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92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하지만 패트릭이 돌려준 대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오히려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 그녀에게 더욱 더 날이 선 비난을 이어 나갔다.
“둔해 빠진 게. 이젠 사용인들한테서까지 무시를 받네. 쯧쯧. 네가 그 모양이니까 밑의 것들도 그러는 거 아냐?”
잔소리가 길어질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했다.
“고, 고마워. 내가 좀 더…… 찾아 볼게. 잘 자, 패트릭…….”
패트릭은 그녀를 굳이 붙잡지 않았다. 그 덕에 올리비아는 조용히 문을 닫고 제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그 짧은 사이, 없어진 젤다가 다시 돌아와 있지는 않았다.
올리비아는 방문 가까이에 놓여 있는 자신의 짐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가져온 짐은 가문에서 따라온 수족들이 정리를 해 주는 것이라, 초대한 쪽의 가문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 손을 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차에서 내릴 때 에스테스의 사용인들이 가져다 놓은 위치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듯했다.
그 말은 결국, 이 방에 젤다가 들어온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백 보 양보해서 들어오긴 왔어도 짐 정리는 결국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젤다가 자신을 따라온 이유가 다른 데 있다는 생각이 더욱 확실해졌다.
올리비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패트릭이 모르는 걸 보면…… 아버지께서 내 곁에 붙여 놓은 감, 시자는 아닌 것 같은데…….”
축 처진 어깨로 중얼거리며 그녀는 자신의 짐가방을 직접 정리하기 시작했다.
잠시나마 로제타에게 부탁하여, 이곳에 머무는 동안 제 시중을 들어 줄 메이드를 보내 달라고 할까 하다가 관두었다.
괜히 제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면, 후작가로 돌아갔을 때 골치 아파지리라 생각한 까닭에서였다.
젤다가 돌아온 것은 자정이 넘어서였다.
올리비아는 그녀에게 어딜 다녀왔느냐고 묻지 않았고, 젤다 역시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이튿날이 되었다.
로제타가 듣기로 오늘 남자 그룹은 승마를 한다고 했고, 클라리사는 체이스와 함께 토토와 정원 산책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로제타는 여자 그룹과 함께 빌리어드 룸에 모여 독서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모두 잠자리는 편하셨나요?”
로제타가 빌리어드 룸에 들어서며 웃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네, 영애. 에스테스 공작가에서 신경을 많이 써 주셔서 푹 쉴 수 있었답니다.”
“다행이에요.”
로제타가 친절하게 웃으며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창문 쪽으로 다가가려다 잠시 멈칫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진 탓이었다.
로제타는 그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여자는…….’
중년의 여성으로 보이는 한 시종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한눈에 그 사람이 올리비아가 데리고 온 사용인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아무리 에스테스 공작가에서 편의를 돌봐 준다고 한들 자신이 평소 부리던 수족만큼 성에 차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각자 두 명 정도, 수발을 들어 줄 전속 시종을 데리고 와도 좋다고 이야기를 미리 해 두었다.
어제, 리스턴 후작 남매가 도착했을 때부터 묘하게 신경이 쓰였던 이였다.
보통의 사용인들에게는 존재감이 없다.
주인의 그림자가 되어야 하므로 애초에 그렇게 교육을 받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메이드 역시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했다.
아무런 말도 없었고, 별다른 특이점도 없었다.
굳이 이상한 점을 꼽자면, 그녀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과 이상하리만치 제 앞에 얼쩡거리며 눈에 띄려고 애를 쓰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었다.
물론 메이드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충분히 이해는 갔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쉽게 볼 수 없는 색깔이니만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무례하다는 것도 잊고 뚫어져라 그녀를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뭘 어떻게 생각해 봐도 속 시원한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왜 내 눈에 띄려고 하는 거지?’
그 이유에 대해선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집요하게 살피는 눈빛에는…… 뭐랄까.
자신을 원망, 혹은 증오하는 것 같은 빛이 어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저 여자를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
이제껏 로제타를 둘러싼 세계가 그리 넓지 않았었던 것만큼, 그동안 자신이 만났던 사람 중에 저 여자가 있었는지 추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초면인 얼굴이었다.
로제타는 도저히 알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중년 여성의 시선이 조금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후…… 참자. 참아.’
로제타는 심란한 속을 다스렸다.
