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95화
“그럴 리가요.”
테런은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크리켓 배트의 무게는 상당히 나가는 편이었다.
그래서 여성용 크리켓 배트가 따로 제작될 정도였는데, 지금 연습하면서 사용한 것은 성인 남성용이었다.
로제타의 힘으로는 그것을 컨트롤 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벅찼을 것이다.
아까 그녀가 배트를 잘 못 다루었을 때, 어깨 위로 들어 올리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확신할 수 있었다.
얼떨결에, 날아온 볼은 제대로 맞혔으나 그것이 그리 빠른 속도로 날아 가진 않았다는 것을 그의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그러니 그의 생각엔, 바론이 아픈 것보다는 ‘자신이 무척이나 볼품없게, 공에 뒤통수를 얻어맞았다’라는 사실에 대해서 더 큰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얼음찜질을 핑계로 자리를 뜬 것 역시 그러한 맥락의 일환이리라.
“농담입니다. 너무 겁먹은 것 같아 긴장을 좀 푸시라고 한 말이죠. 실밥은 아마도 원래부터 조금 풀려 있었겠죠.”
“공작님도 참. 지금 그런 농담 하셔 봤자 간담만 서늘해진다고요.”
“……미안합니다.”
두 사람이 가볍게 투닥대고 있는 사이, 바론이 연무장 계단을 완전히 다 올라 모습을 감추었다.
“연습 더 할 겁니까?”
“배트가 너무 무거워요.”
“나중에게임 할 땐 여성분들이 던지기만 하실 수도 있어요.”
그때였다.
“깨깽! 깽! 깽!”
금방이라도 자지러질 듯이 목 놓아 우는 개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깜짝 놀라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연무장의 위쪽이었다.
로제타는 그 목소리가 토토의 것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토토는 오늘 클라리사, 체이스 왕자님과 산책한다고 했는데?’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며 짖을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로제타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녀는 드레스 치마를 걷고 굳은 얼굴로 뛰기 시작했다.
테런 역시 딱딱한 얼굴로 그녀의 곁을 지키듯 따라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금세 계단을 올랐다.
“토토!”
연무장에서 들었던 큰 소리는 더는 나지 않고 있었지만, 훌쩍이는 울음 소리와 함께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희미하게 ‘끼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제타는 테런과 눈빛을 주고받고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 걷지 않았을 때였다.
로제타의 골반 높이까지 오는 키가 작은 관상목을 지나자, 믿기지 않은 광경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로제타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가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상에. 어, 어떻게 이런…….”
“조심하십시오.”
테런이 휘청하는 로제타의 몸을 서둘러 부축했다.
“언니…….”
로제타와 테런이 서 있는 자리에서 단 세 걸음 떨어진 곳에, 클라리사와 체이스가 주저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힘없이 축 늘어진 토토를 품에 안은 채였다.
로제타는 약간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저만치 떨어진 저택 현관 쪽에서 씩씩대며 안으로 들어가는 바론과 고개를 조아리며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패트릭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뒷모습을 확인한 로제타가 서둘러 다시 두 아이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이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
클라리사의 두 눈에서 유리구슬같이 투명한 눈물이 고이더니 이내 후드득 떨어졌다.
“바론 님이…… 흑. 바론 님께서 우리 토토를…….”
클라리사는 감정이 북받쳤는지 우느라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체이스가 무척이나 속상한 얼굴로, 그러나 클라리사 보다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형님께서 매우 기분 나쁜 표정을 지은 채 연무장에서 올라오셨습니다. 그때 저희와 마주치고 말았죠.”
클라리사는 자신도 설명을 이으려는 듯 다시 입을 열었지만, 울음에 제대로 말을 끝내지 못했다.
“인사만 드리고 가려고 했는데…… 흐흑.”
“괜찮습니다. 공녀. 내가 설명할게요.”
체이스가 어른스럽게 클라리사를 다독이며 무거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형님께서 갑자기 화를 내시며 저희에게 다가오시더군요. 아, 아니……. 정확하게는 제게요.”
