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예쁜 애 옆에 예쁜 애-94화 (94/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94화

그의 긴 팔은 가녀린 그녀의 몸을 다 끌어안고도 남을 정도였다.

로제타는 숨을 멈췄다.

지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어떤 건지, 제대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새하얘졌다.

사고보다 빠른 것은 감각이었다.

코끝으로 익숙한 듯 낯선 테런의 체향이 훅 밀려들었다.

그제야 한 박자 늦게, 자신이 그에게 안기다시피 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로제타는 순간적으로 배트를 든 손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만약 혼자였었다면 배트를 떨어트리고 발등에 찧었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로제타의 손을 가두듯 잡고 있는 테런 덕분에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집중해요.”

듣기 좋은, 나직한 테런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로제타는 자신이 지금 무슨 정신으로 안겨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로제타의 등과 어깨에, 테런의 단단한 가슴이 와 닿았다.

“이렇게 상체를 숙이고.”

뒤에서부터 그녀를 껴안은 상태로 테런이 살짝 숙이자, 두 사람의 몸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테런은 배트를 쥔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그런 뒤 날아오는 볼을 맞힐 때는 밑에서 위로 걷어 내듯이, 쳐 낸다는 느낌으로. 알겠어요?”

“……네.”

얼떨결에 한 대답이었다.

테런에게는 매우 미안하지만…… 사실 제대로 귀에 들어오는 내용이 없었다.

지금 로제타의 귀에 들리는 것은 오로지 빠르고 거세게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뿐이었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켠 상태로 생각했다.

‘공작님 눈에 지금의 내 행동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을까?’

어떡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에 대한 마음이 점점 더, 갈수록 티가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걱정만 늘 뿐, 답은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투명한 물에 물감이라도 풀어놓은 것처럼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다.

“일단 한번은 같이 쳐 봐요.”

바로 지척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사뭇 감미로웠다.

그제야 로제타는 조금 이성을 차릴 수 있었다.

테런에게 꽉 잡혀 있는 손등에서 열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지만 그 감각은 애써 무시하려 했다.

‘집중…… 일단 집중부터 하자.’

로제타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기분을 환기했다.

그리고 저 앞에 볼을 들고 서 있는 기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몸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꼈는지 테런도 그녀의 손을 다시 꽉 잡았다.

그 순간 로제타의 머리카락이 살짝 흐트러지며, 테런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의 사인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사가 볼을 던졌다.

땅에 한번 부딪히고 V자를 그리며 튀어 오르는 공을 향해 두 사람은 배트를 휘둘렀다.

거의 테런의 힘이었다.

배트 중앙에 무엇인가 맞는 듯한 느낌이 나며, ‘따각’ 하는 소리와 함께 볼이 저만치 날아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볼을 맞혔다는 기쁨은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또다시 귓가에서 들려온 테런의 다정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이렇게요. 느낌, 알겠습니까?”

간지러움에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 것만 같았다.

로제타는 그런 자신의 목덜미에 빳빳이 힘을 준 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번에는 혼자 해 볼게요.”

거리가 가까운 덕에 테런은 그 속삭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순순히 로제타를 제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렇게 테런이 몇 걸음 물러설 때쯤, 로제타는 남모르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은 공기를 흔들어 버릴 정도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더 안겨 있었으면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넘어졌을지도 몰라.’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정돈하고, 로제타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사실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딱 하나, 배트는 아래에서 위로 치는 것이라는 말은 기억이 났다.

그래서 위로 들고 있던 아까와 달리 배트의 끝을 땅 쪽으로 향하게 했다.

솔직히 이 자세가 맞는 건가, 자신이 없어 힐끗, 뒤를 돌아보며 테런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그가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끼고 있는 상태에서 엄지를 척 들어 올려 주었다.

그 모습이 조금 웃겨, 피식 웃은 로제타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기사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녀가 턱을 아래로 살짝 잡아당겼다.

금세 자세를 잡은 기사는 로제타가 치기 쉽게 송구했다.

그리 빠르지도, 위협지도 않은 볼.

로제타는 끝까지 공을 바라보았고, 이내 팔을 휘둘러 배트로 힘껏 쳐 내었다.

따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배트에 볼이 맞는 느낌이 확실하게 났다.

하지만 볼이 날아간 방향은 예상치 못한 곳이었다.

볼이, 로제타가 휘두른 배트의 가운데가 아니라 끝부분에 맞아 왼쪽으로 힘껏 날아갔다.

