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97화
그녀를 알아본 사용인들이 저마다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 아가씨…….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설렁줄을 당기셨으면 저희가 올라갔을 텐데요.”
그들은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렸다.
이곳에 있는 사용인 모두, 갑자기 등장한 로제타의 존재를 불편해했다.
하지만 그것은 로제타의 머리카락 색과 출신에 대한 차별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보다 윗사람인, ‘귀족인’ 로제타를 불편해하는 것이었다.
에스테스 공작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정말 신기하게도 상냥하고 마음씨 좋은 이들만 모여 있었고, 그래서 그녀도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에스테스 공작가의 주인들의 성품이 사용인들에게도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사용인들은 커다란 식사용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무엇인가를 막 먹으려던 참인 듯 보였다.
“늦은 시간인데…… 다들 지금 끼니를 때우는 건가요?”
“아, 아닙니다.”
모두 한목소리로 부정했다.
“그저 오늘 하루도 무사히 끝냈구나 싶어서, 저희끼리 한잔 좀 하려고 모여 앉은 겁니다.”
“아…… 그렇군요.”
귀족들의 정찬이 끝나자 그들 나름대로 오늘을 마무리하고 허기를 달래려는 모양이었다.
로제타는 자신이 사용인들의 휴식 시간을 방해한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괜찮다는 듯 미소 지어 보이며, 그들에게 어서 다시 앉으라고 손짓을 해 보였다.
“다들 앉아요. 괜찮으니까. 내가 괜히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마음이 한결 편안하네요. 정말 그냥 계속 들도록 해요.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게 아니라, 그냥 지나는 길이었거든요.”
“지나는 길이라 하시면……?”
로제타가 눈썹을 아래로 내려트리며,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마구간엘 좀 가 보려고요.”
“아…….”
사용인들 사이로 나직한 탄식이 흘렀다.
그들 역시 낮에 벌어졌었던 일에 대해 건너 전해 듣고 알고 있는 참인 듯했다.
괜히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애써 위로 끌어 올리고 있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시선 역시 덩달아 아래로 내려갔고, 그녀는 양손의 손가락을 얽으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묵직한 침묵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로제타의 잘못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부채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 변화를 눈앞에서 본 사용인들은 안쓰럽다는 얼굴을 하고서 저마다 한마디씩 위로의 말을 건넸다.
“괜찮을 겁니다. 그러니 그런 표정 마셔요.”
“토토가 많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어서 가 보세요, 아가씨.”
“……고마워요. 모두.”
로제타가 착잡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다시 눈을 들어 올렸다.
“식사 마저들 해요.”
덧문 쪽으로 몇 발자국 옮기던 로제타의 걸음이 다시 멈췄다.
“아.”
천천히 뒤돌아보며, 그녀가 미안하다는 듯 주방장을 향해 말했다.
“혹시 괜찮으면 치즈를 조금 나눠 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아가씨.”
토토에게 주려는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주방장은 솜씨 좋게 치즈를 잘랐다.
딱 토토가 먹기 좋은 한입 크기였다.
“고마워요.”
종이에 싸 준 것을 손에 꼭 쥔 채, 로제타는 걸음을 재촉했다.
토토의 상태가 무척이나 걱정되었다.
* * *
해가 진 지 오래였지만, 마구간 근처는 무척이나 환했고, 또 사람들이 모여 있어 두런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불빛과 들리는 음성에 로제타는 더욱 마음이 급해져 걸음을 재촉했다.
“토토는 좀 어떤가요?”
마구간에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로제타는 질문을 던졌다.
“오셨습니까, 영애.”
심각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집사 와튼이, 로제타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곧장 자세를 바르게 한 뒤 그녀에게 묵례했다.
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로제타는 재차 토토의 상태를 살폈다.
마구간의 평평한 곳에 잘 마른 지푸라기를 깔고, 또 그 위 마른 린넨을 펼친 곳에 토토가 누워 있었다.
토토의 가슴 부분에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두껍게 붕대가 감겨 있었다.
가슴 양쪽에는 납작한 판자도 부목처럼 덧대어진 채였다.
로제타는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조금도 상관하지 않고 그 근처에 무릎을 꿇듯이 하며 앉았다.
“갈비뼈가 부러진 건가요?”
와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 말이 최대한 움직이지 않게 하는 게 좋다고 하더군요. 잘못 움직였을 때, 날카로운 쪽이 장기를 찔러 내부 출혈을 일으키면 큰일이 난다고요. 그래서 붕대를 감아 둔 것입니다.”
걱정이 가득한 로제타의 얼굴을 바라보며, 와튼은 차마 다음 말은 있지 못했다.
의사는 토토의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완쾌는 어려울 것 같다는 소견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 말까지 로제타에게 전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인 것 같아 말을 아꼈다.
울었는지 토토의 눈가 부분의 털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 얼굴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로제타는 다시 와튼을 올려다보았다.