체이스는 마지막 말을 거의 뭉개듯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체이스의 모습에선 무엇인가를 감내하려는 듯한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로제타와 테런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굳이 끝까지 듣지 않더라도 평소 이 작은 아이가 제 형인 바론에게서 종종 화풀이를 당해 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리긴 해도 왕자다.
체이스는 자존심이 강했지만, 그래도 현재 상황에서까지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 사실을 침묵하여 덮어 버리는 치졸하고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로제타는 그가 가엾으면서도 대견하게 느껴졌다.
몸에서 묵직하게 숨을 몰아낸 뒤 체이스가 더듬거리며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까이 오신 형님께서 절 향해 손을 드셨고, 옆에 있던 공녀가 많이 놀랐습니다. 형님을 말리려고 다른 쪽 팔을 잡았는데…… 형님께서 공녀를 내팽개치셨습니다.”
바론이 크게 팔을 휘두르자 클라리사의 작은 몸은 힘없이 나가떨어졌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듯했다.
그 모습을 본 토토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바론을 향해 무섭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에어데일 테리어는 사냥개 중에서도 충성심이 남다른 견종이었다.
토토는 자신의 작은 주인을 위협하려는 바론에게 분노했을 것이고, 클라리사를 지키기 위해 바론에게 달려 들었을 것이다.
“형님의 화가 제가 아닌 토토에게 실렸습니다.”
클라리사가 헐떡이듯 울면서 일러바치듯 목소리를 높였다.
“토토는……! 토토는 절 지켜 주려고 그랬어요. 그래도, 그래도 바론 님을 물지 않았어요! 그냥 저한테 다가오지 말라고, 제자리에서 뛰면서, 흡, 그렇게 으르렁거리기만 했단 말이에요.”
체이스가 동의하듯 작은 머리를 무겁게 떨군 채 끄덕였다.
로제타는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앞에서 바론은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때 토토가 그의 눈에 띈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으리라.
사람도 아닌, 말하지 못하는 짐승.
바론에게 이보다 더 좋은 화풀이 상대는 없었을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연이어 들린 토토의 목소리로, 몇 번이나 걷어차였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로제타는 이 짧은 새 벌어진 모든 일들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아무렇지 않게 동물을 학대하고, 심지어 그 모습을 아직 자라야 할 날이 많은 어린아이들 앞에서 보이다니.
아무리 여자 주인공을 만나지 못해 개과천선하기 전이라곤 하지만 바론의 성격이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로제타는 클라리사의 다리 위에 머리를 기대고 가쁜 숨을 몰아 내쉬는 토토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접어 주저앉았다.
“토토…… 괜찮니?”
토토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감고 있었다.
로제타는 개를 달래는 듯 조심스럽게 머리를 몇 번 쓰다듬다가 천천히 아래로 손을 내렸다.
“끼잉. 낑.”
갈비뼈가 부러진 모양인지, 그녀의 손이 가슴 근처에 닿자 토토가 고통스러워하며 목 놓아 울었다.
“어, 어떡해…….”
로제타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냥 원래 세웠던 계획대로 실내에서 독서 모임이나 할걸.
밖으로 나왔어도 테런에게서 크리켓을 배우지 말걸.
그냥 구경이나 하고 있을걸.
그랬더라면 바론이 자신이 날려 버린 볼에 뒤통수를 맞지 않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바론이 화가 나서 연무장을 벗어나지 않았을 테고, 이 아이들과 마주치지 않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토토가 지금 이렇게 아파하며 누워 있지 않았을 텐데.
토토는 클라리사를 지키기 위해 그녀를 위협하는 바론에게 대든 것이었다.
하지만 로제타는 토토에 대한 미안함을 지우지 못했다. 다 자신이 결정을 잘못 내린 것 같아 마음이 자책감으로 물들었다.
묵묵히 그녀의 뒤를 지키듯 서 있던 테런이 로제타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바지가 바닥에 더러워지는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로제타가 고개를 떨구고 있는 쪽의 바닥이 조금씩 젖어 갔다.