자신이 조금 더 막 되어 먹은 성격이었다면 저쪽에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고 해도 눈빛이 불손하다고 꼬투리를 잡아 책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성격이 아니었을 뿐더러, 저 여성의 소속이 공작가가 아니기에 불가능했다.
중년 여성은 로제타가 직접 초대한 가문의 사람이었다.
더더군다나 그 상대가 테런과 같은 4대 가문.
만약 로제타가 저 메이드의 행동을 문제 삼는다면, 리스턴 후작가에서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그러다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해 온다면 자칫 가문과 가문 간의 논쟁으로도 일이 커질 수 있었다.
자존심이라는 것은 무척이나 예민한 것이기에, 고위 귀족을 상대로는 항상 최악의 수를 가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옳았다.
그랬기에 로제타는 불편한 시선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젤다의 시선을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한 채,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였다.
로제타의 머리카락이 스르륵, 갸름한 얼굴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오늘 반 묶음을 하였는데, 아무래도 리본 매듭이 헐거워져 흘러내린 모양이었다.
“아……!”
로제타가 서둘러 몸을 돌렸다.
떨어진 머리 리본을 주우려는 찰나, 이미 그것을 먼저 주운 사람이 그것을 자신의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여기…… 떨어트리신 거예요.”
“아. 고마워요.”
잠시 멈칫하던 로제타는 서둘러 표정을 정리하고 그녀가 주워 준 머리 끈을 집으려 손을 뻗었다.
“이름이 뭐죠?”
“……젤다입니다.”
“고마워요, 젤다.”
로제타가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젤다의 손바닥 위에 놓인 머리끈을 잡았다.
그 순간, 얼떨결에 손이 스치게 되었다.
‘……어?’
로제타가 머리끈을 가져가자, 젤다는 다시 손을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로제타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손을 뻗었고, 젤다의 손을 무의식적으로 덥석 잡았다.
“……잠깐만.”
그리고 그 순간 젤다가 무척이나 신경질적으로 로제타의 손을 뿌리치 듯 털어 내었다.
그 바람에 로제타의 손에 쥐어져 있던 머리끈이 다시 날아가 떨어졌다.
로제타도, 그리고 그녀의 손을 쳐 낸 젤다도 모두 당황했다.
두 사람 사이는 물론, 빌리어드 룸에 있던 다른 여성 귀족들 모두 숨을 죽였다.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이 공간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은 바로 올리비아였다.
“제, 젤다.”
올리비아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어찌할 줄 몰라 하던 그녀는 이내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고, 젤다에게 채근했다.
“어서, 어서 사과드리지 않고 뭐 하는 건가요?”
그녀의 질책에, 젤다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한 박자 늦게 양손을 아래로 떨어트리며 자신의 아랫배 앞으로 공손히 모았다,
젤다는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 내키지 않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내 로제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제…… 가, 다른 사람과 닿으면 가끔 소스라쳐서…… 반사적으로 무례를 범했습니다. 아가씨. 모쪼록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세요.”
젤다의 음성은 마치 누군가가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힘껏 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젤다의 사과에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올리비아도 안절부절못하며 사과했다.
모두가 암암리에 로제타가 야만인의 피가 섞인 사생아인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엄연히 클리프 남작 부처의 소생으로 이름을 올린 호적상으로는 적녀였기에, 평민인 젤다가 그녀의 몸에 손을 댄 것은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로제타는 슬쩍 주위를 곁눈질했다.
빌리어드 룸에 있는 모두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켠 뒤 애써 평온한 목소리를 꾸며 내어 대답했다.
“괜찮아요. 내가 먼저 함부로 잡은 것도 있으니.”
그런 뒤 젤다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내가 갑자기 잡아서 많이 놀랐겠어요. 젤다, 미안해요. 나도 사과할게요.”
“아닙니다……. 아가씨. 정말, 죄송합니다.”
로제타는 젤다의 사과를 받아들이겠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지금 매우 언짢은 상태였다.
젤다가 자신을 뿌리쳤을 때의 감각이 아직도 손에 선연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반복해서 꾼 꿈에서, 로제타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로 추정 되는 여성으로부터 몇 번이나 손이 내쳐졌다.
그것은 상당히 불유쾌한 감각이었고, 조금 전 젤다의 행동은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