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예쁜 애 옆에 예쁜 애-93화 (93/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93화

하지만 로제타는 애써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리려고 했다.

자신이 주최한 첫 파티를 감정에 휘둘려 망치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리스턴 후작가와도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다.

로제타는 다시 한번 한숨을 삼키며 젤다의 행동을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오늘 내게 실수한 것도 있으니 당분간은 알아서 조심하겠지.’

로제타는 애써 미소를 띤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젤다. 당신은 나가 봐도 좋아요.”

올리비아에게도 괜찮다는 듯이 미소 지어 보인 뒤 다시 뒤를 돌았다.

“오늘, 날이 무척이나 좋은 것 같더라고요.”

그녀는 어색하고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기라도 할 셈으로, 애써 밝은 목소리를 꾸며 내었다.

창가로 다가간 로제타는 곧장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부드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바람이 좋네요.”

다퍼스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그녀 역시, 조금 경직된 이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 셈인 듯했다.

다퍼스 자작 부인의 말에 동의하듯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로운 제안을 꺼냈다.

“그러게요. 이 날씨에 책만 읽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일정을 바꾸어서 피크닉을 가는 건 어떨까요?”

조금 전 젤다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만큼, 계속 이곳에 머무르는 것보다는 새로운 곳에서 기분을 환기하는 것이 더 좋으리란 생각이 들던 차였다.

“무척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이곳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한 영애가 그 제안에 반색하며 동의했다.

뒤이어 모두가 찬성하듯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에스테스 하우스 뒤편의 동산에 개울이 흐르고 있어요. 그쪽으로 나가요.”

로제타는 설렁줄을 당겼다.

시종에게 일러 주방에 간단한 다과와 샌드위치를 만들어 달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응접실에 찾아온 이는 시종이 아니었다.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들어오라는 허락을 내리자마자 문이 열렸는데 그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바론이었다.

“평안한 오후 보내고 계십니까? 레이디들.”

“윌셔스에 광영을. 왕세자 전하를 뵙습니다.”

“하핫, 다들 고개를 드세요. 볼 때마다 그리 극진히 인사들 하시니, 제가 부담스럽습니다.”

그의 허락에 모두가 허리를 들어 올렸다.

바론의 등장이 기분 좋지는 않았으나, 호스티스로서 의무를 다하고자 했던 로제타가 애써 웃는 얼굴로 물음을 건넸다.

“오늘 승마를 한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여긴 어쩐 일이신지…….”

바론이 웃으며 말했다.

“밖에 나가 보니 날씨가 좋더라고요. 이런 날, 레이디들께서도 실내에만 계시지 말고 밖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시면 어떨까 하여 모시러 왔습니다.”

여성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조금 전까지 피크닉을 가자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던 만큼, 바론의 제안이 제법 솔깃했으나 승마는 하고 싶지 않았다.

로제타가 눈치껏 그녀들을 대변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흰 승마복을 따로 준비하지 않아서……. 어쩌죠?”

거절하겠다는 듯, 미안한 얼굴로 눈썹을 내려트린 뒤 이야기를 꺼내었다.

하지만 바론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아!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시죠. 승마는 취소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크리켓을 할까 합니다. 같이 어울려 주십시오.”

“아, 크리켓이요.”

로제타가 다시 여성들을 돌아보았다.

한결 표정이 환했다.

아무래도 승마보다는 조금 더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왕세자가 직접 데리러 온 만큼 거절할 명분 또한 없었다.

로제타는 탐탁지 않은 마음을 숨기며 이내 고개를 끄덕인 뒤, 바론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곧 준비해서 나가겠습니다.”

* * *

여성들은 보다 더 편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뒤, 연무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해 보는 거라 기대되네요.”

“그런데 이 인원으로 할 수 있을까요?”

윌셔스 왕국에서 크리켓은 여성들도 종종 하는 스포츠였다.

연무장으로 향하니, 남성들이 이미 재킷과 조끼를 벗고 한결 편안한 셔츠 차림으로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각자 몸을 풀었고, 사용인 몇몇이 연무장의 흙바닥에 크리켓 경기를 위한 라인을 그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로제타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당연 테런이었다.

언제나 단정하던 모습과 달리, 그는 셔츠의 단추를 가볍게 두세 개 정도 푼 채였다.

그럴 뿐만 아니라 셔츠의 소매를 접어 걷어 올려, 팔뚝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누군가가 그에게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지, 피식 웃는 모습이 시원해 보였다.

마치,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청춘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싱그러운 분위기였다.

로제타는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멈춰 서서 그런 테런의 모습을 잠시 멍하니 지켜보았다.

“영애? 왜 그러세요?”

함께 내려가던 다퍼스 자작 부인이 그녀가 멈춰 선 걸 깨닫고 아래에서 뒤돌아보며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금방 내려가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로제타가 두 손으로 살짝 드레스를 걷고 총총걸음으로 빠르게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젤다와의 일로 가라앉았던 기분은 테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싹 잊힌 지 오래였다.

다른 여성들도 각자 자신의 파트너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로제타도 서둘러 테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지척에서 반가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공작님.”

“오셨습니까?”

제 발아래 땅을 고르고 있던 테런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눈빛에는 약간의 미안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갑자기 찾아간 바론 님 때문에 일정이 어그러져 퍽 곤란했겠습니다. 말리긴 했는데…… 저분이 뭐에 하나 꽂히면 막무가내시라.”

“좀 그러신 듯했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저희도 날씨가 정말 좋은 것 같아서 피크닉을 갈 생각이었거든요.”

“실내에서만 머무르기엔 아까운 날씨긴 하죠.”