테런이 점점 짙어지는 바닥 색을 아프게 바라보다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차마 로제타에게 닿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
잠시 망설이던 테런은 왼손을 힘주어서 한번 주먹 쥐었다가 이내 이를 악물었다.
그런 뒤 흐느껴 우는 로제타의 가녀린 어깨를 감쌌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
그녀에게 맞닿아 있는 손바닥을 통해, 로제타의 들썩임이 전해졌다.
어떻게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아릴 수 있는 걸까.
그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로제타를 감싸 안고 있는 손의 손가락을 잠시 들어 올렸다가 이내 내렸다.
“그러니 울지 말아요.”
그녀를 다독이는 그의 목소리에 침통함이 어려 있었다.
* * *
테런은 와튼에게 일러 가문의 주치의를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이 세계에 수의사라는 개념이 없어 그 점이 조금은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진찰을 받을 기회가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괜찮습니까?”
“네, 공작님 덕분에 많이 진정됐어요.”
로제타는 간신히 감정을 가다듬었다.
토토의 일은 마음이 아프지만, 눈앞에서 그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던 아이들의 상태도 추슬러야 했다.
눈물이 마른 눈동자가 따끔했다.
토토의 일을 다시 꺼내 입에 올리자니, 금세 또 코끝이 시큰해졌으나 로제타는 꾹 참았다.
지금은 자신이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달래야 할 때였다.
“클라리사, 많이 놀랐지?”
“흐, 흑. 흑.”
클라리사는 로제타에게 달려들 듯 안겨 그녀의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하는지 작은 어깨가 사정없이 들썩였다.
로제타는 제게 더욱더 파고들며 우는 아이의 작은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며,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왕자님께서도 놀라셨죠?”
체이스는 작은 두 손을 야무지게 말아 쥐고 입술을 사리물고 있었다.
소년은 자신 역시 충격이 컸을 텐데도 의젓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전 괜찮습니다.”
로제타는 그런 체이스를 잠시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다가 다시 클라리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아이의 어깨를 가만히 그러쥐고 천천히 제게서 떼어 내었다.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클라리사. 체이스 왕자님과 방으로 돌아가렴. 토토는 나와 공작님이 옆을 지키고 있을게.”
“토토는…… 흑. 괜찮을까요?”
테런이 어린 동생을 안심시키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오라비가 의사에게 최선을 다해서 치료하라고 이르마.”
진중한 테런의 목소리에서 신뢰를 얻은 클라리사가 로제타의 드레스를 꼭 쥐고 있던 손에서 천천히 힘을 풀었다.
로제타는 키를 맞추듯 쭈그리고 앉아 아이의 은빛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돌아가서 레나에게 따뜻한 코코아를 가져다 달라고 하려무나. 마시멜로도 얹어서 말이야.”
“코코아요?”
“그래. 달콤한 것을 먹으면, 나쁜 기억이 모두 사라져 없어질 거야.”
도저히 웃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로제타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야 여린 아이가 조금이라도 안심할 것만 같아서.
“만약 그랬는데도 놀란 가슴이 영 진정되지 않는다면…… 할머님과 함께 있으렴.”
카밀라가 아무리 무섭다고 한들 큰 일을 겪고 우는 손녀를 다그치며 달래진 않을 것이다.
로제타의 다정다감한 걱정의 말에, 클라리사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얼굴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차오르던 눈물은 이내 무거워졌지만, 클라리사는 울지 않겠다는 듯 오른손을 들어 팔과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내었다.
로제타는 장하다는 듯 클라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체이스 쪽을 돌아보았다.
아이에게 다른 아이를 맡기는 것이 책임감을 지게 하는 일인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지만, 현재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왕자님. 클라리사를 부탁드릴게요.”
그녀의 부탁에 체이스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주저하다가 클라리사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그런 뒤 클라리사의 손을 꼭 잡았다.
“갑시다, 공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