“수술을 할 수는 없는 건가요?”
그녀의 말에 마구간에 서 있던 모두가 난색을 보였다.
“어렵습니다.”
“많이 어려운 수술인 건가요?”
“그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도 개를 위한 수술을 하지 않습니다. 아마 이 대륙을 다 뒤져 보아도, 해 봤다는 의사도 나타나지 않겠죠.”
“아…….”
로제타가 흐린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이 세계에 수의사라는 직업이 없다는 것을 잠깐 깜빡 잊고 있었다.
그때 토토가 한참 만에 느린 속도로 거친 숨을 토해 내었다.
“숨은…… 숨은 왜 이렇게 이상하게 쉬는 거죠?”
“뼈가 다쳤고, 그 주위의 근육도 많이 상했겠지요. 아마 지금은 호흡하는 것조차 고통인지 숨을 참았다가 몰아서 쉬고 있습니다.”
“그러면…… 진통제라도 먹일 수 없을까요? 너무 힘들어하잖아요.”
“사람이 먹는 약은 동물에게 위험할 수가 있어서…….”
로제타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와튼의 잘못도, 의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토토가 저 작은 몸으로 엄청난 고통을 홀로 참아 내는 동안 자신이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로 하여금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바론을 용서하기 어려웠다.
‘망할 놈 같으니라고! 인간이길 포기한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기보다 약한 동물을 이렇게 만들겠어?’
로제타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바론이 여자 주인공인 제니스를 만나 개과천선을 하는 것보다 자신이 그 망할 놈의 다리 사이를 걷어차, 진짜 사람 구실 못 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더 빠를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토. 많이 힘들지?”
로제타가 손을 뻗어 토토의 이마를 살짝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자 아파서 눈을 감고 있는 와중에도 로제타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손길을 느낀 모양인지, 토토의 꼬리가 힘없이 두세 번 좌우로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본 로제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 바보야. 뭐가 좋아서 꼬리를 흔드니?”
차라리 아프다고, 아파 죽겠다고 자신의 손을 꽉 물기라도 하지.
그녀는 토토를 위해 자신이 따로 해 줄 것이 없다는 게 너무 속상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하다못해 토토를 마구간이 아니라 제 방으로 옮겨 직접 보살펴 주고 싶었지만, 현 상황에선 움직이는 것이 몸에 더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하여 그마저도 욕심낼 수가 없었다.
로제타의 눈에서 방울방울 흘러내린 눈물은 마른 볏짚 위로 툭, 툭 떨어져 내렸다.
벼는 점점 더 갈색빛으로 물들었다.
마구간의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의 흐느낌이 마구간을 가득 채웠다.
와튼이 무거운 마음을 덜어 내고 싶다는 듯 길게 숨을 내쉬며 상의 안주머니를 뒤졌다.
잘 다린 손수건을 꺼낸 그가 공손히 로제타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밤이 늦었습니다. 이만 돌아가십시오. 토토는 저희 시종들이 돌아가며 잘 간호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 아이를 아끼니까요.”
에스테스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모두 근속 년수가 길다.
그러니 최근에 새로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 토토를 알았다.
토토는 단순히 테런의 사냥개가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개였다.
로제타는 발개진 눈시울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토를…… 아이를 따뜻하게 잘 보살펴 주세요. 내일 손님들을 배웅하자마자 바로 와서 교대할게요.”
6. 깨어나는 진실
로제타는 터벅터벅 힘없이 걸었다.
우느라 열이 몰렸던 머리는 찬바람을 쓰자 어느덧 식어 제 온도를 찾은 것만 같았다.
그녀는 정원에 서서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3층의, 클라리사가 있는 방이었다.
잘 시간이 훌쩍 넘었기에 아이의 창문에 이미 불이 꺼져 캄캄했다.
아마 토토의 상태가 궁금해 로제타에게서 설명을 듣기 위해 기다리다 평소보다 늦게 잠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제타는 그것을 알면서도 곧장 클라리사에게 가진 못했다.
토토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여 마구간에서 예상보다 더 오래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또, 그녀는 아이가 많이 슬퍼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토토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도저히 전해 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 너무 비겁하다.”
쓸쓸하게 중얼거린 로제타가 클라리사의 방 창문에서 어렵사리 시선을 떼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슬슬 밤바람에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이제 들어가야지.”
내일 조찬을 함께 들고 오전에 손님들을 배웅해야 했다.
내일 오전까지는 빼도 박도 못 하게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기에, 로제타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섰다.
그사이 사용인들도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다 퇴근하거나 자신의 숙소로 돌아간 모양인지, 에스테스 하우스의 실내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생각보다 컴컴해 발을 내딛기가 조금 무서웠으나 금세 암순응을 한 모양인지 앞을 식별할 수가 있었다.
로제타는 3층의 제 방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걸어가다가, 빌리어드 룸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문은 꼭 닫혀 있었으나 바닥과 문 사이에 난 작은 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