동의한다는 듯 로제타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은 곧 사라졌다.

로제타는 표정을 굳히고 테런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섰다. 그리고 그의 키에 맞추기라도 하듯 발꿈치를 들어 올리고 귀에다가 속삭였다.

그녀가 말할 때마다 내쉬는 옅은 숨결이 그의 살갗을 간지럽히며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 덕에 그의 어깨와 목덜미가 단단하게 굳었으나, 로제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어떡하죠? 전 크리켓 게임을 해 본 적이 없는데요.”

그렇게 속삭이고 난 뒤, 로제타가 다시 발꿈치를 땅으로 내렸다.

그녀의 입술이 멀어지자, 그제야 한 숨 돌렸다는 듯, 테런이 참고 있던 숨을 묵직하게 내쉬었다.

“제가 너무 못 해서 경기의 흐름과 재미에 지장을 줄까 봐 걱정돼요.”

테런은 고개를 저었다.

“정식 경기도 아니고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남녀 혼합으로 하게 되었으니 공놀이쯤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누군가 던지면, 누군가는 치면 되는 거죠.”

“말이야 쉽죠…….”

로제타가 자신감 없는 말투로 말끝을 흐렸다.

“아직 필드 라인을 그리는 중이니, 그럼 같이 연습해 볼까요? 막상 해 보면 생각한 것보다 쉬워서 감탄할 겁니다.”

“그럼 좀…… 가르쳐 주시겠어요? 열심히 배워 볼게요.”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려요.”

테런은 크리켓용 공을 가져와 던지는 법부터 설명을 해 주었다.

사람을 상대로 연습할 순 없으니 연무장 가장자리에 심긴 커다란 나무를 상대로 보고 섰다.

“기본적인 룰은 간단합니다. 던지는 사람이 볼러, 치는 사람이 배트맨이죠. 볼러가 던진 공을 배트맨이 치면 됩니다.”

그가 잘 가르쳐 준 덕분인지는 몰라도 이해가 쏙쏙 되었다.

오른손으로 공을 위로 던졌다 받았다 하며, 그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공은 대신 꼭 바닥으로 던져야 합니다. 한번 튕긴다고 생각하듯이 투구해야 하죠.”

로제타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복기했다.

“아……! 그러니까…… 패대기를 치면 되는 거군요?”

그 순간 테런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로제타가 왜 그러냐는 듯 그를 올려다보자, 테런이 서둘러 웃음을 참았다.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거친 언사라.”

그가 또 한 번 웃음을 참으려 ‘큼’ 소리를 내자 로제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방금 했던 말은…… 못 들은 거로 해 주시면 안 되나요?”

“뭐 어떻습니까? 패대기를 치는 게 맞는걸요.”

창피함에 로제타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항변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

바론이 시종들에게 짜증을 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렇게 다들 굼뜨나!”

아직도 필드 위에 위킷(wicket:포수 앞에 설치된 기둥. 볼러가 공을 던져 위킷을 쓰러트리면 아웃이 된다)을 설치하지 않느냐는 이유에서였다.

잡도리하듯 시종을 달달 볶는 바론의 모습을 지켜보던 두 사람의 얼굴이 착잡함으로 물들었다.

“가 보지 않아도 될까요?”

“일단은 좀 더 지켜보죠.”

테런의 목소리에는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이 잔뜩 묻어 있었다.

하지만 참아야 할 수밖에 없었다.

바론의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그의 체면을 지켜 줄 필요가 있었다.

테런은 한숨을 삼키며 애써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뒤 로제타에게 볼을 건네며 물었다.

“한번 던져 보세요.”

로제타가 두 손으로 볼을 받아 들었다.

“저쪽의 저 나무가 배트맨이라고 생각하고, 던져 보십시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뒤 힘껏 팔을 휘둘러 볼을 던졌다.

하지만 노력한 것에 비해서 공은 그다지 멀리 나가지 않았다.

힘도 없어 바닥에 닿자마자 다시 튕겨 오르지 못하고 데구루루 앞으로 구르다가 멈춰 버렸다.

로제타가 민망한 표정으로 테런을 흘깃 돌아보며 눈치를 보았다.

“치, 치는 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테런은 팔짱을 낀 상태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녀의 말이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괜히 제 발에 찔렸던 로제타가 자신 없는 톤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아마도요.”

테런이 또 한 번 풉 하고 웃더니, 이내 팔짱을 풀었다.

“그럼 이번엔 내가 저쪽에서 공을 던져 보겠습니다. 받아쳐 봐요.”

“네……!”

로제타는 이렇게까지 비장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답했다.

테런은 나무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뒤 배트를 든 로제타를 향해, 그리 세지 않게 볼을 던져 주었다.

“이얍!”

하지만 로제타는 몇 번이나 공을 치는 데 실패했다.

배트가 무척이나 커다랬는데, 일종의 현대 야구라고 생각한 그녀가 그것을 허리 위로 들어 올려 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들리지 않을 거리에서 잠시 고민하던 테런은 마침 근처를 지나던 기사 한 명을 불러세웠다.

“자네, 잠깐 우리 좀 도와주겠나?”

“물론입니다. 각하.”

테런은 기사에게 공을 건네주며 이따 신호를 주면 던져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 뒤 가볍게 뛰어 로제타에게로 다시 다가왔다.

“드는 법부터 다시 알려 드리죠.”

힘겹게 배트를 잡은 그녀의 양손을 테런의 한 손이 덮듯이 가두었다.

그런 뒤 곧바로 그녀의 뒤로 자리를 옮기고는 남은 한쪽 팔마저 앞으로 둘렀다.

마치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모양새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