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91화
* * *
약혼식 때 짧게 인사를 나누었으나 로제타에게는 모두가 거의 초면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석찬 때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좋았다.
유했고, 무엇보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로제타는 아마 소수의 인원이 모여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시간이 좀 늦었으니 클라리사와 체이스 님은 이만 방으로 가실까요?”
로제타는 에클레어 속에 디플로메트 크림을 수북이 채우고 과일과 함께 낸 디저트를 깔끔하게 해치운 클라리사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약혼식을 치르고 정식으로 테런의 약혼녀 지위를 공인받았기에, 더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클라리사를 공녀님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되었다.
로제타의 말에 클라리사는 냅킨으로 우아하게 제 입가를 닦고 의자에서 내려왔다.
“체이스 님. 방까지 안내해 드릴게요. 함께 가요.”
체이스의 대접은 클라리사가 맡게 되었다.
성향이 제법 비슷한 아이들이라 그런지, 조용조용하게 자기들끼리 재밌고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식사 내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던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서 내려왔다.
소년은 나이답지 않은 의정함을 보이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만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모두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좋은 밤 되세요. 왕자님, 그리고 공녀님.”
어른들의 인사에 두 아이가 나란히 서서 고개를 끄덕인 뒤 냉큼 뒤돌아섰다.
식당을 나서는 그들의 발걸음이 제법 경쾌해 보인 것은, 비단 착각만은 아니리란 생각이 들었다.
“공녀님께서 클리프 영애를 무척 잘 따르시는군요.”
“아무래도 영지에서 함께 지낸 시간이 있다 보니까요.”
흐뭇하게 두 아이를 지켜보던 로제타가 이내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저희도 식사는 이쯤 마무리하고 빌리어드 룸으로 옮길까 봐요.”
“좋은 생각입니다.”
빌리어드 룸은 말 그대로 당구대가 설치된 커다란 방을 일컬었다.
주로 1층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저택에 손님이 많이 찾았을 때는 거실의 역할도 겸했다.
일종의, 어른들을 위한 놀이방이라고 볼 수 있었다.
빌리어드 룸으로 자리를 옮기자 손님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남성들은 술을 마시며 당구를 쳤고, 여성들은 편안한 소파에 앉아 간단한 다과를 들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론이 자꾸만 여성 쪽에 끼려고 했다.
“레이디들께서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까?”
벌써 얼마나 마신 건지 그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그의 등장에 잠시나마 화기애애하던 여성 그룹 쪽의 공기가 일순 긴장감을 띠었다.
지위가 지위니만큼 그는 결코 편한 사람이 아니었고, 또 그가 미혼과 기혼을 가리지 않고 치근덕댄다는 소문이 익히 퍼져 있었기에 나름 경계를 하기 위함이었다.
“리스턴 영애. 잠깐 자리 좀 바꿔 줄 수 있습니까?”
여성들이 앉아 있는 소파는 U자 모양의 반원형 소파였는데, 로제타가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았고, 그런 그녀의 옆에 각각 올리비아와 다퍼스 자작 부인이 앉아 있었다.
앉겠다면 끝자리에 앉아도 될 것을 굳이 자신의 옆으로 오겠다는 심산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굳이 이쪽으로 오겠다는 거야? 어휴, 정말. 쫓아 보낼 수도 없고.’
어떻게 보면 다소 무례한 바론의 행동에 로제타는 남몰래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삼켰다.
지목당한 올리비아는 어찌할 줄 몰라 하다가, ‘네…….’ 하고 작게 대답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소파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바론이 예의상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인사를 전했다.
“양해에 감사합니다.”
“벼, 별말씀을요…….”
하지만 올리비아는 다시 소파에 앉지 않았다.
어딘지 불편한 기색으로 앞에 서 있던 그녀는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높였다.
“저, 저기…….”
“네? 편히 말씀하세요. 리스턴 영애.”
“저, 저는…… 이, 일어난 김에…….”
입이 마르는지 마른침을 꼴깍 삼킨 뒤 그녀가 떨리는 입술을 열어 말을 이었다.
“일어난 김에…… 전 이만 방으로 돌아가 볼게요.”
자신에게 집중된 이목도 제법 부담스러웠고, 또 혹시라도 자신이 이 모임의 분위기를 깨트린 것인가 싶었기에 그녀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런 올리비아를 잠시 바라보던 로제타는 바론에게 양해를 구했다.
“전하. 잠시 실례할게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탁하자 그는 금세 길을 내어 주었다.
로제타가 곧 다시 돌아오리라 생각한 까닭에서였다.