그리고 그 끝에는…… 바론이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볼의 궤도에 로제타는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전하! 피하세……!”

하지만 그녀의 경고가 채 끝맺기도 전에, 맹렬하게 날아간 볼은 바론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빡!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가 매우 또렷하게 들려왔다.

‘아, 아프겠다…….’

너무도 충격적인 결과에, 로제타는 배트를 떨어트리고 두 손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바론의 고개가 앞으로 푹 수그러졌고, 볼은 그의 척추를 타고 구르듯이 하며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공을 얻어맞는 것과 동시에 앞으로 쏠리듯 푹 숙인 그의 고개가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로제타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울 듯한 얼굴로 테런을 돌아보았다.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은 덤이었다.

“어, 어떡해요?”

그리고 목격했다.

테런이 고개를 살짝 돌리고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고 있는 모습을.

움찔대듯 떨리는 어깨에서, 그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제타는 더욱 울상을 지었다.

‘오늘 일진이 안 좋은가 봐…….’

절로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꾹 삼킨 채, 로제타는 바론에게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를 따르듯 테런도 서둘러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바론은 선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상태였다.

‘설마, 선 채로 기절한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론의 옆에 서서 천천히 고개를 숙여 상태를 살펴보았다.

“전하, 괜찮…… 으세요?”

그녀는 걱정하는 목소리로 재차 사과를 건네며 말을 붙였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타구 연습을 하다가 그만……. 볼이 전하께 날아갈 줄 정말 꿈에도 예상 못 했어요.”

물론 평소에 기회만 있다면 바론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다는 생각은 종종 해 왔었지만, 이번은 노린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그때, 로제타의 뒤를 따라온 테런이 그녀의 옆을 지키듯 서며 말했다.

다행히도 아까와는 달리 웃음기는 싹 가신 상태였다.

“바론 전하. 괜찮으십니까? 의사를 부를까요?”

그제야 바론이 푹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얼굴에 피가 몰려 새빨개진 상태였다.

게다가 이마에 핏줄까지 곤두서 있었는데, 그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로제타에게 답했다.

“괜찮…… 습니다. 의사도, 괜찮네, 공작.”

하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아서, 로제타가 보기엔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괴기스러웠다.

로제타는 거듭 그에게 사과했다.

“정말, 정말 죄송해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어여쁜 미인이, 자신에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화를 조금이나마 누그러지게 했다.

그래서 그는 대인배인 척, 연기하며 호탕한 목소리를 꾸며 이야기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연습하다가 실수로 날리신 것을요. 혹은 좀 나겠지만요.”

“하지만 그래도……. 의사는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다못해 얼음찜질이라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제안은 받아들이겠다는 듯 이내 바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디 클리프께서 권하신 얼음찜질은 조금 솔깃하군요.”

테런이 근처에서 위킷을 세우고 있던 시종을 손짓으로 부르려 했다.

하지만 바론이 손을 들어 테런을 만류했다.

“괜찮네. 얼음찜질은 안에 들어가서 할 테니까 말이야.”

바론은 연무장에 보는 눈이 많은 것을 의식했다.

그래서 볼썽사납게 머리에 얼음주머니를 대고 바보같이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폼은 결국 자존심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바론은 짜증이 묻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패트릭을 불렀다.

“패트릭. 나와 함께 잠깐 들어가지.”

“예, 전하.”

“그럼 저는 한 시간 정도 뒤에 나오겠습니다. 크리켓은 그때 다시 하도록 하죠. 그때쯤이면 필드 정리와 위킷도 다 세워졌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레이디 클리프께서는 그 시간 동안 타구의 정확도를 조금 더 높여 보시길.”

“정말 죄송해요.”

바론이 입꼬리만 끌어 올린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로제타가 옆에 선 테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을까요?”

“생각보다 머리가 단단하신 것 같으니 괜찮으실 겁니다.”

마치 바론이 돌머리라는 것을 돌려 말하는 것 같은 뉘앙스였다.

“그게 무슨…….”

로제타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테런이 허리를 숙여 근처에 떨어져 있는 크리켓 볼을 집어 들었다.

공은 실밥이 살짝 터져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로제타의 눈에 경악의 빛이 어렸다.

그녀가 슬그머니 벌어진 제 입술 위를 두 손으로 덮듯이 잠시 가렸다.

그런 뒤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볼이 터질 정도면 제가 진짜 세게 쳐 버린 거 아니에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