실히 묻어 나오는 말이었다.

그 대답에 카밀라가 피식 웃었다.

“명석하구나.”

생각지도 못하게 카밀라에게서 칭찬을 듣자 로제타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좋아. 다음 질문을 이어 가자꾸나. 네가 가장 처음에 참석할 파티를 고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니?”

입이 바싹 말랐다.

로제타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내려놓으며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가려 노력했다.

“제가 어떤 분의 초대장에 먼저 응하느냐에 따라, 어쩌면 작은 분란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미스터 그로만에게 배운 것은 사교 댄스만이 아니었다.

그가 수도에서 제일가는 춤 선생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춤 실력 외에 다른 부분도 포함된다는 것을 로제타는 첫 수업부터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미스터 그로만은 사교계에 나뉜 파벌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해 주었고, 각각의 집단에 대한 성격과 특징에 관해서도 언질을 주었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에 무척이나 유용한 정보가 되었다.

그녀에게 도착한 초대장의 개수가 많은 만큼, 사교계에 나뉜 파벌도 다양했다.

그러니 로제타가 가장 먼저 어떤 파티에 참석하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콧대를 세울 수 있는 기회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체면과 자존심을 구기는 일이 되는 일이었다.

원치 않는 적의를 살 수도 있기에 행동과 선택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로제타는 실례가 되지 않는 수준에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쉽지 않은 일이네요. 이 많은 초대장 중, 가장 먼저 참석할 티 파티를 고른다는 게 말이에요.”

“얄팍한 자존심 싸움이라고 충분히 비웃을 수도 있지만 어쩌겠니. 이 판의 생리가 그러한 것을 말이다.”

카밀라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간신히 순서를 정한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파티에 다 참석하려면 시간이 참 많이 걸리겠어요.”

카밀라가 살짝 눈매를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손자며느리가 될 로제타에게 약간의 팁을 주기로 했다.

어차피 두 사람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이상,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라도 자신이 로제타를 조금이라도 도와주는 것이 낫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아니야. 네가 이 모든 초대장에 응할 필요는 없단다.”

카밀라는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 나갔다.

“초대를 받았다고 해서, 이 모든 곳에 얼굴을 디미는 것만큼 없어 보이는 일은 또 없으니까 말이야.”

로제타는 그녀의 말을 새겨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 초대장 중 그 어느 곳에도 응하지 않아도 된단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로제타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그게 정말인가요?”

카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희를 허락하며 했던 말은 기억하고 있겠지? 어딜 참석하는 너에 대한 뒷말은 반드시 나올 것이란다.”

“……예. 그렇겠지요.”

“어차피 섞일 수 없다면, 비굴해 보이는 것보단 널 우러러보게 만드는 편이 여러모로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단다.”

“그게 무슨……. 죄송해요. 할머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단박에 이해가 되지 않아요.”

조심스럽게 추가적인 설명을 부탁했다.

카밀라는 당이 떨어지는 모양인지, 티 푸드로 함께 나온 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물오물, 과자를 다 삼키고 난 뒤에야 그녀가 여상한 투로 말을 이었다.

“사교계에 너만의 파벌을 만들려무나.”

“……네?”

로제타의 큰 눈이 여러 번 깜빡거렸다.

한 박자 늦게 카밀라가 한 말의 뜻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그 무게까지도.

카밀라가 그녀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괜한 일을 벌여 망신을 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현재 상황에선 로제타가 그 누구보다도 의지할 만한 사람이었다.

카밀라가 ‘사교계의 대모’라고 불리기도 하니까.

그래서 로제타는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가 아니라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처음부터 완벽에 가까운 것을 욕심 내면 오히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그르칠 확률이 높단다.”

가벼운 투로 충고한 카밀라는 재차 그녀에게 당부했다.

“로제타. 명심해 두렴. 사교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말이다. 남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 중요하단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듯, 카밀라의 목소리에 은근한 힘이 실렸다.

“누구도 함부로 널 가늠하고, 재단하게 내버려 두지 말려무나. 네가 그들의 생각대로 뻔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기회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단다. 그리고 난 그게 이번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제가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것보단, 그들이 저와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이 나게끔 만들라는 말씀이시군요.”

“영특하구나.”

카밀라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손끝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털어 내려는 듯 엄지와 검지를 맞붙여 살짝 비볐다.

그런 카밀라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며 로제타는 다음 말을 이었다.

“좋은 조언 감사해요, 할머님. 하지만 결국,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것 같아요.”

이쪽에서 초대한다고 해도 누구를 선별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과제가 남아 있었다.

그때 카밀라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조금 도와주마.”

먼저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조금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멋쩍음에 한 번 더 작게 헛기침을 뱉은 그녀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처음…… 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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