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89화
“하지만 그 누구도 제게 강요하지 않았고, 저 역시 공작 부인의 의무라는 것에 부담을 느껴서 드린 말씀이 아니에요.”
“그러면요?”
“그렇게 하는 게, 앞으로 제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정한 거예요.”
테런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가 길게 내쉬었다.
공작가의 위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그렇게 결정했다고 하니 로제타의 의견을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겠다 싶었다.
“그렇다면 제가 반대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그대의 뜻대로 해요.”
“감사해요.”
두 사람은 이내 천천히 함께 계단을 올랐다.
테런이 땀을 흘린 탓에 에스코트는 없었으나, 나란히 선 두 사람의 거리는 손바닥 하나보다 작을 만큼 좁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깨가 스칠 듯 스치지 않았고, 그랬기에 어깨의 살갗이 한껏 예민해졌다.
로제타는 새삼 지금, 이 순간이 무척이나 좋다고…… 그래서 시간이 멈춰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테런은 편안한 차림으로 있고, 자신은 그의 옆에서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상황.
이 작은 사소함이 너무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들떠 있었다.
“사실 고민과 걱정이 많아요. 아시겠지만, 전 파티를 열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까요.”
“생각해 둔 장소가 있습니까?”
“음, 사실 있긴 해요. 그런데 이게 실현이 될지는 잘 모르겠어서…… 정리가 잘 안 되네요.”
“그렇다면 걱정할 것이 없겠군요.”
“어째서요?”
“에스테스 공작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유능하니까요.”
테런이 입꼬리를 당겨 올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레나는 상당히 유능한 인재입니다. 아무리 두루뭉술하게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그녀라면 당신이 원하는 것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 줄 거예요.”
“안 그래도 바쁠 텐데 괜한 일거리를 늘려 주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뇨. 아마 무척이나 즐거워할 겁니다. 그동안의 에스테스는 상당히 긴 시간 조용했고, 또 딱딱한 분위기였으니 말이죠.”
로제타는 테런의 말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마디 나눈 것 같지 않았는데, 두 사람의 걸음이 어느덧 본채에 다다랐다.
여기서부터는 각자 사용할 계단이 달라지기에 헤어져야만 했다.
로제타는 짧은 만남이 갈수록 아쉬워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굳이 테런을 붙잡지 않았다.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듯 그녀가 말했다.
“그럼 저는 공작님께서 조언해 주신 대로 레나와 함께 의논해 볼게요.”
“그럼 저도 당신이 알려 준 꿀물을 마셔 보고 후기를 들려 드리죠.”
로제타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테런의 그 말이, 곧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해 준 것만 같아서 서운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 역시 자신처럼 이 약속을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 주저한 끝에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기다릴게요.”
잠시 멈칫하던 테런이 이내 그녀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 * *
로제타는 자신의 파티에 초대할 손님들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인원수는 총 열 명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유력한 인사는 왕세자인 바론과 다퍼스 자작 내외, 리스턴 후작가의 올리비아와 패트릭 남매였다.
그 외에 수도에서 유력한 가문의 영애와 영식을 남녀 성비를 맞춰 결정했다.
로제타는 제게 도착한 초대장에 모두 거절의 뜻을 밝히고, 자신의 파티에 초대할 사람들에게 보낼 카드를 쓰기 시작했다.
바론에게 보낼 초대장은 맨 마지막 순번이었다.
카드 가장 첫 줄에 그의 이름을 적은 로제타가 깃펜을 거두고 탐탁지 않은 눈길로 자신이 쓴 철자를 내려 다보았다.
“아…… 진짜 부르기 싫다.”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육성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뭐, 이 공간에 그녀 혼자만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로제타는 바론을 초대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데뷔탕트 겸 약혼식 때 그쪽에서 먼저 로제타에게 초대해 주기를 기대한다는 말을 직접 건넸던 만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최대한 클라리사와 마주치지 않게 해야겠어.’
아직까진 약혼 관계이니만큼 인사는 해야 하겠지만, 아이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파티의 일정에 최대한 동선을 겹치지 않게 하리라 다짐을 되새겼다.
“휴. 클라리사한테 미안해…….”
그녀가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자신이 주최할 첫 파티니만큼 소중한 친구인 클라리사를 꼭 초대하고 싶었다.
“그냥 티 파티를 할 걸 그랬나? 그랬으면 클라리사를 불러도 됐을 텐데.”
사실 그녀가 준비하는 파티는 일반적인 티 파티가 아니었다.
로제타는 초대객들이 에스테스 하우스에서 3박을 머무르는 일명 ‘하우스 파티’를 기획했다.
이 부분에 대한 아이디어는 그녀의 전생 기억에서 얻었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기에 MT라고 할 만한 것을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언제나 그런 부분에 있어서 진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레나에게 이러한 생각을 이야기했을 때, 그녀가 특색 있고 괜찮은 것 같단 대답을 해 주어 자신감을 얻고 일을 추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몇 시간 동안만 즐기는 기존의 티 파티와 달리 생각보다 오랜 시간 공작저에서 머물러야 하는 만큼 초대장을 보낸 이들 중 몇몇은 거절을 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인편을 보내 살짝 의중을 떠봤는데 예상외로 모두가 참석한다고 이야기를 돌려주어, 선정한 열 명 모두에게 초대 카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내가 기대한 MT와는 분위기가 매우 다르겠지…….”
