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90화
“너는 대체!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이렇게 칠칠찮게 구느냐?”
“죄, 죄송해요.”
그가 거칠게 혀를 차자, 올리비아가 이제는 습관적으로 사과의 말을 했다.
그에게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설명하고 자신을 이해시키려 하는 것보다 그냥 빨리 떠나보내는 게 여러 모로 더 낫다는 것을 십수 년에 걸쳐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 어쩐 일이세요…….”
그녀는 최대한 공손해 보이도록 두 손을 포개어 모은 채 섰다.
“에스테스 공작의 약혼녀로부터 초대장을 받았지?”
“네? 네……. 패트릭도 같이 초대받았어요.”
혹시 가지 못하게 막으려는 셈인 걸까.
올리비아는 조금 초조해졌다.
패트릭이라는 감시자와 동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무척이나 아쉽고 또 슬펐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억압의 상징이기만 한, 이 리스턴 후작저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외출의 기회가 그녀로서는 무척이나 절실했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우려와 달리, 다행스럽게도 마커스의 입에서 가지 말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을 데리고 가거라.”
그 말에 내내 바닥만 보고 있던 올리비아가 고개를 들어 마커스의 뒤를 바라보았다.
그는 누구를 동행한 상태였다.
“누, 누구를 말씀이신지…….”
올리비아가 놀란 눈으로 마커스의 뒤편에 서 있던 여자를 바라보았다.
중년의 여자는 리스턴 후작가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지급된 옷을 입고 있었다.
메이드복은 아니고, 하녀장이 입을 법한 수수한 드레스였다.
하지만 그녀는 하녀장이 아니었고, 올리비아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저, 저 사람은 대체…… 누군가요?”
용기를 내어 한 질문에 돌아온 것은 마커스의 호통이었다.
“네가 그딴 것을 알아서 무엇 하느냐!”
“죄, 죄송…… 해요.”
얼마나 큰 목소리로 윽박지르는지, 올리비아는 귀가 다 쩌렁쩌렁 울리는 기분이었다.
그때, 내내 마커스의 뒤에 머물러 있던 중년 여성이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다 성대 다 상하겠네요.”
그녀의 말투에 올리비아가 깜짝 놀랐다.
사용인의 의복을 입고 있는데, 주인인 마커스에게 너무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탓이었다.
또 한 번 큰 소리가 나겠구나, 올리비아는 입술을 감쳐물며 나름의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예상과 달리 마커스는 못마땅하다는 듯한 기색만 내보일 뿐, 그녀의 불손한 언행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젤다라고 불러 주세요.”
평민이 아닌 건가?
아닌데. 사용인복을 입고 있는데.
혼란스러운 감정에 올리비아는 인사에 대한 답을 제때 하지 못했다.
하녀장의 옷을 입고, 또 제게 존댓말을 사용하고는 있으나 이상하게도 고압적인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이상한 점은 마커스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 전혀 두려움이 없다는 점이었다.
젤다는 올리비아에게 통보와도 같은 말을 이어 나갔다.
“에스테스 공작가에서 생활하실 3박 4일 동안은 제가 아가씨를 수행하게 되었답니다. 잘 부탁드려요.”
그제야 올리비아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해요, 제, 젤다.”
여전히 그녀의 정체가 이해되지 않았던 올리비아는 힐끗 제 아버지를 곁눈질했다.
하지만 표정을 살펴보기도 전에 볼 일은 다 끝났다는 듯 마커스는 찬바람이 일 정도로 냉랭하게 등을 돌려 방을 나섰다.
젤다는 그런 그의 뒤를 쫓아 나가면서도, 올리비아에게 작별의 인사는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지고 나서야, 올리비아는 그들이 닫고 가지 않은 제 방의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감시자가 하나 더는 것 같아, 마음이 묵직했다.
* * *
열심히 준비하다 보니 어느덧 하우스 파티 당일이 되었다.
사실 로제타야 그들이 저택에 머무는 동안 어떠한 활동을 하는 게 좋을지, 일종의 일정표 같은 것을 짜느라 고심했을 뿐이었다.
실질적인 준비는 레나의 진두지휘 아래 사용인들이 고생하며 진행했다.
손님을 맞이하기 전, 로제타는 자신을 물심양면 도와준 사용인들을 모아 놓고 짧은 치하의 말을 건네었다.
“3박 4일 동안 조금 더 정신없고 바쁠 거예요. 지금까지 잘해 준 것처럼, 조금만 더 힘내 주세요.”
로제타는 짧은 말의 끝에 일이 모두 끝난다면 휴가와 섭섭지 않을 정도로 보너스를 지급할 계획이라는 것도 밝혔다.
준비로 고단했던 사용인들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잠시나마 처졌던 그들이 다시 사기를 되찾았다.
그 모든 비용은 테런이 로제타에게 내어 준 가문 패에서 지급될 예정이었다.
‘돈을 쓰는 방법은 다양하니까…….’
좋아하는 사람들을 잠시 흐뭇하게 바라보던 로제타가 손뼉을 마주쳤다.
잠시 일었던 소란이 금세 잦아들었다.
“그럼, 오늘부터 잘 부탁해요.”
“네, 영애. 열심히 모시겠습니다.”