그녀는 테이블을 돌아 올리비아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많이 피곤하셨죠? 제가 무심했어요.”
그녀는 올리비아 대신 제게로 시선이 모이게끔 만들며, 미안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올리비아 혼자 방으로 돌아가게 한 뒤, 모임을 계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녀 혼자 자리를 비우게 된다면 이후에 나눈 대화로 다음 날 올리비아가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이곳까지 오시느라 모두 고생하셨는데, 제가 이 시간이 너무 즐거워 여러분들을 너무 눈치 없이 붙잡아 두고 있었나 봐요.”
“클리프 여, 영애…….”
괜히 자신 때문에 로제타가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는지 올리비아가 미안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로제타는 괜찮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아 손등을 두드려 주고는 다음 말을 이었다.
“내일의 일정을 위해서 오늘은 이쯤에서 정리할까요?”
다행스럽게도 다퍼스 자작 부인이 눈치껏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렇게 하는 편이 좋겠어요. 사실 저도 아까부터 다리가 살짝 저린 터라 휴식이 필요했거든요.”
“그럼…… 그렇게 할까요? 내일 다시 모이면 되니까요.”
남성들도 막 당구 게임이 끝났는지 정리하는 기색이었다.
로제타가 웃으며 말했다.
“모두 이렇게 양해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그 순간, 바론의 눈매가 짜증으로 찡그려졌다.
그렇게 험악한 얼굴로 올리비아를 노려보던 바론이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 좋은 밤 되세요.”
“편히 쉬십시오.”
그는 제게 쏟아지는 편히 쉬시라는 모두의 인사에 제대로 답도 하지 않고, 그저 혀만 찼다.
그런 뒤 짜증이 났다는 기색을 여과 없이 선보이며 빌리어드 룸을 박차고 나갔다.
‘왜 저래, 진짜…….’
밉다 밉다 하니까 더 미워 보인다.
로제타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바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옷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기는 손길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올리비아가 어찌할 줄 몰라 하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어떡하지요? 괜히 저 때문에 분위, 분위기를 망친 것 같아요……. 저, 전하께서도 화가 많, 많이 나신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말아요, 리스턴 영애.”
로제타는 불안해 보이는 올리비아를 다독였다.
* * *
그렇게 첫날의 일정이 모두 끝나고, 손님들은 모두 제게 주어진 방으로 올라갔다.
“어…… 어?”
하지만 올리비아는 제 방에 들어오자마자 다시 밖으로 나왔다.
잠시 주저하던 그녀는 제 방 바로 맞은편에 배정받은 패트릭의 방에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들어와.”
안에서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패, 패트릭…….”
그녀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제 이복동생을 불렀다.
방에 노크한 것이 올리비아라는 것을 깨달은 패트릭이 얼굴을 구기며 문 쪽을 돌아보았다.
“왜, 뭐. 씨발.”
그저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패트릭에게서 폭풍 같은 신경질을 마주하게 되자, 올리비아는 사과부터 했다.
“미, 미안해. 쉬는데…….”
“재수 없게 굴지 말고 빨리 말하고 나가. 잘 거니까.”
“아. 그, 그게 말이야…….”
“아, 뭐! 불렀으면 말을 해. 답답하게 굴지 말라고 한 말 못 들었어?”
또 한 번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에 꽂히자 올리비아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이복동생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리스턴의 가주 자리에 별다른 관심도 없는 자신을 이렇게까지 경쟁자 취급하며 날을 세우는 이유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호, 혹시 말이야…….”
올리비아는 마른침을 한번 삼킨 뒤,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나랑 같이 온 메이드에 대해서…… 아는 게 있니?”
“뭐? 누구?”
패트릭은 기억을 더듬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 왜…… 나랑 같이 온…… 젤다라는 여자 말이야.”
“누구? 아…… 그 노인네?”
패트릭이 아는 체를 하자마자 올리비아는 꼭 모아 쥔 양손을 턱 끝까지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제 방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진심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방 안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스턴 후작가에서 그녀가 데리고 온 시종은 오로지 젤다 한 명.
그런데 잠자리도 봐 주지 않고 그녀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곳이 리스턴 후작가도 아닌데, 도대체 어디를 간 걸까.
‘혹시 리스턴 후작가에 오기 전에 에스테스 공작가에서 일했던 것일까? 아냐……. 이곳의 사람 중 누구도 그녀를 아는 눈치가 아니었는걸.’
젤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인지 그녀의 행동이 전혀 예상되지 않았다.
마커스가 직접 데리고 왔던 만큼, 아버지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패트릭은 그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까 싶어 찾아왔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