참여하는 사람들이 귀족이니만큼 상대적으로 고급스럽고, 차분하며 지적인 교류를 나누는 MT가 될 것이다.
교양과 체면을 중요시하는 집단이니만큼 피크닉이나 승마, 연주회나 낭독회 같은 일정을 짜 두었다.
로제타는 하우스 파티를 열기로 결정한 직후, 가장 먼저 클라리사에게 상황을 밝혔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드러냈는데 아이는 매우 의젓하게 로제타를 이해해 주었다.
「괜찮아요, 언니. 사교계에서 입지를 다지실 중요한 파티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어요.」
그러니 자신에게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어른스러운 위로까지 덧붙였다.
‘내게 마음을 써 준 클라리사를 위해서라도, 기필코 바론과의 약혼을 깨 주겠어!’
비장한 각오를 되새긴 로제타는 남몰래 열의에 불탔다.
생각을 환기할 겸, 그녀는 작게 실프를 소환해 보았다.
이제는 거의 습관처럼 부르고 있었지만 오랜 친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로제타는 책상 위에 팔꿈치를 세우고 그 위에 제 턱을 괴었다.
다정한 초록빛 눈동자에 걱정의 빛이 가득 어렸다.
“진짜 무슨 일이 있나…….”
답답함에 묵직한 한숨이 로제타의 입술을 가르고 나왔다.
사람이라면 차라리 찾아가 보기라도 하겠는데, 정령계는 어떻게 갈 방법도 없었다.
답답함에 재차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레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걱정이 있으신가 봐요.”
“어서 와요, 레나.”
로제타가 억지로 입술을 끌어 올렸다.
“하우스 파티 때문에 걱정이 좀 많아서요.”
“아무래도 티 파티보다는 규모가 큰 편이라 이것저것 많이 걱정되실 만하죠.”
로제타의 고충을 충분히 공감한다는 듯 레나가 맞장구를 쳐 주었다.
“마침 하우스 파티 이야기를 꺼내셔서 하는 말인데, 벌써 사교계에 소문이 파다한 거 있죠?”
“정말요?”
레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도 사교계 지인이 많이 없는 편인데, 건너 건너 지인을 통해 혹시 이번에 에스테스 파크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초대받을 수 없는지, 문 의해 오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로제타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레나가 중간에서 고생이 많네요.”
“아뇨, 즐거워요. 영애가 오시기 전까진 저 정말 따분했었거든요. 그러니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레나는 익살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리고 대부인께서도 칭찬하셨잖아요.”
“아…….”
로제타가 쑥스럽다는 듯이 살짝 웃었다.
카밀라에게 하우스 파티를 하고 싶다고 알리자, 좋은 생각이라고 칭찬을 해 준 일이 떠올랐다.
「좋은 결정이구나. 몸은 고되겠지만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카밀라는 이번 기회를 통해 로제타가 에스테스 공작가의 안주인으로서, 손님들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 등을 미리 체험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사실 그렇게까지 미래를 생각하고 결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로제타는 입을 다물고 맞장구치듯 배시시 웃었다.
칭찬을 해 주겠다는데 사양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초대장을 받으신 분들도 무척이나 기뻐하셨어요. 영애께서 여는 첫 파티에 초대된 것이니만큼, 본인들이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씀하셨거든요.”
“다행이네요.”
생각보다 호평인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님도 참석해 주신다고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고마워요, 레나.”
로제타는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레나에게 전했다.
테런이 하우스 파티에 참석할 수 있도록 긱스를 설득해 준 것이 바로 레나였다.
“당연히 영애의 첫 파티니, 공작님께서 함께 계셔 주는 편이 여러모로 낫죠! 제 남편의 툴툴거림은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입술을 다물려 놓을 테니까요.”
“든든하네요.”
“그나저나 조만간 수도에 하우스 파티가 대유행하겠어요. 이렇게 차세대 사교계의 꽃이, 영애가 되는 걸까요?”
“너무 띄우진 마시고요.”
들뜬 레나의 말을 들으며, 로제타는 잠시 놓았던 깃펜을 다시 잡았다.
바론에게 보낼 초대장 문구를 이제 완성할 때였다.
* * *
올리비아의 방문이 또 예고도 없이 벌컥 열렸다.
“올리비아!”
문을 옆과 동시에 마커스가 큰 목소리로 제 딸의 이름을 불렀다.
“네? 네, 아, 아버지.”
갑작스러운 부름에 깜짝 놀란 올리비아의 목소리는 갈라지기까지 했다.
막, 차를 마시려던 그녀는 마커스의 등장으로 너무 놀란 나머지 찻잔을 손에서 놓쳐 버렸다.
테이블보에 찻물이 엎질러져 잔뜩 젖었고, 그 위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입고 있는 드레스의 허벅지 부분에도 찻물이 튄 상태였다.
마커스의 눈동자가 언짢은 감정으로 진하게 물들었다.
마커스는 제 딸이 어디 다치진 않았는지 걱정은커녕 살펴보지도, 물어 보지도 않았다.
조금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