* * *
약속한 시각이 되자 속속들이 초대객들이 도착했다.
로제타와 테런은 신혼부부처럼 나란히 서서 그들을 맞았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보낼 3박이 기대되네요.”
“이렇게 선뜻 와 주셔서 감사해요. 다퍼스 자작 부인, 그런데 아이는 어떻게 하고 오셨어요? 데리고 오셔도 괜찮았는데.”
“아이는 유모에게 맡겨 두었어요. 오랜만에 기분 전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너무 좋네요.”
그중 가장 늦게 온 것은 바로 바론이었다.
화려한 마차에서 내리는 바론을 보며, 미리 도착해 있던 초대객들과 테런, 로제타가 미리 맞춘 듯한 목소리로 맞았다.
“윌셔스에 광영을. 바론 왕세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 다들 날 기다리고 있는 겁니까?”
“이렇듯 귀한 걸음을 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극진하게 인사를 하자 바론이 기분 좋은 듯 크게 웃었다.
그때, 바론의 뒤에서 누군가가 꼼지락거리며 내렸다.
그 기척에 바론이 슬쩍 뒤를 돌아 보며 눈매를 찌푸리고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나저나 제가 혹을 하나 달고 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바론과 같은 푸른 머리카락 색의, 똘망똘망하게 생긴 소년이 가슴팍에 두꺼운 책 한 권을 꼭 안은 채 서 있었다.
“원래는 혼자 오려고 했는데, 부왕께서 체이스 이 녀석도 데리고 가라 성화를 부리시기에 이리 함께 왔습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같이 잘 오셨습니다.”
테런과 로제타는 소년을 향해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왕자님.”
“체이스 왕자님. 처음 뵙겠습니다. 로제타 클리프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레이디 클리프. 그리고 에스테스 공작. 늦은 인사지만 약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해요.”
나이는 어리지만 체이스 쪽이 바론보다 더 의젓했다.
‘왠지 익숙한 느낌인데……?’
뭔가 기시감이 느껴졌던 로제타는 이내 체이스가 클라리사와 무척이나 닮은 성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사이 로제타의 옆에 서 있던 클라리사가 굳은 얼굴로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클라리사는 예법에 맞춰 드레스를 펼쳐 들며, 바론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윌셔스에 광영을. 오랜만에 뵈어요, 바론 님. 그리고 체이스 님.”
클라리사를 바라보던 체이스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그것을 눈치챈 것은 로제타뿐이었다.
‘……어머?’
로제타가 놀란 표정으로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혹시……?’
그녀의 눈빛이 곧 초롱초롱하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뭐로 보든 이쪽이 더 맞는데? 연령대도 그렇고……. 아니, 아니지 참. 좀 더 지켜보자. 체이스 왕자가 어떤 성격인지는 아직 모르니까 말이야.’
그녀가 싱글싱글 웃기 시작하자, 옆을 지키고 있던 테런이 로제타 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넌지시 물었다.
“무슨 좋은 일 있습니까?”
로제타가 손바닥을 세워 제 입술을 가리며 테런에게 귓속말했다.
“상황이 조금 더 정리되면 말씀드릴게요.”
테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이것 참.”
두 사람의 앞에 서 있던 바론이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눈앞에서 보란 듯이 이렇게 금실 좋은 모습을 보이면, 저 같은 사람은 아쉽고 슬프지 않겠습니까?”
바론이 클라리사를 흘깃 내려다보았다.
아직 아이인 것이 못마땅한 듯 보였다.
그 시선에, 조금 전까지 로제타의 마음을 채웠던 흐뭇함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내 새끼 눈에서 눈물 나게만 해 봐, 어디. 가만 안 둬. 진짜로.’
클라리사를 대놓고 무시하는 바론의 행동에 적잖이 화가 치밀었던 로제타의 눈에 힘이 실렸다.
바론이 너무 밉상이었다.
로제타는 그에 대한 악감정은 접어 두고 우선 일부터 치르자고 마음먹었다.
“오시느라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가져오신 짐은 저희 시종들이 묵으실 방으로 바로 올려놓을 예정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두 모이자 어느덧 일몰 무렵이라 저녁 식사를 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럼 바로 식당으로 이동하실까요? 귀한 분들을 모신다고 주방장이 아주 정성을 들였어요.”
로제타가 상큼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에스테스 공작저의 주인은 테런 아셔 에스테스였으나, 이번 파티를 주최한 사람은 바로 그의 약혼녀인 로제타였다. 하여 초대객들은 모두 로제타가 주도해서 안내하였다.
그때, 테런이 로제타의 옆으로 오더니 가볍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쥐었다.
그녀가 슬그머니 옆을 돌아보자 테런이 미안한 듯 제게 미소 지어 보이는 게 보였다.
‘이유가 있겠지.’
로제타는 괜찮다는 듯 턱을 아래로 당기고는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어머.”
뒤에서 작게 탄성이 들려왔다.
“공작님께서 클리프 영애를 무척 아끼시나 봐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런 게 바로 연애결혼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초대객 모두가 훈훈한 두 사람을 보며 한마디씩 나누는데,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뒤만 따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바로 바론이었다.
그의 눈길은 테런의 손이 닿아 있는 로제타의 허리에 가 닿아 떨어질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